엎어진 밥상이라 하자 콧물 범벅이 된 아이들의 따귀라 하자 죽자 죽어버리자 엄마가 울고 아이들은 무서워, 엄마 무서워 울고 내 못나서 그렇다 아버지도 울고 까뭇까뭇 꺼져가는 백열등이 술에 취한 짧은 혀가 짝이 없는 신발 한 짝이 밤새도록 뛰어내린 그 아래 가지 아래 난간 아래 발목 없는 발자국이라 하자 자루 없는 칼이라 하자 대체로 이 가을의 낙엽은 낭만적 정취와 로맨틱한 분위기의 소도구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에서...
님이여 건너지 마라 시끄러운 꿈 한 켤레 건지며 밤새 신기료장수처럼 우는 귀 강은 귓속으로 흘러든다 흰 머리카락 오천 장(丈) 엉킨 목젖이 아, 흐, 백 촉 더 붓도록 부르지 못해 산발한 버들가지 들어 물낯을 친다 오라 오라 이 시의 감수성과 서정은 예민한 청각에서 시작됩니다. 강가의 버드나무 가지에 매달린 버들잎은 길쭉한 타원형의 수많은 '귀'를 은유합니다. 바람이 불고 휘늘어진 버들가지가 강물에 닿았다가 떴다가를 반복하...
나 그 사람 얼굴을 잊었거니 섬에서 돌 하나 파도에 묻고 돌아왔네 세월 흘러 서해 바닷가에 구르는 돌 잊혀진 얼굴 새겨져 있네 어느 순간 파도는 치고 돌 속에 물결 무늬 남겼으리 얼굴 반질반질한 곳곳 거칠게 움푹 팬 자국 돌 속의 굽이치는 물길 파도는 파도를 넘어와 다시 치네 잊혀진 얼굴이여 바다에 어린 눈동자여 오 파도여 꽃이여 무심코 뒹구는 바닷가의 돌을 보며 사람의 얼굴을 찾아낸다는 이 시는 아련한 추억을 반추하게 합니다. 세월이 그러...
모래밭 위에 무수한 화살표들, 앞으로 걸어간 것 같은데 끝없이 뒤쪽을 향하여 있다 저물어가는 해와 함께 앞으로 앞으로 드센 바람 속을 뒷걸음질치며 나아가는 힘, 저 힘으로 새들은 날개를 펴는가 제 몸의 시윗줄을 끌어당겨 가뜬히 지상으로 떠오르는가 따라가던 물새 발자국 끊어진 곳 쯤에서 우둑하니 파도에 잠긴다 갯펄에 두리번거리며 서성이는 생의 문양들. 그 곁으로 짱뚱어 한마리 몸을 비틀며 다가선다. 부드럽고 천진한 저녁햇살 수북수북 ...
지금은 거두어 들일 때, 과수원이 있고 무덤이 있고 모든 것을 묻어 버릴 듯 노을이 진다 하늘이 끌려 내려온다 내 누울 곳은 어디인가 무덤 위 동그랗게 핀 들국화 입을 다물지 못한다 어디로 갔나 별보다 투명한 날개로 날던 고추잠자리 날개를 비비며 털어내는 가을 잠자리 시작메모 : 돌이켜보건데 무덤가의 햇살보다 따사한 것이 또 있었던가? 대개는 나란한 것이 영락없는 엄마의 품이다. 누구의 방해도 없이 드러누워 보...
병이 나을 것 같지 않아 편지를 씁니다 맞바람의 뒤끝은 맵기도 하네요 여긴 한 번 스쳐간 사랑이 다시 찾아오는 법이 없는 곳이랍니다 분명히 눈이 내렸었는데 지금 보니 서 있는 자리가 젖어 있습니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진실이 이렇게 발목을 적시는 날들 한가운데 뿌리를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까닭을 알 수 없는 기쁨 때문에 날이 밝기도 전에 잠에서 깨어나곤 합니다 어제와 다른 자리가 아파오는 것도 위로가 되는군요 요즘도 쪽문은 열어둔 채 지내고 있습니다 ...
수미산 33天이 훤히 비치는 이 가을날 선덕여왕 도리천 아래 한 벌 수의(壽衣)로 떠가는 구름 지귀(志鬼)여 목숨의 솔기를 틀어 지어 입은 한 벌의 넋 시작노트 : 가을 하늘이 청명하다. 도리천 33천이 훤히 보일것만 같다. 그 하늘이 열어보이는 사랑이 햇살만큼이나 투명하다. 뜨겁게 불붙은 단풍나무 아래 몸보다 마음이 더 황홀하다. 육체보다는 넋의 사랑이 온 산을 불태운다. 지귀(志鬼)의 사랑이, 도리천에서의 사랑이 그러할 것이다. 이 가을엔 조촐하게 늙은 사랑이 아름다워 보...
