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일이다.세상에 온 지 얼마 안 돼 숨을 놓은 조카를형님이 안고 나는 삽을 들고 따라갔다.아직 이름도 얻지 못한 그 애를 새벽 솔밭에 묻고여우들이 못 덤비게 돌멩이를 얹어놓고 온 적이 있었다.내가 사람을 살면 한 일 중가장 안 잊히는 일이다.[감상] 내게 “사람으로 살며 한 일 중 가장 안 잊히는 일”이 뭘까, 오래 궁리했다. 여덟 살 때 마당 돌부리에 넘어져 오른쪽 눈두덩이가 길게 찢어졌다. 얼굴에 피가 주룩주룩 흘렀다. 함께 숨바꼭질하던 친구와 동생들이 울고불고 난리였다. 돼지농장에서 일하던 부모님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냄비 속 두부 비집고 순하게 누운 청어여태껏 제 살 찌른 가시들 다독여서들끓는 파도 소리로 어린 잠을 깨운다물 얕은 연안에도 격랑이 일었던지거친 물살 버티느라 활처럼 등이 굽은어머니 갈빗대마다 소금 눈물 가득 찼다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대양을 꿈꿨던지시퍼런 등줄기가 심해를 닮아있는,몸속의 수평선 꺼내 끓여내는 아침바다[감상] 경주 서악동에서 ‘시인의 뜨락’을 운영하는 김광희 시인이 첫 시조집 『바다가 끓이는 아침』(목언예원)을 냈다. 시, 시조, 동시까지 아우르는 그녀의 시력은 거침이 없다. 기발한 상상력과 감각적 표현, 삶의 깊은
잊어버리세요, 꽃을 잊듯이잊어버리세요, 한때 뜨겁게 타오르던 불꽃을 잊듯이영원히, 영원히 잊어버리세요시간은 친절한 벗우리는 시간과 함께 늙어갈 거예요만일 누군가 묻거든 그때 대답하세요,그건 벌써 오래전 일이라고꽃처럼 불꽃처럼 먼 먼 옛날눈 속으로 사라진 발자국처럼 잊었노라고[감상] 시간이 약이다. 잊어버려야 시작할 수 있다. 놓아줘야 붙잡을 수 있다. 헤어져야 사랑할 수 있다. 시간이 준엄한 스승이다. 내려놓아야 나아갈 수 있다. 타인이든 자신이든 용서해야 깃털처럼 가벼이 살아갈 수 있다. 모든 기쁨과 괴로움은 “벌써 오래전 일”이
백 년 뒤에 내 시를 읽을 독자여당신은 누구십니까?지금 이 화려한 봄날 아침내 정원에 만발한 꽃 한 송이도그대에게 전해줄 순 없습니다.저기 저 구름 사이에 비쳐 나오는눈부신 황금 햇살도 보여줄 수 없습니다.그러나 당신은 창문을 열고창밖의 정원을 내다보세요!바로 당신의 꽃 피는 정원에서백 년 전에 사라진 이 꽃향기의흔적으로 찾아보세요.[감상] 중학교 들어가서 처음 접한 시가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다. 이후 시의 매혹에 빠져 학창 시절을 보냈다. 타고르는 ‘기탄잘리’라는 아름다운 정원을 가꿨고 만해를 비롯한 수많은 시인에게 “내
무거운 건?바다 모래와 슬픔짧은 건?오늘과 내일약한 건?꽃과 젊음깊은 건?바다와 진리.[감상]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는 게 인생이다.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는 이가 시인이다. 크리스티나 로제티는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여성 시인이다. 같은 해에 태어난 미국의 에밀리 디킨슨과 함께 비슷한 삶의 궤적을 그렸지만, 시적 세계관은 달랐다. 두 시인의 삶과 시 세계를 비교해보는 것만으로도 영미문학의 계보를 시작할 수 있다. 에밀리 디킨슨은 물었다.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죄를 어떻게 회개하죠?” “제가 반항아처럼 보이시겠
