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서비스

[윤용섭의 신삼국유사] 11. 단군과 고조선의 건국(2)
[윤용섭의 신삼국유사] 11. 단군과 고조선의 건국(2)
  • 윤용섭 삼국유사목판사업본부장
  • 승인 2016년 08월 04일 18시 13분
  • 지면게재일 2016년 08월 05일 금요일
  • 15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윤용섭.jpg
▲ 윤용섭 삼국유사목판사업본부장
전회에 이어 고조선에 관한 기록을 검토하고자 한다. 다음으로 우리가 주의할 네 번째 사항은 아사달의 위치가 어디냐는 것이다. 고조선의 수도인 아사달의 위치를 파악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역사상 최초로 터전을 잡은 수도의 위치를 찾는 일은 우리민족의 유전자 원형과 근본토양을 알아내는 문제이므로 한민족의 정체성(正體性)과 관련하여 그 의미가 크다.

아사달의 위치에 대하여는 일연선사도 고심을 많이 한 것 같다. 즉, 일연은 나름대로 고증을 하여, 무엽산(無葉山) 또는 백악(白岳)인데 백주의 땅(白州地)에 있다 하였다. 그런데 고기를 인용한 부분에서는 첫 도읍지는 평양성(일연 주:지금의 서경)이며, 곧 천도하여 백악산아사달[일연 주:궁홀산 또는 방홀산이며 지금의 미달(彌達)]을 수도로 1500년을 지내다가 기자(箕子)에게 밀려 장당경으로 수도를 다시 옮겼고 마지막으로 다시 아사달로 돌아왔다고 되어있다. 일연의 입장을 생각해볼 때, 본인이 읽은 사서(史書)와 들은 이야기 등을 종합하여 최대한 아는 대로 기록한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두 기록을 종합할 때, 고조선은 여러 번 수도를 옮겼고 첫 번째 도읍은 아사달인데 일단 일연은 지금의 평양으로 추정한다.

고구려초기에 작성된 유기(留記) 100권과 백제의 서기(書記), 신라의 국사(國史), 이 세권의 역사서가 모두 사라지고 지금 전하지 않는다. 아마 일연선사도 볼 수 없었을 것으로 간주된다. 또한 일연은 전문사학자가 아니었고 풍부한 상식과 교양으로 삼국유사를 썼을 것이다. 다만 고기(古記)란 책이 당시 존재했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어떤 문장가가 지은 야사(野史)의 형태의 책으로 추정된다. 당시는 고고학도 사학도 정립되기 전이며 역사에 관한 정보와 자료도 극히 부족했다. 그래서 우리가 삼국유사를 연구하면서 그 기록을 참고하되, 오늘의 시각과 문헌 및 유물 등으로 이 책을 해석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본다. 사학은 물론 문헌정보학· 민속학·신화학·고고학·미술사학·천문학?음운학?문화인류학 등이 총동원 되어야 할 것이다.

역사를 연구함에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문헌의 기록과 유물·유적이다. 고조선문화의 특징은 고인돌과 비파형동검이다. 이 두 가지 유물이 많이 출토되는 곳이 요하의 동서지역과 평양, 장춘·하얼빈부근이다. 그런데 요동반도 부근의 고인돌이 가장 정교한 탁자형이므로 최초의 수도는 이 부근으로 추정되고 여기서 평양으로 옮겼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평양이라고 해서 지금의 평양만 집착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고대에는 민족의 이동이 많았고 따라서 지명의 옮김도 많았다. 패수도 요하도 여러 곳이 될 수 있다. 최근 중국에서는 요임금의 수도 평양(平壤)을 발굴하여 큰 성과를 올리고 있다. 전설적인 요임금이 실존했고 엄청난 유물이 쏟아지는데, 그 지명이 평양이다. 평양은 뜻 그대로 평평한 땅이다. 요사 지리지에는 북위(北魏) 태무제(太武帝)가 고구려왕이 거주하는 평양성으로 사자를 보내었는데, 이곳이 원래 발해의 중경 현덕부(顯德府)라 했다. 실학의 거두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요동의 평양을 소개하면서, 선비들이 평양이라 하면 대동강만 생각하므로 싸우지도 않고 우리의 국토가 줄어들었다고 개탄하였다.(다음 호에 계속)

윤용섭 삼국유사목판사업본부장의 다른기사 보기
윤용섭 삼국유사목판사업본부장
이동욱 논설실장 겸 제작총괄국장 donlee@kyongbuk.com

논설실장 겸 제작총괄국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