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1916년 원산항에서 태어났다. 청년시절 그는 중국군에 들어가 ‘조선의용군’에 편입, 日軍과 피나는 전투를 전개한다. ‘태항산 전투’에서는 그는 다리에 총탄을 맞고 포로가 됐고, 4년형을 받고 감옥에 갇혔는데, 전향서를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총상입은 다리를 치료받지 못했다. 썩어들어가는 한 다리를 절단할 수밖에 없었고 그후 그는 목발을 짚었다.
해방후 출옥한 그는 1년가량 서울에서 소설을 쓰다가 월북해 ‘로동신문’ 기자로 일했으나, 북한정권을 비판한 것이 문제가 돼 중국으로 망명했다. 모택동의 문화대혁명 당시 그는 ‘20세기의 신화’라는 소설을 썼다. 그것은 毛의 독재와 개인숭배 강요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그 소설은 발표되지 못했음은 물론 그는 ‘반혁명 구린내 나는 지식인’으로 몰려 10년간의 감옥살이와 12년의 유배생활을 하게된다.
모택동의 사망과 함께 자유의 몸이 된 그는 길림성 연변에서 창작활동을 하는데, 항일무장투쟁시절의 경험을 토대로 ‘해란강아 말하라’ ‘격정시대’ ‘최후의 분대장’ 등을 쓴다.
88년도에 그는 목발 짚은 몸으로 서울을 방문했다. 한국 작가들이 초청을 한 것이다. 당시 이렇다 하는 북간도 조선족 인사들이 서울에 왔는데 그들 대부분은 곰쓸개나 사향 등 약품을 가져와 팔았고, 무엇이든 얻어가려고 했으나, 김학철만은 전혀 유가 달랐다.
꼿꼿한 정신을 가진 그였지만 ‘찬바람 나는 강직’이 아니라 ‘푸근한 유머에 감싸여진 강직’이었다. 그의 작품 전편에 면면히 스며 있는 유머감각은 그런 성품의 반영이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들을 한국판으로 펴내는 일만 보고 금방 돌아갔다.
2001년 9월 25일 그는 85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불치의 병에 걸렸음을 안 그는 곧 단식에 들어갔다. “사회의 부담을 덜기 위해, 가족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더는 련련하지 않고 깨끗이 떠나간다. 병원 주사 절대 거부, 조용히 떠나게 해달라”란 유서를 남겼고, 단식 20일만에 절명했다.
조국 독립을 위해, 독재의 전횡에 저항하며 곧은 글만을 썼던 일생. “편히 살려거든 불의를 외면하고, 인간 답게 살려거든 불의에 도전하라”란 유언은 작가들을 향한 경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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