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한기웅씨.
2012년 6월 21일. 지역방송가에서는 기적이 일어난 날이다.

2008년 5월 첫 전파를 탄 TBC 대구방송‘싱싱고향별곡’의 시청률이 MBC 무한도전을 1.6%P 차이로 누르고 16%의 고지에 올랐기 때문이다.

프라임타임 때가 아닌 토요일 오전 7시 40분에 방송하고도 이 같은 시청률을 보인 것은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

촌스러운 사투리로 무장한 남녀 진행자가 시골 마을 어르신들과 이야기 나누는 단순하기 짝이 없는 프로그램이지만, 싱싱고향별곡은 어르신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다.

색동저고리 입고 트로트 부르는 천단비(24)양을 앞세우고 북 장단에 거부감 없는 사투리를 쏟아내는‘기웅아재’한기웅(48)씨가 싱싱고향별곡의 중심에 있다.

유재석, 강호동 못지않은 유명 방송인이 된 한기웅씨를 만났다. 인기 방송인이 아닌‘인간’한기웅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다.



▲잘살 수밖에 없는 인간

경북 성주 촌놈인 한씨는 10살 때 집을 나간 아버지 대신 몸이 아픈 어머니와 남동생, 여동생을 보살펴야 했다.

17살 때 피를 토하면서 숨져가던 어머니를 땅에 묻은 그는 “이제 나는 잘 살 수밖에 없는 놈”이라고 스스로 최면을 걸었다. 지독하게 가난한 생활의 연속이었지만 절망하지 않았다. 택시기사에서부터 허드렛일까지 닥치는 대로 해나갔다.

한씨는 “동생 학비 주려면 현금을 만질 수 있는 택시기사가 ‘딱’이었는데, 참 즐겁게 일했다”면서 “매일 새벽 교회에 찾아가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며 웃었다.

대구의 온누리극단에서 연극배우 생활을 하다 1995년 개국한 TBC 대구방송의 일일시트콤 ‘아빠는 못말려’에 출연했다. 친구가 용기를 준 덕분이다. 21년 방송인 인생의 출발점이었다.

TBC 대구방송의 수많은 프로그램에서 MC로 나섰지만, 방송 인생 21년 중 17~18년은 그야말로 돈 안 되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았다.

신혼집 마련도 못 해줬지만 묵묵히 곁을 지켜준 아내와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중학생 딸 지영이가 있기에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젊은 날 친구 보증을 서주는 바람에 떠안은 수억 원의 빚도 재작년에 모두 청산했다.

자신을 버렸던 아버지가 14년 전 방송에 나온 자신의 모습을 보고 대전의 어느 판자촌에서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연락을 해왔고, 없는 형편에 형제와 가족 몰래 10여 년을 병구완하고 작년에 하늘나라로 보내 드렸다.

한씨는 “사글세 전전하다 지금 행복이라는 걸 누리고 있다는 게 너무 좋다. 똑바로 잘살고 있는지를 늘 점검하고 허튼 곳에 눈을 돌리지 않고 살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어머니에게서 2가지 인생살이 비법을 배웠다고 했다.

“장례를 치르기 위해 어머니의 시신을 집까지 모셔준 택시기사가 세탁비를 요구했습니다. 저는 너무 화가 나 행패를 부렸습니다. 지나고 보니 나에게만 어머니이고 택시기사에겐 시체일 뿐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시신을 모셔준 택시기사에게 고맙다는 말이 필요했다는 걸 살면서 깨달았습니다. 상대방의 입장이 다 있더라는 거죠. 남편도 없이 3남매 키우기도 고단했는데 그저 우리가 걱정돼 살려고 발버둥 치던 어머니의 모습을 잊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디 가서도 힘들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주변에서 어려울 때 손을 잡아준 분들 덕분에 21년 동안 꾸준히 활동할 수 있었다”면서 “할 일이 주어지면 미친 듯이 임한 덕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했다.



▲겸손을 배우다

2008년 5월부터 “좋구나”를 외치면서 국내외 403개 마을 어르신을 보듬은 한기웅씨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룬 어르신들을 만나면서 겸손할 줄 아는 마음과 삶을 살아가는 지혜를 배웠다고 한다.

그는 “나는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역할이었는데 주인공이 됐다고 착각해 오버했다”며 “배우가 아닌 어르신들과 콘티나 대사도 없이 진한 감동의 드라마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은 어르신들이 주인공이라는 것을 알면서였다”고 회고했다.

시골 마을을 다니던 중 사과 하나가 열리기까지 수많은 손길이 오가는 모습을 본 그는 ‘내가 오늘 해야 할 전지 작업을 잊은 적은 없는지’를 늘 가슴에 새기고 실천했다고 한다. 그래서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세상을 이렇게 멋지게 만들었고 훗날 천국을 예약한 어르신들이 가장 큰 적금을 들었다고 주장하던 한씨는 “하늘에 계시는 어르신들의 부모님들이 자식 조금 더 편하게 사는 모습 보고 흐뭇해 하시고 즐겁게 사시라고 독려 중”이라면서 “이제 지천명(知天命)을 앞둔 내가 기술이 아닌 진정성으로 어르신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됐다. 모두 어르신들 덕분”이라고 했다.
배준수 기자
배준수 기자 baepro@kyongbuk.com

법조, 건설 및 부동산, 의료, 유통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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