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이 쨍쨍한 여름 오후, 빨랫줄에 매단 할머니의 모시 치마가 항아리처럼 봉긋하다. 살이 비칠 듯 비치지 않는 모시 속곳 차림으로 툇마루에 나와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할머니는 흰 나비를 쫓는 백일몽이라도 꾸고 있을까? 모시에 빳빳이 매긴 풀 탓인지 움직일 때마다 나비 한 마리가 날개를 뒤척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윤달의 유월, 지루한 장마 끝에 햇살이 홧홧한 날을 골라 수의를 거풍하는 어느 날이다. 할머니는 올봄엔 흰 나비부터 보았으니 머잖아 저승사자가 당신을 데리러 올 거라며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오전 내 번질나게 올
찬란한 햇살이 쏟아지는 가을 들에서 수상소식을 들었습니다. 마치 햇살이 제 가슴을 파고 드는 것 처럼 뜨거운 무엇이 안겨왔습니다. 평생 진득하게 한가지를 못하던 내가 그래도 놓지 않고 있던 글쓰기가 나를 기쁘게 해 주었습니다. 세번째 도전에 과분한 상을 받게되어 더 기쁩니다. 마뜩찮은 습관이 목에 걸려 삶을 죄어올 때 마다 미늘을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그것을 글로 옮기기까지는 꽤 오랜시간이 필요했었지요.밤늦게까지 글과 씨름하는 어설픈 글쟁이를 이해해준 남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합니다. 늘 엄마의 글이 최고라며 치켜세워주는 두 아이
좋은 잠에서 깨어나면 좋은 날이기를 두려웠던 코로나19가 어느 정도 약화된 줄 알았다. 세 차례에 걸쳐 백신을 맞았지만, 지난봄, 온가족이 차례대로 코로나에 걸려 고생을 했다. 중년의 나는 사나흘 앓고 말았지만, 팔순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꽤 오랫동안 앓아 누우셨다. 입맛도 잃고 기운도 없으신 두 분은 자주 얕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가끔 그 곁으로 슬그머니 다가가 숨은 제대로 쉬고 계시는지 조심스럽게 확인해보곤 하던 잔인한 사월이었다.그렇게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다. 후배 아버지 부음이 들려오고, 친구 어머니는 후각을 상실했다
대마 껍질을 훑는 당신손톱과 손금 지문이 모두 까맣게 물들었다손끝이 가늘게 떨릴 때마다마른 풀잎 얹어 모깃불 모락모락 피워놓고삼줄기의 속내를 읽으려고 날을 세운다대를 잇는 숨결, 매미 날개처럼 펼쳐개밥바라기에 걸어보는 잉앗줄심호흡 크게 한번하고 베틀 앞에 앉는다캡사이신 보다 맵던 시집살이는 씨줄이 되고허기진 뱃속과 눈에 밟히는 자식은 날줄이 된다달그락 찰칵 째그락 딸깍 리듬을 따라뜨락에 풀벌레도 추임새를 넣는다어둠을 밀어내는 달빛처럼은은하게 펼쳐지는 삼베자락제 숨소리를 조율하는 당신의 시간갈고리 닮은 손가락 마디마디복중 염천과 부르
빠른 우편으로 지리산따스한 겨울 한 줌을 보냈구나욕심 없이 살아가는 일이눈 덮인 세석평전을 건너가는 일 같아서소매를 비우고버거움과 부끄러움을 가슴 속에 쟁이고신발을 턴다사랑하는 일의 빛나는 고난을기꺼이 짐 지고 가려 했지만쇠오리 떼는 날아오르고바다 기슭에 치이는 하얀 포말은어둠 속으로 스러져가는 것을 보며화려한 불꽃도 가멸찬 맹세도다 허망하고 부질없는 일임을 알겠다이 겨울이 가고 나면나도 바다가 보이는 우체국 창가에서봄이 오는 오십천맑은 바람 한 줌 너에게꼭 부칠게
메마른 시의 나무에 단비가 촉촉히 내립니다.웅크렸던 잎눈이 움을 틔우기 시작합니다.가슴이 두근거립니다.내성천이 저를 키웠습니다.계절 따라 버들피리 만들어 주고 찔레순 꺾어 먹여가며멱도 감기고 갈대가 손을 흔들어주면 썰매도 태워주었습니다.그 풍경이 여기까지 데리고 왔습니다.그 보답으로 시를 썼습니다.부족한 저의 글을 뽑아주신 경북일보 문학상 운영위원회와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열심히 쓰겠습니다.손을 잡아 이끌어주신 박선생님 노선생님 같이 공부했던 문우님들과이 기쁨 함께 하겠습니다.감사합니다.
