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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4. 김해 송담서원
[서원] 4. 김해 송담서원
  • 정만진 소설가
  • 승인 2016년 09월 05일 16시 37분
  • 지면게재일 2016년 09월 05일 월요일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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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부산 점령한 일본군 곧장 김해 침입…관군없이 의병만으로 접전, 끝내 순절한 선열들
사충단에서 본 송담서원.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가장 먼저 의병이 궐기한 곳은 김해였다. 일본군이 최초로 침입한 곳은 부산이었지만 동래부사 송상현, 부산진첨사 정발, 다대포첨사 윤흥신이 순절하는 순간까지 끝내 장렬히 왜적과 싸웠으므로 세 곳의 전투는 관군의 지휘 아래 진행되었다. 그러나 김해는 달랐다.

오늘날의 부산광역시 강서구는 임진왜란 당시 김해 소속이었다. 그만큼 부산과 인접한 곳이 김해였으므로 당연히 일본군은 부산 침탈 직후 김해읍성을 목표로 삼았다.

송빈(宋賓, 1542~1592), 이대형(李大亨, 1543~1592), 김득기(金得器, 1549~1592), 류식(柳湜, 1552~1592)을 비롯한 김해의 선비와 백성들은 자연스레 의병이 되어 왜적과 맞붙게 되었다.

김해의병은 특히 4월 19일과 20일 이틀 동안 관군 없이 치열하게 싸웠다. ‘합천 군지’는 ‘김해성 싸움은 순수 의병과 의병 지휘자만으로 왜군과 싸운 임진왜란 최초의 격렬한 전투로 기록됐다. 더욱이 관군으로 버티던 부산과 동래가 하루만에 무너진 데 반해 비록 왜군의 한 부대였다 해도 수나 장비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 적과 대결하여 나흘 동안이나 버텼다는 것이 놀랍고, 특히 이후 7년 간에 걸친 싸움에서 의병의 효시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일본군 제3군 흑전장정 군대의 진격이 김해의병에 막혀 사흘이나 지체된 데에는 그 날짜만큼 임진왜란의 역사가 바뀌었다는 의의가 들어 있다. 김해의병이 일본군의 전진을 늦춘 사흘은 선조가 압록강을 향해 도성을 탈출한 4월 30일과 일본군이 한강을 넘은 5월 2일 사이의 시간적 간격 이틀보다 하루 더 길다. 이 단적인 날짜 계산은, 목숨을 던져 일본군을 나흘 동안 가로막은 김해의병의 투혼이 경상우도 일원에서 한양까지의 전선에 엄청난 변화를 일으켰으리라는 사실을 짐작하게 해준다.

사충단
4월 19일 하루 내내, 잠깐도 그치지 않고 전투가 계속되었다. 수백 명에 불과한 의병들이었지만 하루 낮은 간신히 버텼다. 그러나 날이 저물고, 적들은 성 주변은 물론 들판의 보리까지 모두 베어와 높이 쌓고는 성 안으로 넘어 들어왔다. 1만3000여 명이 되는 숫자의 힘이었다.

이튿날인 20일, 성은 결국 중과부적을 이겨내지 못하고 함락되었다. 적들은 투항을 권고했지만 네 사람은 몇 명밖에 남지 않은 의병들과 함께 끝까지 적들 한가운데에서 싸우다가 전사했다. 수백 의병들도 모두 죽었다.

며칠 뒤, 송빈의 군사 양업손(梁業孫)이 시체더미 속에 파묻혀 있다가 살아나와 김해읍성의 장렬한 참상을 세상에 알렸다. 덕분에 네 충신은 전란이 끝난 1600년(선조 33) 병조참의 등 벼슬을 추증받았다. 하지만 그뿐, 다시 역사 속에 묻혔다.

1708년(숙종 34), 이순신의 현손 이봉상이 김해부사로 와서 <금주지(金州誌)>를 보다가 김해읍성 전투의 전말을 알고 감격했다. 그가 나서서 조정에 건의한 끝에 송담서원이 건립되었다. 1833년(순조 33)에는 표충사(表忠祠) 사액도 받았다.

김해읍성
그 후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을 맞아 훼철되지만, 1871년(고종 8) 김해부사 정현석 등의 상소에 힘입어 사충단(四忠壇, 경상남도 기념물 99호)으로 다시 태어났다. 현재 김해시 동상동 161번지에 있는 서원 건물들은 1995년에 복원된 것이다.

사충단은 송담서원 강당 뒤 한참 높은 곳에 사당과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서 있다. 그 중에서도 사충단은 사당보다도 더 산쪽에 붙어 있어 외삼문에서 볼 때는 가장 높고 먼 곳에 자리잡고 있다.

송담서원사당과 사충단
그런데 송담서원과 사충단 관련 역사유적 중에는 아주 특이한 것이 있다. 경상남도 김해시 서상동 6-7번지에 있는 세계적 희귀 고인돌이다. 고인돌은 일반적으로 굄돌이 있고 그 위에 윗돌이 얹힌 구조가 보통인데, 이곳 고인돌은 윗돌 위에 큰 비석이 세워져 있다.

비석에는 ‘贈吏曹參判淸州宋公殉節紀蹟碑(증 이조참판 청주송공 순절 기적비)’ 열네 한자가 새겨져 있다. 뿐만 아니라 고인돌에도 ‘宋公殉節岩(송공순절암)’ 다섯 한자가 붉게 새겨져 있다. 이 고인돌은 송빈 의병장이 적과 싸우다 마지막 순간에 유명을 달리한 곳이다.

서상동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의 상징과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맞아 송빈이 보여준 선비정신의 표상 순절비가 한몸이 된 유적이다. 서상동 고인돌이 비석 없이 그냥 남아 있었다면 세계 6만여 고인돌 중 하나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러나 송빈 의병장이 순절한 역사의 현장이라는 정신사적 의미를 보여주는 비석 하나를 윗돌 위에 거느림으로써 특별한 문화유산이 되었다. 이 고인돌은 경상남도 기념물 4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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