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가을 나무 아래는 불편하다 가지 사이로 점점 넓어지는 하늘이 불편하다 이 거리에 오래 세 들어 살면서 늘 떠났다가도 다시 돌아오면서 떨어져 나간 나무껍질처럼 외로웠는데 가을 나무에 대한 고백은 더욱 어색해져서 나는 그저 풍경을 인용하여 가을 속을 지나갈 뿐인데 그런데 누구였을까 뒤돌아보면 바람도 없이 나뭇잎 하나 가만히 내 어깨를 가진 것을 모두 내어주고 알몸으로 겨울을 나는 나무를 생각하면 왠지 쓸쓸해집니다. 더더...
겉보기엔 멀쩡한데 몸이 빠져나간 구두 뒤축이 한쪽으로 심하게 닳았다 보이지 않은 경사가 있다는 것이다 보이는 몸이 그럴진대는 헤아릴 수도 없을 마음의 경사여 구두 뒤축도 없는 마음의 기울기는 무엇이 보정(補正)해주나 또 뒷모습만 들켜주는 그 경사를 누가 보아주나 마지막 구두를 벗었을 때 생애의 기울기를 볼 수는 있을 것인가 수평을 이룰 때 비로소 완성되어버릴 생이여, 비애여 닳은 구두 뒤축 덕분에 나는 지금 멀쩡하...
길위에 서면 나는 서러웠다 갈 수도, 안 갈 수도 없는 길이었으므로 돌아 가자니 너무 많이 걸어왔고 계속 가자니 끝이 보이지 않아 너무 막막했다. 허무와 슬픔이라는 장애물 나는 그것들과 싸우며 길을 간다 그대라는 이정표, 나는 더듬거리며 길을 간다. 그대여 너는 왜 저만치 멀리 서 있는가 왜 손 한 번 따스하게 잡아주지 않는가 길을 간다는 것은 확신도 없이 혼자서 길을 간다는 것은 늘 쓸쓸하고도 눈물겨운 일이었다. 우리의 삶이 늘 그러하듯 사랑과 길...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 한 그루 나무를 보라 바람부는 날에는 바람부는 쪽으로 흔들리나니 꽃 피는 날이 있다면 어찌 꽃 지는 날이 없으랴 온 세상을 뒤집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밤에도 소망은 하늘로 가지를 뻗어 달빛을 건지더라 더러는 인생에도 겨울이 찾아와 일기장 갈피마다 눈이 내리고 참담한 사랑마저 소식이 두절되더라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 침묵으로 세월의 깊은 강을 건너가는 ...
우리가 첫눈처럼 누군가의 처진 어깨를 감쌀 수 있었다면 여윈 가슴이 더 따뜻해졌으리라 허물어져 가는 어느 집 처마 끝 가만히 쌓였다가 아궁이에 장작불 터져가듯 함박꽃 같은 웃음을 피워 번지게 할 수만 있었다면 뭉쳐서도 녹아서도 즐거웠으리라 아, 햇살의 발길에 채여 질퍽해지고 얼어붙는 저 어스름 저녁 엉덩방아 찐 누군가의 입방아에 오르더라도 우리가 첫눈처럼 누군가의 깜박이는 설레임이 될 수만 있었다면 망설임 없이 차가운 가지 끝을 쓸어보다가 매서운...
동생의 전화전호 지우려다 저장한다 행여나 꿈에서라도 한 통화 있으려나 회한만 뼛속에 사무쳐 발끝까지 저려온다. 지난 해 8월 남동생이 생을 마감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해 듣고 온 몸에 맥이 풀리는 것 같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한동안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여섯 살 아래인 동생이 여러 식구들을 두고 홀연히 떠나다니, 그것도 유언도 유서도 없이 심장마비로 말이다. 그렇게 허무하게 갈 것을 잘 살아 보려고 열심히도 일했었지. 형의 도리를...
떡갈나무 서쪽 언저리에 별이 보였다 일찍 세상을 떠난 종숙 별도 보였고 얼마전에 세상을 더난 재종숙별도 보였다. 별 중엔 우슬(牛膝) 별도 보였는데 함박눈 오는 날 은백색 털을 나부끼며 돈을 싼 보자기를 입에 물고 내 앞에 놓고 갔는 흰 개별꽃 모양의 우슬 별도 보였다. 시작메모:10년동안 소방산을 함께 오르던 우슬(牛膝)이 떠난지도 2년이 넘었다. 슬픔도 시간 속에서 바래어지는 또 다른 슬픔이 진실로 슬펐다.
