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선입견·편견에 끌려 다니면 절대적 진리 맥락 못찾아

학생들에게 과학의 진리란 무엇인가? 라고 물으면 대뜸 "예를 들면 '지동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 때 기독교의 권위주의가 판을 칠 때는 그것을 잘못된 것으로, '천동설'이 진리로 믿은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과학자 갈릴레오에 의해 오류가 수정됐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또 "빛이 직선으로 진행하는 것을 진리로 알았는데,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에 의해 그것도 굽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물론 이것이 과학적 진리입니다"라고 자신 있게 답하는 젊은이들이 적지 않다. 다시 한 번 물어보자. '과학이란 정말 영구불변하는 진리인가?' 그들은 '과학 지식은 영구불변한 것으로 언제, 어디서나 진리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과학을 탐구할 때 우리는 영원한 진리를 갖게 돼 행복할 수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 과학에 대한 이런 맹신론은 과학의 발전을 방해할 수 있고, 심지어 그 자체로 과학을 떠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선 알아야 할 것은 과학적 이론이나 지식은 역사적 산물이라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영원한 진리를 담보하지 않는다. 예컨대 지동설의 경우 그것이 중세의 그늘에서는 지구와 태양의 상대적 운동 방향을 정확하게 지시 했어도, 과학이 더 진보한 지금의 경우는 의미가 사뭇 다르다. 태양계 안에서는 태양이 움직이지 않고 대신 지구가 그 주위를 주유하고 있지만, 은하계에서 보면 하늘은 지금도 끊임없이 팽창하고 새롭게 생성 된다고 한다. 엄밀히 말해 하늘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지동설과 마찬가지로 천동설도 통용 가능한 이론이다. 나아가 서로 모순으로 보이는 수 많은 우주의 각종 지식은 뉴턴시대의 인식과는 다른 차원에서 검토돼야 한다. 그것은 절대적 진리가 아니다.

이런 상대적 진리는 어쩌면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고 순복하기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마뜩찮아 보인다. 그들은 늘 진리란 불변하고 허물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절대적 진리란 많지 않다. 절대적이라고 믿고 싶거나 진리라는 개념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진리를 확인할 길도 많지 않다. 대부분은 사람들이 그래야만 된다고 생각하거나 다른 사람들의 말에 의존해 그런 주장을 펼친다. 알고 보면 우리가 다루는 사안이 스스로의 확신 이외에 진리임을 보증하는 증거란 딱히 없는 경우가 많다. 이유는 우리 인식의 한계로 선입견과 편견에 끌려 다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이미 진리로 인정된 사태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보이고 달리 봐야 할 문맥도 상당히 많다. 과학적 진리가 이럴진대 사회·정치적인 진술이나 문화적 맥락에서는 어떨까. 단 하나의 기준으로 판단하거나 식별하는 경우 실제 사정과 판이한 사태가 얼마나 나올 수 있겠는가. 최근 사회의 갈등과 민심을 추스르며 여소야대의 정국을 풀어나가기 위해 여야 정당들은 원칙적으로 합의했었다. 그러나 이제 실무적인 사태를 다루려고 하니 많은 부분을 각 당이 '생각하는 대로' 차이점이 드러났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는 절대적으로 옳고, 너는 절대적으로 틀렸다'라는 주장을 시작하였다. 그들을 바라보니 슬그머니 의문이 돋는다. '왜 그들은 아직도 지동설만을 진리라고 굳게 믿고 있는가?' '이제는 천동설도 의미 있는 주장이 아닐까?' 문제는 절대적 진리라는 주관적 확신이 아니라, 진리가 되는 맥락이 초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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