소똥을 탁구공만하게 똘똘 뭉쳐 뒷발로 굴리며 간다 처음 보니 귀엽고 다시 보니 장엄하다 꼴을 뜯던 소가 무심히 보고 있다 저녁 노을이 지고 있다 최선을 다해 세상을 부딪혀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큼 아름다운 일은 드물다. 그러나 생이란 만만치 않아 최고의 열정과 지혜를 다 쏟아붓고도 무릎 꿇는 경우를 우리는 본다. 가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소똥, 그 소똥을 최선을 다해 굴리는 쇠똥구리의 노동이 장엄하다. 소조차 풀을 뜯다 말고 무심히 그 모습을...
함박눈 계곡에, 조선 소나무의 단아한 몸매 가지들이 머리채처럼 가벼이 흔들리고 운해 당해 발자국이 치맛자락에 지워져 나가는 미인도 한 폭이 내걸렸다 더는 나아갈 수 없는 절벽쪽 이마만 보이는 화강암 하나 발치에 분분히 떨어지는 눈가루를 쌓아올리며 간절하게 미인도를 돌아보았다 방금 눈동자를 찍어넣은 눈이 번쩍 뜨여진 순간이었다 시작메모:마음이 곧 풍경이라 한다. 보고싶은 것만 보여지는 것인가. 이 가을날 함박눈 내리는 속의 미인도와 단풍 눈길 속에 눈군가가...
눈부신 맨살 드러낸 캘리포니아 사막에서 몇 년째 묵언 중인 스님을 만났다 햇살 부서져 흰 것뿐인 벌판에 기괴하게 몸을 튼 사라쌍수나무 기쁜 웃음 만발한 바위로 앉은 청화스님, 눕지 않고 그대로 십수년이라 서울서 간 나에게 백지 내밀던 사막에 핀 한 송이 꽃, 오늘 아침에 그 꽃을 태우는 다비 소식 실렸다 그야 새로울 것도 없는 일이지만 세상의 어디를 가도 동갑끼리는 반갑다. 그가 자신이 수행한 나이 든 인도인을 소개해 줬는데 왕족이라고 했다. 이름...
그 남자는 키가 크다 그 남자는 신발도 크다 그 남자의 이름은 신발과 키를 합한 것보다 크다 전에는 신발이 그 남자를 밀고 갔다 신발이 없으면 그 남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제는 이름이 그 남자를 밀고 간다 큰 이름이 큰 신발을 신은 큰 남자를 밀고 간다 잘도 간다 남자, 혹은 여자를 밀고 가는 힘은 무엇인가. 누군가가 물었다. 스무살, 혹은 스물 몇 살인 학생은 잠시 고개를 숙여 생각했다. 그리고 낮고 분명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돈이라고... . 지금의 젊은...
정거장마다 지붕 위에서 사라지는 달이 기다리고 어딜 가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은 달에 가있다 달이 물방울처럼 아름다운 브뤼셀은 가까워 오는가 정말 生에 가까운 것이 오려나 당신은 참 좋은 사람예요 갑자기 열차 창 쪽에서 선이 바스러진 달이 말한다 죄를 사용했던 사랑만을 가지고 있으니(후략) 봄 내내 냉이꽃밭을 들여다보고 있다. 냉이꽃밭이라고 썼지만 봄의 풀밭은 다 냉이꽃밭이다. 길 걷다가 , 서점 가는 길에, 이 작은 풀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
너무 늦은 축하가 미안해서, 양초와 하이타이 등을 잔뜩 사들고 인사를 갔었지. 13평 임대아파트에서 13평 아파트로 이사간 집으로. 쉰셋 나이에 처음 제 집에 살아본 안주인은, 종아리까지 걷어 보이며 불평불만이었지. 석달이나 지났어도 부은 것이 안 풀린다고, 괜히 넓은 집 사서 다리만 아프다고, 청소하기도 힘들다고, 평수는 같아도 크기는 엄청 다르다고. 그녀의 그 어불성설(語不成說)의 화법이 이따금씩 내 두통을 쫓아주며 메아리치곤 하지. 13평 임대아파트에서 13평 아파트로의 이동. ...