바다위에 뜬 낮달 아래로 바위가 솟아올라 물위에 뜬다 울릉도 아침 바다 해안을 물어뜯는 파도의 허연 이빨이 산으로 기오 오른다. 소나무 우듬지 위로 구름이 걸리더니 바다의 파도 소리처럼 물새가 운다. 아득한 운무 사이로 멀리 보이는 섬, 아침의 바다가 태극기를 흔들고 우리의 안부를 묻는다 동쪽 바다에 뜬 섬 은은히 파도에 흔들리고 있다 여기서 독도는 이백 여리 뱃고동처럼 울고 있는 조국의 어지러운 사연이 여기에 있다. 아침 바다가 태극기를...
어느 한 시기, 숨이 막혀올 때 바람이 되고 싶을 때가 있었다. 산비탈을 지나 솔가지를 흔들며 자유가 되고 싶었다. 막힌 숨을 토해내며 한 소절의 뜨거운 노래가 되어 맺힌 한을 풀어내고 싶을 때가 있었다. 답답한 창살을 빠져나와 잠시의 망루를 넘어 무한 자유가 되고 싶을 때가 있었다. 밤새 엮어낸 꿈이었다가 이제는 깊은 내 가슴에 또아리를 틀고 틀 속에 갇혀 숨을 죽이고 있는 너 몸 속 깊이 너를 가두고 차츰 바람으로 풀어지는 내 육신 마지막 가는...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벌거벗고 언 땅에 꽂혀 자라는 초록의 겨울 보리, 생명의 어머니도 먼 곳 추운 몸으로 왔다 진실도 부서지고 불에 타면서 온다 버려지고 피 흘리면서 온다 겨울 나무들을 보라 추위의 면도날로 제 몸을 다듬는다 잎은 떨어져 먼 날의 섭리에 불려가고 줄기는 이렇듯이 충전 부싯돌임을 보라 금가고 일그러진 걸 사랑할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상한 살을 헤집고 입맞출 줄 모르...
꽃이 피고 지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제 몸을 울려 꽃을 피워내고 피어난 꽃은 한번 더 울려 꽃잎을 떨어뜨려버리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꽃나무에게도 뻘처럼 펼쳐진 허파가 있어 썰물이 왔다가 가버리는 한 호흡 바람에 차르르 키를 한번 흔들어 보이는 한 호흡 예순 갑자를 돌아나온 아버지처럼 그 홍역 같은 삶을 한 호흡이라 부르자 저 아름다운 꽃의 물결들로 하여 가을은 잠시 행복하다. 우리네 삶도 그랬으면 좋겠다. 저 홀로 화사하게 피어 뽐내지 않...
제 몸의 구멍이란 구멍 차례로 틀어막고 생각까지도 죄다 걸어 닫더니만 결국 자신을 송두리째 염해버린 호수를 본다 일점 흔들림 없다 요지부동이다 살아온 날들 돌아보니 온통 소요다 중간중간 위태롭기도 했다 여기 이르는 동안 단 한 번이라도 세상으로부터 나를 완벽히 봉(封)해 본 적 있던가 한 사나흘 죽어본 적 있던가 없다, 아무래도 엄살이 심했다 골똘한 생각을 하는 것은 사람뿐 아니다. 꽝꽝 언 호수를 보면 끊임없는 화두를 안고 묵언하는 선승(禪僧...
그대, 이승의 땀내 바람에 씻으며 날개란 날개 죄 달고 세상너머로 날거라 잘가라, 뒤돌아보지 말고 여기 우리는 다 괜찮다 비가 멎고 바람이 멎추듯 슬픔도 고통도 반드시 끝나게 마련. 인생의 마지막 통과의례인 죽음은, 치열하게 혹은 고단하게 살았던 삶과 인연과 재산에 묶어두었던 애착과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비로소 영혼의 참 자유를 얻는 것인지도 모른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데, 남은 자들끼리 슬프다 한다. 그러나 결국 눈에서 멀어진 것은 마음으로도 잊히는...
