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인력이 아니라 물고기들이 울어서 넘치는 것이다 발목이 젖는 게 두려운 사람들아 제 눈물에 저를 담그고 헤엄치는 물고기들을 보라 조석간만이 아니라 바다가 울어서 넘치는 것이다 세상의 눈물 콧물 다 훔쳐주던 억척어멈도 한 번쯤 제 슬픔에 겨워 넘치는 것이다 뭇 생명들이 처음 태어난 곳도 저 눈물 속이었다 새벽 포구, 활어차가 앞서 가는데요. 뿌연 수족관 유리 너머 살아서 떠나는 물고기 그렁그렁한 눈과 그만, 마주치고 말았지요. 어미가 준 ...
슬플 때는 슬픔에 잠기어 슬픔을 잊습니다 적막할 때는 적막에 들어 적막을 잊습니다 몸살의 뜨거움에 타던 생각도 잊어버리자 앓은 신열도 아득하게 빛나던 추억도 고요한 숨결 속에서 닻을 내리고 있습니다 삶의 긴 길에서 허리가 구부러지고 마음의 끈이 끊어져 나날이 어두워져 가도 시간은 모두가 보석입니다 벗어나려 애쓰면 애쓸수록 발목 깊이 잠기는 게 슬픔이고 적막이고 그리움이지요. 어디 그 뿐이었나요? 한 번 돌아보세요. 무엇이든 똑바로 바라보고...
막막한 세상의 끝 천지에 더 이상 갈 곳이 없고 더 이상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을 때 나는 홀로 돌담을 마주하고 선다 조용히 돌거울을 들여다보면 거기 내가 길이 되어 누워 있다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한 줄기 길이 되어 외롭게 누워 있다. 거울 앞에 서는 이유는 나를 보기 위해서지요. 날마다 거울 앞에서 매무새 다듬는 것도 내 눈을 내가 한 번 더 또렷이 보기 위함입니다. 그래요. 나를 보려는 게 거울이라면, 나를 보여주는 게 거울이라면 거울은 도처에 ...
누가 일어섰을까. 방파제 끝에 빈 소줏병 하나, 번데기 담긴 종이컵 하나 놓고 돌아갔다. 나는 해풍 정면에, 익명 위에 엉덩이를 내려 놓는다. 정확하게 자네 앉았던 자릴 거다. 이 친구, 병째 꺾었군. 이마에 주름 잡으며 펴며 부우- 부우- 빠져나가는 바다, 바다 이홉. 내가 받아 부는 병나발에도 뱃고동 소리가 풀린다. 나도 울면 우는 소리가 난다. 도무지 쓸쓸한 어느 날, 누군가 번데기 안주 놓고 소주 한 병 들이켠 오후가 방파제 ...
바람 타는 나무가 더러 운다고 해서 사랑이 흔들리는 것은 아니리 그 어느 바람에도 뿌리째 흔들리지 않았고 그 어느 눈보라에도 속까지 젖지는 않았으니 구름 타는 햇살이라 더러 울기야 하겠지만 나에게 이르는 길은 몰라서가 아니리 그 어느 바람에도 날리지 않아서 내 잎새에 이르렀고 그 어느 추위에도 얼어붙지 않아서 내 가슴에 스미었으니 어느 날에는 햇살 속에 살겠네 어느 날에는 나무 안에 살겠네. 흔드는 건 바람이지만 흔들리는 건 바람이 아니지요....
갈대 꺾어 지붕 얹고 새들과 함께 살고 싶어 수만 리 장천 작은 날개 하나로 날아 온 철새들 보리 심고 밀 심어서 새들과 나누며 살고 싶어 수많은 준령 넘어 넘어 어미와 새끼가 날아 앉는 강가 밀렵꾼 손목 부러트리고 새들 지켜 주며 살고 싶어 전선에 앉아 한숨 돌리면서 물 한 모금 밀알 하나 꿈꾸는 새야 큰 욕심 부리지 않고 낮고 작게 살아도 강은 멀고, 밀알 하나 물 한 모금은 늘 소중한 꿈이었지요, '수만 리 장천/ 작은 날개...