길이 나를 인도한 곳그곳은 공동묘지였네.이곳에서 묵어야겠어.나는 속으로 생각했네.너희 장례식의 조화들은,지친 나그네들을차가운 여관으로 이끄는표지판처럼 보이네.헌데 이 여관은방이 모두 가득 찼는가?난 지쳤고 쓰러질 판국인데다치명적인 상처를 입었고.아, 이 냉정한 여관아,넌 나를 받아주지 않는가?그렇다면 그냥 가자, 가자,나의 믿음직한 지팡이여![감상] 빌헬름 뮐러(1794~1827)는 독일의 낭만 시인이다. 슈베르트의 가곡 「겨울 나그네」,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의 아름다운 가사를 쓴 시인으로 유명하다. 지난여름, 경남 산청의
있잖아, 불행하다고한숨짓지 마햇살과 산들바람은한쪽 편만 들지 않아꿈은평등하게 꿀 수 있는 거야나도 괴로운 일많았지만살아 있어 좋았어너도 약해지지 마[감상] 시바타 할머니는 2009년 10월, 99세의 나이에 첫 시집 『약해지지 마』를 출간했다. 외아들의 권유로 92세 때 처음 시를 쓰기 시작했다. 산케이신문에 그녀의 시가 소개되면서 주목받았고, 일본에서만 158만 부가 팔리며 일약 유명 시인이 되었다. “나도 괴로운 일/ 많았지만/ 살아 있어 좋았어”라는 담담한 고백이 읽는 이의 마음을 뜨겁게 움직인다. 감동은 진심이라는 과녁에 정
우리는 겨울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눈딱지 앉은 소나무 가지와서리를 응시하려면.그리고 오래도록 추워 봐야 한다.얼음 보풀인 노간주나무와멀리 반짝이는 일월의 태양 아래거칠어진 가문비나무 바라보려면.그리고 바람 소리, 몇 안 남은 잎새 소리에어떤 비참함도 떠올리지 않으려면.그것은 똑같이 헐벗은 땅에서 불어대는똑같은 바람으로 가득 찬대지의 소리일 뿐.눈 속에서 귀 기울이는 자,그 자신 무가 되어 바라본다.거기 없는 무, 거기 있는 무를.[감상] 한정원 작가의 을 읽으며 매혹적인 시구에 마음이 흔들렸다. 이를테면, “내가 꿈꾸는
탑이 섰다높이는 백 미터76만 5천 볼트 전기가 흘러가는 탑이 섰다(그 밑에서는 형광등을 들고 서 있기만 해도 불이 켜진다)밀양 할배 할매들이 십 년을 싸웠지만 마을마다 고압 송전탑이 섰다이제 송전탑 공사가 끝나고 우리 주민에게 남은 것이 무엇입니까 세월호 아이들이 배 안에서 죽어 갔던 것처럼 송전탑 밑에서 죽어 가는 일만 남았습니다 판사님 저에게는 징역형을 내려 주십시오 벌금형이 나오면 차라리 징역을 들어가 살겠습니다 이 부당한 일들에 저는 벌금을 낼 수가 없습니다탑은 날마다 운다날이 흐리고 비가 올 때는 짐승 떼처럼 운다[감상]
빗물 젖은 내 우산그 애 앞에서 접었다가팟! 하고 펼 때야아! 하면서 짜증 내면그 애는 놀 줄 모르는 애.조금 놀란 얼굴로너어! 하면서 씽긋 웃고자기 우산을 나한테똑같이 접었다 펴면그 애는 놀 줄 아는 애.[감상] 시인은 ‘놀 줄 아는 애’와 ‘놀 줄 모르는 애’의 차이를 빗물 젖은 우산을 대하는 태도에서 발견했다. 아마도 아이들 곁에서 그 찰방찰방한 순간을 동심으로 포착했으리라. 장세정 시인의 동시집 (현북스)를 읽다가, ‘똥 닦는 기술’에서 한참을 웃었다. 여덟 살 아이들의 삶을 이만큼 사랑스럽게 껴안은 동시집이
