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년 5월 절강성 항주서 중국공산당공작회의가 마오쩌둥(毛澤東)의 주제로 열렸다. 의제는 ‘중국사회주의 교육講話’였다. 기립표결하는 관례에 따라 반대자는 일어서게 돼있었다. 그때 오직 한 사람이 일어섰다. 5척단구의 덩샤오핑(鄧小平)이었는데, 일어선 사람의 키가 앉은 사람의 키와 비슷했다. 마오쩌둥은 만장일치로 가결된 것으로 선포하려하자 鄧은 책상위로 껑충뛰어 올라가 끝까지 반대의사를 표했다. 등소평이 아니면 감히 누구도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이같은 鄧의 타고난 대담성과 솔직함때문에 毛의 눈에 가시가 되어, ‘부도옹(不倒翁)이라는 별명이 상징하듯, 숙청과 재기의 연속인 파란만장한 정치적 수난을 감수해야했다.
1992년 1월17일 한 특별열차가 북경을 출발, 남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 열차엔 권좌서 물러나 침묵하고 있던 덩샤오핑이 타고 있었다. 열차는 이틀뒤 중국제일의 개방도시 심천(深川)에 도착했다. 개방 10년만에 허허벌판이 신흥도시로 변모한 ‘상전벽해’심천을 바라보면서 등소평은 감탄 대신 “개혁 개방이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고 질타하면서, “논쟁을 중지하라”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를 가지고 논쟁하지말라”는 엄명을 내렸다. 덩샤오핑의 제2개혁선언인 ‘남순강화(南巡講話)’가 시작된 것이다.
당시 중국지도부는 서방의 ‘화평연변(和平演變)전략(평화롭게 사회주의국가를 와해시킴)’에 대항하기위해 철통같은 이념의 장막을 구축해야 한다는 북경중심의 ‘京派’와 개혁 개방을 가속화 해야한다는 상해중심의 ‘海派’와의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鄧의 개혁·개방계획이 흔들렸다. ‘남순강화’는 이를 타개하기위한 鄧의 결단. “경제를 발전시키지 않고 인민의 생활을 개선하지 않으면 死路가 있을 뿐이다. 모든 판단의 기준은 생산력의 발전에 유리한가 그렇지 않은가에 두어야 한다”면서 “‘경제건설을 위해 대담하게 시도하고 대담하게 돌진하라”고 호령했다.
지금 중국이 경제적 대약진을 구가할 수 있는 것은 덩샤오핑의 경제건설에 대한 일념이 토대가 된 것이다. “과거사를 이대로 덮고 3만달러 시대로 가면 무엇하느냐”고 하는 노대통령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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