청명하고 깨끗한 가을이다 펜데믹으로 많은 것들이 갇히고 묶인 힘겨운 일상 속으로 맑고 따스한 가을빛이 스미고 있다. 시의 길을 열어준 어느 스승의 말이 떠오른다. “시는 세상을 푸르게 만듭니다” 깊이 마음에 새기며 부족하고 어눌한 필치지만 더불어 사는 자연과 사람들 그리고 우주-그사이에 흐르는 기쁨과 눈물겨움, 사랑과 쓸쓸함을 시로 옮겨 보고자 애썼다. 내가 쓴 시 한 편이 세상을 푸르고 따스하게 만들고 웅크리고 아픈 영혼에 작은 울림으로 스며들기를 소망하며 습작의 길 단단히 건너왔다. 아침 쟁그러운 가을볕을 뚫고 수상 소식이 왔다
희연과 내가 지하철 역사를 나왔을 때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일기예보에 없던 3월의 눈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나온 4번 출구 앞의 쇼핑센터 건물을 끼고 백팩을 머리에 인 채 스무 발짝쯤 정신없이 달렸다. 우리를 멈춰 세운 건 노란 불빛이었다. 스무 발짝쯤에서 새로운 건물이 나타났고 2층의 통유리 너머로 노란 불빛이 퍼져 나와 함박눈을 조명처럼 비추고 있었다. 불이 꺼진 상가 사이에서 그것은 퍽 몽환적인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집까지 빨리 가야 한다는 마음뿐이던 조금 전의 생각을 잊고 홀리듯 노란 불빛을 쳐다보았다. 희연의 고개
가을이 깊어가면서 제가 사는 동네에는 기러기가 자주 보입니다. 사진을 찍어보려 휴대전화를 들면 그새 멀리 날아가 망연히 서 있곤 하지요. 특유의 V자 대오를 눈에 담고 울음소리를 귀로 들었으니 그것으로 충분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진을 찍는다는 행위가 허튼 욕망처럼 느껴지니까요. 그런데도 새들이 사라진 가을 하늘과 소슬한 바람은 마음에 흔적을 남깁니다.삶의 순간들을 포착하려는 노력도 때로는 부질없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기러기를 찍지 못해 망연히 서 있듯 그 모든 순간을 언어에 담고 싶은 열망 또한 어쩔 수 없습니다. 언젠가 망막에 맺
그와 그녀는 약속 시각보다 일찍 카페에 도착했다. 그가 먼저 여행사에서 제공하는 음료를 챙겨 들고 출입문이 잘 보이는 테이블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그의 맞은편 자리를 놔두고 한 칸 떨어진 자리에 앉아 역시 출입문을 바라보았다. 그는 모자를 벗어 들고 반백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나서 모자를 눈이 가릴 정도로 눌러 썼다. 그녀는 들고 온 종이 쇼핑백을 다리 사이에 놓고 안에서 빨간색 털실과 뜨개바늘을 꺼냈다. 그는 그녀가 털실이 잘 풀리게 정리하는 모습을 보면서 말했다.“뭘 뜨는 거야?”“뭘 뜨는 것 같아?”“여행 가는데, 주책없
장년이 된 지금 돌아보면 패키지여행 같은 인생이었습니다. 가이드의 깃발을 따라다니며 안주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음 한구석이 텅 비었고 그곳에 침전된 바싹 마른 공허함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활력을 채워 변주하려 했지만, 기운과 힘을 생성할 수 없었습니다. 이번 수상의 기쁨은 없던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이제는 자유여행으로 지나쳤던 실체도 새겨보면서 시야를 더욱 넓혀야겠습니다. 