늦은 취나물 한 움큼 뜯어다 된장국 끓였다 아흐 소태, 내뱉으려다 이런, 너 세상의 쓴 맛 아직 당당 멀었구나 입에 넣고 다시금 새겨 빈 배에 넣으니 어금니 깊이 배어나는 아련한 곰취의 향기 아, 나 살아오며 두번 열번 들여다보지 못하고 얼마나 잘못 저질렀을까 두렵다 삶이 다하는 날, 그때는 또 무엇으로 아프게 날 치려나 지리산 자락 산골마을에 살고있는 시인에게 봄밤 내내 곰취나물의 향내 또한 얼마나 깊을까. 심산유곡 맑게 자랐음에도 제 몸의 향기를 ...
코스모스 속엔 유랑곡마단의 천막과 나팔 소리가 있다 코스모스 속엔 까맣게 높은 천장에서 아슬아슬 줄을 타는 곡마단의 소녀가 있다 코스모스 속엔 하얀 꽃송이 팽그르르 맴을 돌며 떨어지는 물맑은 우물이 있다 검은 물빛을 보며 나도 나팔소리와 깃발 따라가는 떠돌이이고 싶었다 코스모스 속엔 하얗게 소름 마르는 길이 있다 지난해 늦가을, 고향역을 지나며 코스모스 만발한 역사를 한참 이나 둘러보다 씨앗을 받았다. 6년...
당신은 어청도로 가자고 한다 먼 데 어느 깊은 섬으로나 가자고 한다 주인 없는 그곳에다 집 하나 지으러 가자고 한다 이미 눈발 가득한 목소리로 섬에는 동백꽃 섬에는 등대불 빨갛게 불을 밝힌 눈빛으로 서해 먼 곳으로 가자고 한다 당신의 고운 노을 아래 잔잔히 빛나던 바다는 어린 게들처럼 모래 속에 숨어 들었는지 자꾸만 눈물 속에서도 모래알이 묻어나오는 먼 서해에 가자고 한다 작은 배 하나를 만들어 당신의 하염없는 등대불을 물결쳐 가자고 한다 떠나기 좋은 철이다. 신록들 도처에서 푸르고 새들 나무 이파리 빛깔로 종일 ...
동생이 나에게 작은 언니!라고 부를 적마다 내 마음엔 색색의 패랭이꽃이 돋아나네 왜 그래? 대답하며 착해지고 싶네 이슬 묻은 풀잎들도 오늘은 나에게 작은 언니라고 부르는 것 같아 그래 그래 웃으며 대답하니 행복하다… (후략) 하늘엔 별, 땅 위엔 꽃, 그 사이로 새와 사람이 날아가는 느낌이 든다. 새는 날개로 날고 사람은…. 희망의 펄럭임이 날아오르고. 언니라는 이름이 새삼스럽게 다정해 보이고 이슬 묻은 풀꽃들도 착해 보이는...
막힌 하수도 뚫은 노임 4만원을 들고 영진설비 다녀오라는 아내의 심부름으로 두 번이나 길을 나섰다 자전거 타고 삼거리 지나는데 굵은 비 내려 럭키슈퍼 앞에 섰다가 후두둑 비를 피하다가 그대로 앉아 병맥주를 마셨다 멀리 쑥국 쑥국 쑥국새처럼 비 그치지 않고 나는 벌컥벌컥 술을 마셨다 다시 자전거를 타고 영진설비에 가다가 화원 앞을 지나다 문밖 동그마니 홀로 섰는 자스민 한 그루를 샀다 내 마음에 심은 향기나는 나무 한 그루 마침내 영진설비 아저씨가 찾아오고 거...
고등어를 굽고 있는 당신의 등을 견딜 수 없어 달려가 껴안을 때 훗날 당신이 없을 때라도 사무치게 그리워하게 될 정신의 합일을 경험하고 있는 거야 (중략) 내 정신을 바람으로 내 육체를 불로 만드는 거야 살과 뼈를 구기고 태워서 바람과 불이 되어 당신과 섞이어 하나가 되고자 하는 거야 하나가 되고자 내 생을 당신 속에 집어넣고 또 집어넣고 봉인을 하는 거야 얼굴을 마주한 포옹과, 등 뒤에서 하는 포옹…. 둘은 껴안는 방법 이외의 차이가 있...
바닷가가 보이는 작은 역에 기차는 서서 이제 막 다다른 봄볕을 부려놓고 동해남부선은 남으로 길게 떠나는데 방금 내 생각을 스친, 지난날의 한 아이가 정말 바로 그 아이가, 거짓말처럼 차에서 내려 내 차창 옆을 지나가고 있네 아이를 둘씩이나 걸리고 한 아이는 업고 양손에 무거운 짐을 들고 내가 예전에 이곳 바닷가에서 일하던 때 소나기에 갇힌 대합실에서 오도가도 못하던 내게 우산을 씌워주고 빌려주던 아이 작은 키에 얼굴은 명랑한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