오르막길이배가 더 나오고무릎관절에도 나쁘고발목이 더 굵어지고 종아리가 미워진다면얼마나 더 싫을까나는 얼마나 더 힘들까내가 사는 동네에는 오르막길이 많네게다가 지름길은 꼭 오르막이지마치 내 삶처럼[감상] 종아리는 무릎과 발목 사이의 뒤쪽 근육을 말한다. 장딴지라고도 한다. 종아리 둘레가 남자는 34cm, 여자는 33cm 미만일 때 ‘근감소증’을 의심하기도 한다. 종아리가 예쁘다는 말은 종아리 근육이 건강하다는 뜻일 것이다. 꽃길만 걷는 사람이 예쁜 종아리를 가질 리 없다. 삶의 오르막길, 인생의 비탈길이 종아리를 예쁘게 건강하게 한다
올페는 죽을 때나의 직업은 시라고 하였다후세 사람들이 만든 얘기다나는 죽어서도나의 직업은 시가 못 된다우주복처럼 월곡(月谷)에 둥둥 떠 있다귀한 시각 미정 2020년 초등학생의 장래 희망 직업은 3위가 교사, 2위가 의사, 1위는 운동선수다. 뒤를 이어서 크리에이터, 프로게이머, 웹툰 작가, 제과제빵사, 일러스트레이터, 디자이너 등이 있다. 순위 어딘가 “우주복처럼 월곡에 둥둥 떠 있는” 시인, 작가도 있을 것이다. 소설가 김훈이 에서 썼듯이 직업은 생계와 관련이 깊다. “밥벌이는 밑도 끝도 없고 대책도 없
한 해 중 그런 계절을 그대는 내게서 보리라,전엔 예쁜 새들이 노래했지만 이젠 황폐한 성가대석,추위를 견디며 흔들리는 그 가지들 위에누런 잎들 하나 없거나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계절을.내게서 그대는 보리라, 해가 진 후서녘에서 스러지는 그런 날의 황혼을,만물을 휴식 속에 밀봉해버리는 죽음의 분신인시커먼 밤이 조금씩 앗아가는 황혼을.내게서 그대는 보리라, 불타오르게 해준 것에다 태워져, 꺼질 수밖에 없는임종의 자리처럼, 제 젊음의 재 위에누워 있는 그런 불의 희미한 가물거림을.그대가 이것을 알아차리면 그 사랑 더 강해져,그대가 머지않
어디에서 도마뱀은 꼬리에 덧칠할 물감을 사는 것일까어디에서 소금은 그 투명한 모습을 얻는 것일까어디에서 석탄은 잠들었다가 검은 얼굴로 깨어나는가젖먹이 꿀벌은 언제 꿀의 향기를 맨 처음 맡을까소나무는 언제 자신의 향을 터뜨리기로 결심했을까오렌지는 언제 태양과 같은 믿음을 배웠을까연기들은 언제 공중을 나는 법을 배웠을까뿌리들은 언제 서로 이야기를 나눌까별들은 어떻게 물을 구할까전갈은 어떻게 독을 품게 되었고거북이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그늘이 사라지는 곳은 어디일까빗방울이 부르는 노래는 무슨 곡일까새들은 어디에서 마지막 눈을 감을까왜
아주 까막눈 때는공부가 꿈이엇는디인자 쪼매 눈뜨니에미 없는 손자 고등학교마칠 때까지 사능 기 꿈이요내 나이 칠십다섯잉께얼마나 더 살랑가 몰라도우짜등가 즈그 앞가림할 때까지잘 거둬 먹이고 다부지게 살 것이오그것이 이 할미 꿈이요 전국 문해교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시를 모아 낸 책이 (창비)이다. 나이 칠십이 넘은 어르신들이 쓴 시 100편이 금가락지, 은비녀처럼 모여 있다. ‘좋은 시는 어떤 시냐?’는 질문에 어르신들은 제 삶으로 온몸으로 답한다. 꾸며내지 않고 토해낸다. 좋은 어린이 시도 마찬가지다. 좋은
