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정권때 국회의원을 지냈던 故김두한의 아버지인 白冶 김좌진장군은 1889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3세에 아버지를 잃었고, 15세 되던 해 집에서 부리던 노비 30여명을 천민신분에서 풀어주었다.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전답을 나눠주어 자유롭게 살게한 인간평등주의자였다.
백야장군은 1920년 10월 장백산(백두산)으로 부대를 이동하던 중 일본군 대부대를 청산리에서 만나게됐다. 독립군을 격파하기 위해 만주로 출병하는 일본군대였다. 청산리 전투는 3일간 이어졌고, 10차례의 접전에서 일본군 3천여명을 괴멸시키는 기적같은 대첩을 거두었다.
청산리전투후 김좌진장군은 학교설립에 주력했다. 조선인의 계몽과 자주독립정신을 심어주기 위함이었다. 힘은 배움에서 나온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때 세운 학교가 9개나 된다. 그러나 1930년 백야는 공산주의자였던 동족 박상실의 총탄에 맞아 세상을 버렸고, 그후 학교들은 하나둘 문을 닫았다.
그러나 아직 살아 있는 학교가 있으니, 그것이 흑룡강성 해림시에 있는 ‘신창 조선족 실험소학교’다. 1926년 2명의 교사에 학생 60명으로 문을 연 이 학교는 지금 교사 57명에 학생 530명이 돼 있다. 우리말과 우리글로만 수업을 한다.
그런데 이 학교가 지금 ‘코리아드림’의 후유증을 앓고 있다고 한다. 부모들이 한국으로 돈벌러 가고 아동들은 고아 처럼 친인척 손에 맞겨져 양육되고 있는데, 보통 2~3년, 길면 5~6년 이산가족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가정교육이란 없고 잡아줄 어른이 없으니 아이들은 점점 문제아가 돼간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돈벌어간 가정들은 갑작스런 富를 과시하면서 빈부간의 사회적 갈등과 위화감을 키워가며, 부잣집 자녀들은 퇴폐향락에 맛들여져 비행청소년이 돼간다는 것이다.
백야와 그 유자녀를 봐서라도 ‘조선족실험소학교’는 잘 유지돼 ‘기념비적 학교’가 되도록 정부와 기업들이 돌봐주면 좋겠는데, 최근 대구 한 벤처기업 대표 박무희(40)씨가 3만위안을 장학금과 예술단 운영자금으로 이 학교에 내놓는다고 한다.
요즘 ‘야인시대’가 인기충천인데, ‘김두한 아버지’의 유업에도 관심을 기울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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