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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섭의 신삼국유사] 14. 고죽국과 조선(2)
[윤용섭의 신삼국유사] 14. 고죽국과 조선(2)
  • 윤용섭 삼국유사목판사업본부장
  • 승인 2016년 09월 01일 20시 15분
  • 지면게재일 2016년 09월 02일 금요일
  • 15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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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고죽국, 고조선 영토일 가능성 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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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용섭 삼국유사목판사업본부장
전회에서 논급한 바와 같이 고죽국의 위치와 성격, 고죽국에 자리한 기자조선의 실체를 밝히는 일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삼국유사를 새롭게 읽어나가는 이 글의 성격상 어디까지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조금은 깊이 고찰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중국 역사학계는 기자조선이 단군조선을 대체하여 1천 년 간 존속하였고 그 마지막 임금인 준왕이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겨 기자조선 다음으로 위만조선이 시작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주장(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은 사실 조선시대 역사학의 통설이었다. 심지어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은 기자(箕子)가 조선 땅에 와서 조선백성들을 교화한 것을 매우 고맙고 영광스러운 일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기자는 주나라의 무왕에게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전수하였고 의연히 조국의 명예를 지켜 주나라에 신복(臣服)하지 않았으며 공자로부터 인자(仁者)라는 칭송을 받은 훌륭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현재는 기자동래설이 부인되는 경향이지만, 종래에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는데, 유적이 없어 허전했던 유생들이 평양에 기자묘를 만들기도 했었던 것이다. 참고로 ‘홍범구주’는 천하를 다스리는 정도(正道)와 묘법(妙法)이 기록된 문서로서 주역에도 없는 매우 심오한 철리를 토대로 확립된 정치지침서다. 따라서 홍범(洪範)이 유교의 철학과 정치학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엄청나다.

다시 삼국유사로 돌아가자. 유사에서는 고죽국과 고구려의 영토였던 땅은, 주나라가 기자를 봉하여 조선후를 삼은 곳이라는 취지다. 그러면 이곳은 어디였는가? 중국에서는 대동강유역 평양부근이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야만상태였던 조선 땅에 기자가 들어와서, 양잠과 예절을 가르치고 ‘8조의 법금’을 시행하여 예의를 알게 했다고 한다.

1973년 중국 요녕성 객좌현 북동(北洞)에서 고죽(孤竹)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청동 술그릇과 기후(箕侯)라는 명문이 새겨진 청동기 솥이 발견되었다. 기자가 은나라 지역에서 연산(燕山)을 넘어 객좌 부근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요하(遼河) 넘어서는 은말(殷末) 주초(周初)의 청동기가 출토되지 않는 것이 그 이유의 하나다. 여러 상황을 고려할 때, 기자는 고죽국으로 들어갔고 이곳은 대동강유역이 아니라 발해만 연안일 확률이 훨씬 높다.

오호십육국시대 전연(前燕)을 개창한 모용황(慕容?)의 업적을 기리는 두로 영은의 신도비문 첫 구절은, “조선건국(朝鮮建國) 고죽위군(孤竹爲君)”이다. 모용황이 활동했던 곳은 옛날 고조선이 건국한 땅이며 다음에 고죽국이 임금 노릇한 장소라는 말이다. 이 비명(碑銘)은 북주(北周) 천화(天和) 원년(566년)에 각자(刻字)한 것으로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보다 600년가량 앞서는 중요한 기록이다.

이상을 종합할 때, 기자는 조국(祖國)인 은나라가 망하자 은의 백성 수천 명을 이끌고 고죽국의 땅으로 돌아갔는데, 이곳은 또한 고조선의 땅이기도 했다(고죽국이 고조선 영토의 일부이거나 고조선 바로 옆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곳은 나중에 고구려의 영토가 된다. 그런데 삼국유사의 기록을 엄밀히 검토하면, 단군은 건국 후 1천500년경, 기자를 피해 장당경으로 갔다가 1900년경 다시 돌아왔다고 했으므로, 고조선 서쪽에 기자국을 둔 채 400여년을 더 존속한 것으로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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