오래전 일입니다. 주말이면 아이와 나는 집 앞 공터에서 배드민턴을 쳤습니다. 지는 것을 몹시 싫어하는 아이를 위해 시합에 져 주곤 하였는데 눈치 못채게 져 주느라 여간 애쓰지 않았습니다. 5전 3선승제. 1세트는 내가 이깁니다. 2세트는 가까스로 집니다. 이때 노력이 필요합니다. 일부러 진 것을 알면아이가 화낼 게 빤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세트에 가서 듀스를 거듭하다가힘들게 집니다. 그러고는 연기력을 발휘하여 분하다는 듯 화를 냅니다. 마른미역처럼 구겨진 얼굴을 하고 있는 내게 아이는 미안한 표정 지으면서도 한결 업된 기분 참을
이른 아침 문자 메시지가 온다-나지금입사시험보러가잘보라고해줘너의그말이꼭필요해모르는 사람이다다시 봐도 모르는 사람이다메시지를 삭제하려는 순간지하철 안에서 전화기를 생명처럼 잡고 있는절박한 젊은이가 보인다나도 그런 적이 있었다그때 나는 신도 사람도 믿지 않아잡을 검불조차 없었다그 긴장을 못 이겨아무 데서나 꾸벅꾸벅 졸았다답장을 쓴다-시험꼭잘보세요행운을빕니다! 성질이 서로 비슷해서 익숙하거나 잘 맞는 느낌을 동질감(同質)이라고 한다. 남과 어우러져 하나 되는 감정, 일체감(一體感)과 동병상련도 떠오른다. 이기주 작가의
내가 쓸쓸할 때,남들은 모르거든.내가 쓸쓸할 때,친구들은 웃거든.내가 쓸쓸할 때엄마는 다정하거든.내가 쓸쓸할 때,부처님은 쓸쓸하거든. 박연준 시인은 산문집『쓰는 기분』에서 ‘마음으로 우는 게 뭔지 아는’ 사촌 동생의 사연을 소개한다. 돌도 되기 전에 병으로 엄마를 잃고 친척 집을 옮겨 다니며 자란 아이다. 학교에서 이십여 년 담임하면서 ‘펑펑 소리 내어 울지 못하고 남몰래 마음으로 울어야 하는’ 아이들을 종종 만났다. 적어도 그 아이가 쓸쓸할 때, 담임은 웃는 일이 없도록 마음의 표정을 살피고자 노력했다. 가끔 책 선물을 했
몇 개의 산맥을 타 넘어야네게 이를 수 있니불개미 한 마리가플라스틱 장미 꽃잎을한잎 한잎 타 넘어가고 있다몇십 개의 계단을 올라야잠든 너를 깨울 수 있니저 혼자 불 켠 엘리베이터를 타고온몸으로 두근거리는 내가잠든 너의 몸 속을한밤중 소리도 없이 오르고 있다어떻게 등불을 빨아먹을 수 있니나방이 한 마리혓바닥을 바늘처럼 곤두세우고한밤내 가로등을 찔러 보고 있다 ‘서울의 달’이라는 드라마를 기억한다. 1994년 1월 8일부터 10월 16일까지 방영된 81부작 드라마다. 채시라, 한석규, 최민식이 주연이었는데 서울 달동네에서 신분
외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고외할머니는 우리랑 함께 산다.외할머니가어르신 유치원에 처음 가던 날,외할머니를 태우고아파트를 빠져나가는 차를 보며엄마가 눈물을 훔쳤다.-엄마 왜 울어?-글쎄 그냥 눈물이 나네.-내가 처음 유치원에 갔을 때도 그랬어?-그랬지. 오늘이 꼭 그날 같네.나는 엄마를 꼭 안아 주었다.엄마가 외할머니를 안아 주듯그렇게. 나는 23년 된 아파트에 산다. 젊은 사람보다 어르신들이 훨씬 많다. 한밤중에 구급차 오가는 소리를 종종 듣는다. 단지 내 대여섯 개쯤 있던 어린이집과 유치원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대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