삼국지 전쟁중 가장 큰 전쟁이었던 적벽대전은 바람이 승패를 갈랐다. 長江을 끼고 조조의 1백만대군을 맞은 오·촉연합군은 고작 5만명. 도무지 상대가 안되는 열세였다. 그러나 오나라엔 지모가 뛰어난 주유가, 촉나라엔 천하의 전략가 제갈공명이 있었다.
주유와 공병은 조조군을 격파할 전략을 각자 손바닥에 쓴뒤 서로 보여주기로 했다. 둘이 손바닥을 펴자 모두 화공(火功)을 뜻하는 ‘火’자가 써여져 있었다. 그러나 때는 겨울철, 북서풍을 등지고 있는 조조의 군선을 불화살로 공격하려면 동남풍이 불어야 하는데 바람은 그 반대였다.
공명이 방통을 시켜 연환계(連環計)로 조조의 전함들을 하나의 성체처럼 꽁꽁묶어 놓게 하고, 유비휘하의 노장 황개에게 고육책(苦肉策)을 써 조조에 거짓 항복케한후 조조군의 수문을 열어놓게 했으나, 문제는 바람의 방향이었다.
그때 공명이 남명산에 제단을 쌓고 하늘에 빌어 동짓달 스무날로부터 사흘밤낮으로 동남풍을 불게해달라고 빌었다. 기원한 날짜에서 하루 지난 스무하룻날 삼경(三更)이 되자 동남풍이 불기시작했다. 오·촉 연합군은 火공으로 조조의 백만대군을 궤멸시켰다.
동남풍을 부른 공명의 신통력은 기상변화에 통달한 공명의 지혜에서 나온 것. 공명은 그전부터 어부들로부터 적벽에서는 동지를 전후해서 미꾸라지가 배를 보일즈음 동남풍이 분다는 사실을 알고 이것을 전략에 활용한 것이다.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과정에서 ‘노무현바람’이 대권가도를 강타하고 있다. 91년대선때도 ‘정주영바람’이란게 있었다. 재벌총수의 권력게임이라는 비판속에 ‘정주영바람’은 ‘뜻밖의 돌풍’이었다. 3김정치에 질린 국민들의 정치변화 욕구와 노태우정권의 경제정책 실패로 ‘경제대통령’을 갈구하는 국민적 열망이 정주영돌풍의 진원지였다. 정주영씨는 이러한 시류를 잘 포착했으나 그 바람이 대선막판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전남 광주에서 시작된 ‘노무현동남풍’이 ‘제갈공명의 동남풍’이 될지, 일순간 스쳐가는 허풍이 될지, 대선정국은 ‘바람전쟁’이 될 것같다. 바람의 방향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것. ‘바람정치’는 안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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