손님여러분 죄송합니다 오늘 하루 쉽니다 아이와 곤충채집 갑니다 이발관 유리창 달력종이 위를 비뚤비뚤 기어간 글발 복지정 땀범벅 거리를 빠져나간다 도시 근처 어디쯤 재잘거리는 아이 웃음과 풀벌레 숲길에 닿아있다 이발 6000원, 염색 5000원 가격표 위에 붙은 임시휴일 안내문에서 여치가 울고 방아깨비가 뛰고 젊은 아빠의 푸른 정맥, 큰 그늘이 읽힌다 텅 빈 이발관 혼자 지키는 액자속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되뇌며 돌아서는 동네 더벅머리...
웬 떡인가 싶어 들어간 공장들 어영부영 일 년 안에 문 닫고 인심이 좀 좋다 싶어 단골로 내정한 칼국수집 막걸리집 곱창집 다 반 년도 못가서 문 닫고 쓰시는 글들 읽을 만 하다고 대충 존경할 만하면 절필하시거나 평균 수명도 다 못 채우시고 오십 넘은 나이까지 선거 때마다 흡족하게 찍어준 분들은 또 한 분도 당선 안되고, 참 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도 무너지는 것,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무너짐 이전에 최선을 다한 발자국 ...
개구리 울음소리 와글와글 칠흙 어둠을 끌고 간다 한 번 하고 싶어 저리 야단들인데 푸른 들녘마저 점점이 등불을 켠다 내가 꼴린다는 말 할 때마다 사내들은 가시내가 참...혀를 찬다 꼴림은 떨림이고 싹이 튼다는 것 무언가 하고 싶어진다는 것 마음 속 냉기 풀어내면서 빈 하늘에 기러기 날려 보내는 것 물오른 아카시아 꽃잎들 붉은 달빛 안으로 가득 들어앉는다 꼴린다, 화르르 풍요로워지는 초여름 밤 니끼미 시발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
사람들이 착하게 사는지 별들이 많이 떴다 개울물 맑게 흐르는 곳에 마을을 이루고 물바가지에 떠 담던 접동새 소리 별 그림자 그 물로 쌀을 씻어 밥 짓는 냄새 나면 굴뚝 가까이 내려오던 밥티처럼 따스한 별들이 뜬 마을을 지난다 사람이 순하게 사는지 별들이 참 많이 떴다 그대도 별을 본 적 있으시지요? 잠 못 이루던 깊은 밤, 마당을 서성이거나 무릎을 세우고 툇마루에 앉아 있을 때 잠든 지붕마다 쏟아지던 그 노래들. 멀어서 더 사랑스러운 그들을 몰래 만난 적 있으시지요? 가장...
대밭집 홍강이 같이 살다가는 둘 다 못쓰게 된다고 논 팔아 하나뿐인 동생 서울로 보내고 팔순 노모를 모시고 산다 중학교는 나왔어도 농사하는 죄로 쉰이 가깝도록 시집 오겠다는 과수댁조차 없어 들일에 빨래하고 밥 해먹으며 그림자처럼 산다 그 살림에 장 보러 가는 게 남세스럽다고 쌀이나 고구마 가방 속에 넣어 메고 아는 사람 없는 곳으로 가서 몰래 팔고 오는 홍강이 아랫복골 대밭집 혼자 늙는 홍강이를 보면 눈물이 난다 청도 매전리 동창천...
남자와 등을 돌리고 잔다 침대 난간에서 허공을 품고 잠이 든 것일까 벼랑 끝에서 손을 휘저으며 목청이 터지도록 그를 불러댄다 등과 등 사이에 소리의 통로가 막혀있는지 그는 환청으로도 듣지 못한다 바닥으로 발이 떨어지는 순간 비명이 먼저 튀어나간다 고래는 짝을 부르면 천리 밖에서도 듣고 달려온다는데 고래보다 못한 이 남자, 등짝을 후려친다 그제서야 천리도 넘는 암흑 길을 넘어온 희미한 한 마...
하루는 형이 바닷가로 말* 실러 갔는데 우차바퀴가 빠져서 꼼짝 못하고 있다고 연락이 왔다. 나는 그때 중학교 2학년이었는데 창피해서 안갔다. 비료대신 밭에 똥을 뿌리던 시절이었다, 형은 날이 저물어 왔는데 형이나 소나 얼굴이 눈물과 흙투성이었다. 형은 나보다 두 살 위였다. 어느 해 가을 진전사 절터로 나무하러 갔다. 나뭇짐을 바탕으로 져 나르 던 나는 배고프고 꾀가 나서 마지막 짐을 높은 언덕 아래로 굴려버렸다. 형은 그럼 짐이 안 찬다고 그걸 다시 져 올려 실었다. 컴컴한 저녁 나는 우차...