나의 사무실에는 슬리퍼 여덟, 아홉 컬레 각각의 성격대로 흩어져 있다. 우왕좌왕 정신없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얌전히 앉아있는 녀석 까칠한 성격의 지압용 슬리퍼까지 나의 사무실에는 슬리퍼 여덟, 아홉 컬레 성격대로 흩어져 있다 나는 그 중에 한 녀석을 종일토록 짓밟다가 그의 자유와 생존을 짓밟다가 밤이면 또 다시 어둠 속에 감금시킨다 절대 권력자도 아니면서 나는 그들 앞에 오늘도 군림하는 것일까 정말로 미안하구나 슬리퍼 여덟, 아홉 컬레...
우리는 일생동안 씨앗을 싹틔우며 산다 떠날 때도 씨감자 묻듯 육신을 땅에 심는다 끝없이 씨눈만 살아 청명절 햇살이 부시다 우리는 일생동안 욕망을 싹틔우며 사는 것은 아닐까? 청명절을 맞아 산소 주변을 둘러 보다가, 어쩌면 우리들의 주검마저도 욕망을 싹틔우기 위해 씨감자 묻듯 땅에 심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청명절이란 24절기의 하나로 4월 5일무렵을 말하지만, 글자 그대로의 뜻을 풀어보면 깨끗하고 밝은 것을 추구하는 때를 말한다. 해마다 돋...
여름 참깨밭이 푸른 바다란걸 아셨나요 바람따라 흔들리는 이파리들이 가끔씩 참았던 숨을 내쉴때 마다 휘청이는 하늘을 보셨나요 마음에 쌓인 그리움들이 희고 단단한 사리들처럼 투명해지고 눈빛들이 빛의 옷자락 부
기차가 멈추고 사람 하나 내 앞에 내렸다 그 사람은 나의 식탁에서 내 마음 몇 접시를 먹곤 그의 종착역으로 다시 떠났다 그 후에도 기차는 간혹 내 앞에 멈췄으나 누구도 내리질 않았다 세월이 내 눈썹에 설풋이 하얀 안개를 덮는 날 내가 기차를 타고 그의 세상으로 갔더니 그 사람이 마중 나와 있었다 "나의 식탁에서/ 내 마음 몇 접시를 먹곤" 서둘러 종착역으로 가버리는 사람. 이 사람이 누구...
새 길이 나자 늘 다니던 길이 버려졌다 산모퉁이 후미진 곳에 버려진길 농부들이 나락을 널어 말리고 깨단도 세워 두었다 새 길을 지날 때마다 바라보이는 옛길참으로 한가하게 보여 나 거기서 한나절을 쉬어가고 싶었다 묵은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아 열린 새 길, 지나온 '옛길'은 아쉬움으로 남는 다. 백범 김구는 내가 앞서 가는 길이 뒷 사람의 길잡이가 될 것이니 신중하게 걸어가라는 금언을 남겼다. 선가(禪家)에서는 사람이 걷고 또 걸으면 그게 바로 길이 된다...
벽에 걸어 놓은 배낭을 보면 소나무 위에 걸린 구름을 보는 것 같다 배낭을 곁에 두고 살면 삶의 길이 새의 길처럼 가벼워진다 지게 지고 가는 이의 모습이 멀리 노을 진 석양 하늘 속에 무거워도 구름을 배경으로 서 있는 혹은 걸어가는 저 삶이 진짜 아름다움인 줄 왜 이렇게 늦게 알게 되었을까 알고도 애써 모른 척 밀어냈을까 중심 저쪽 멀리 걷는 누구도 큰 구도 안에서 모두 나의 동행자라는 것 그가 또다른 나의 도반이라는 것을 이렇게 늦게...
새야, 너는 길 없는 길을 가져서 부럽다. 길을 내거나 아스팔트를 깔지 않아도 되고 가다가 서다가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어디든 날아 오를때만 되면 잠시 허공을 빌렸다가 되돌려 주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길위에서 길을 잃고, 길이 있어도 갈 수 없는길이 너무 많은 길 위에서 새야, 나는 철없이 꿈길을 가는 아이처럼 옥빛 허공 깊숙이 날아 오르는 네가 부럽다. 프랑스의 철학자 샤르트르는 "자유"를 형벌이라 했다. 자유는 끊임없는 존재의 불안을 가져오고, 현대인은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