援?
호박잎쌈, 호박찌개, 애호박전에 알싸한 소주 한 잔 먹고 마셨다. 고맙다. 호박, 너도 먹성 좋더구나 내 똥거름, 닭똥 한 삼태기 다 먹었잖니? 우리 서로서로 먹고 어울렁더울렁 살았구나 좋은 하루구나 아, 오늘 문득 옛 친구들 불러 호박풀떼죽이나 끓여 먹고 유행가라도 한 자락 부르고 싶구나. 오전에도 거나하게 취하여 전화 속에서 시를 읊어 주시던, 그리운 것들이 밀려들면 온 사방에 안부를 물어 대시던 눈물 많은 그 양반. 소식...
작은 등대가 있는 방파제엔 어부들의 작은 신발들이 잔물결에 살랑대며 물의 댓돌 위에서 잘박이고 있다 주인들은 다 집으로 들어가 저녁밥을 먹는 시간 어부들의 코고무신들 나란히 나란히 물의 요람에서 흔들리고 있다 모포리 물의 댓돌 위에도 양포리 물의 댓돌 위에도 그러고 보니 잘박이는 신발들 참 가지런도 하네요. 이른 새벽이면 내외가 저마다 벗어 놓은 코고무신 한 짝에 두 몸을 싣고 이마로 샛별 밀며 바다로 들겠지요. 끼걱끼걱 툴툴툴... 낡을수록 익숙하게 물길을 열고 걸어가는 삶, 발자국 하나 새기지 않고 돌아 갈,...
입속이 궁금해지면 고추장 항아리 속에 묻어 두었던 어머니 팔뚝을 꺼내 먹습니다 종아리를 꺼내 먹습니다 어느 소슬한 가을 저녁의 살 오른 근심을 말갛게 닦아 통 째 절여두었던 당신 찬물에 밥 말아 미라처럼 쪼글쪼글해진 당신의 그 짜디 짠 생살을 씹어 먹으니 오, 면면히 유구하겠습니다 허기진 배를 채우는 것들 도처에 널렸어도 허기진 가슴을 채우는 것은 결국 '어느 소슬한 가을 저녁의/ 살 오른 근심' 근심조차 '말갛게 닦아/ 통째 절여두...
가협 일대 밤나무 숲이 하늘의 젖꼭지를 빨고 있다. 구릉 위에 걸친 달의 엉덩이를 베어 먹고 대숲의 그림자를 삼킨다. 너는 싹 틔우는 일이 얼마나 잔인한가를 알겠구나. 목울대 가득한 울음으로 베갯머리를 적시고, 오오 봄비야. 저 슬픔의 천근 천일염을 다 녹일테냐. 솟구치는 건 외로운 일이란다, 차라리 청산의 무른 이마를 물어뜯을 일이다. 사람들은 봄이 한껏 피어난다 노래 하지만 들판은 기를 쓰고 솟구치느라 아우성이네요. '밤나...
오늘은 당신에게 미루어놓은 말이 있어 길을 가다 우연히 갈대숲 사이 개개비의 둥지를 보았네 그대여, 나의 못다 한 말은 이 외곽의 둥지처럼 천둥과 바람과 눈보라를 홀로 맞고 있으리 둥지에는 두어 개 부드럽고 말갛고 따뜻한 새알이 있으리 나의 가슴을 열어젖히면 당신에게 미루어놓은 나의 말은 막 껍질을 깨치고 나올 듯 작디작은 심장으로 뛰고 있으리 초봄 라일락, 장마 허리, 단풍길 그리고 앙상한 나뭇가지에 걸어두고 만 말, 말들. 까맣고 붉은 숫자로 기다린 흔적이 납작한 발...
내 삶이 고독한 여행이라고 생각할 때 나는 기차가 들고나는 서울역에 가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싶다 보따리를 든 할머니 낡은 가방을 들고 구멍 뚫린 중절모를 쓴 늙은 사내 어머니 손을 잡고 걸어 나오는 어린 것들 제각기 바쁜 걸음으로 걸어 나오는 모습을 보며 환영의 손짓을 보내고 싶다 낯선 이곳 서울에서, 가슴 부비며 사랑을 느끼고 못다 한 말들을 쏟아 놓고 다시 떠나는 날 행복을 알고 돌아간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나는 쓸쓸한 삶을 주체할 수 없을 때, 서울역에 나가 차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