그러다 보면 예측하지 못하고 맞닥뜨리는 위기의 상황도 유연하게 그리고 슬기롭게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훤칠한 붕어가 목상에 누웠다. 입을 벌리고 희멀건 눈을 뜬 채 초점도 잃었다. 목욕재계 마치고 꼼꼼히 물기를 닦았으나 황망히 떠나올 적 입었던 비늘옷 그대로다. 몸은 축 늘어졌으되 유선형의 몸매가 매끈하고 지느러미는 한껏 펼친 모양으로 줄에 엮여 고정되었다. 거칠게 치뻗은 모습이 펄떡거렸을 생명의 움직임을 감지하게 한다.가지런한 비늘 위로 차가운 물감이 덮인다. 생전의 몸피와 흡사한 색으로 배합되었다. 붓으로 드문드문 안료를 올리고 색깔의 틈이 부드럽게 이어지도록 공을 들인다. 지느러미 사이도 놓치지 않고 촘촘히 공간을 채운다. 이
‘등불’ 하나 걸어 주셨습니다.이제 막 뙤약볕 내리쬐는 길목에서 그늘 한 점을 만났습니다. 우연이라고 여겼던 수필이 필연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수없이 고뇌하고 좌절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말과 글의 무게를 제가 감히 가늠이나 할 수 있을지 두려웠습니다. 그 길에 등불하나 걸어주신 경북일보와 심사위원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새로운 곳으로 접어들고 생각의 틀을 벗어나야 하는 어려운 여정이지만 제 앞에 놓인 길을 향해 다시 걸어가겠습니다. 낯설고 깜깜한 길을 훤히 밝혀주시는 김정화 선생님과 기꺼이 동행하는 동서대수필아카데미 문우님들이 계
태양이 떠오르자 기한에 맞추려는 듯 꽃들이 쉬지 않고 가동돼요 습기를 운반하던 구름도 사라지고, 밤새 한 뼘 더 창백해진 얼굴들이 컨베이어벨트를 타고 제품처럼 어디론가 실려 가요 노동의 적량을 아홉 시에 맞춰 공급해야 하는 건, 일종의 메뉴얼이죠쩔걱거리며 찍혀 나온 그림자들이 길바닥에 진열되면 곱슬머리와 푸석한 얼굴들이 우르르 이동해요 몇 개의 목쉰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뭉클뭉클 뱉어지죠갈라진 담벼락 틈새에 나사로 박혀 골목을 단단히 조이는 민들레 꽃잎들, 어쩔 수 없는 금속성이에요 건물과 건물 사이는 검은 폐유처럼 그늘이 흘러나와
좔좔 윤기가 흐르는 재봉틀만 봐도 내공이 느껴지는 그녀의 화단낡고 해지고 구겨진 채 수선을 기다리는 헌 옷들,개화를 꿈꾸는 씨앗들처럼 발아를 기다리고 있다그녀는 씨앗들의 상처를 면밀히 살펴본 후왜 발아하지 못했는지 이미 짐작한 듯쪽가위로 씨눈에 틈을 살짝 내자 향기가 와르르 쏟아진다올 하나 보풀 하나 다치지 않고 수습하는 달인,얼마나 많은 통증을 자처했길래 손 자체가 상처인가자신을 복기하듯 꽃의 수선에 대한 그녀의 문법은 직선뿐사선도 곡선도 점선도 절취선도그녀의 감침질 한 번으로 모두 곧은 심성이 된다눈대중이 가장 정확한 자이며 마
제 상처를 활짝 펼쳐 하늘을 만지는 코스모스처럼, 가을이 되면 꽃들도 제 몫의 상처를 핥습니다. 그리고 그 상처에서 새로운 꽃을 세상에 내놓고, 우산처럼 활짝 펼쳐 하늘을 너끈히 들어 올리는 걸 보았습니다. 올가을이 왜 그토록 커피향으로 짙었는지, 아스라한 계절을 받아 적는 오후입니다.적잖이 아팠고 쓸쓸했습니다. 돌아보니 우리 모두 꽃이었고 향기였는데 말입니다. ‘가을엔 기도하게 하소서’ 라고 말하지 않아도, 얼굴 없는 내 사랑 ‘시’에게 … 나를 끝까지 붙들어주어 참 고마웠다고… 적어 하늘로 띄웁니다. 사랑 화해 포옹, 이 모든
오후와 저녁의 경계에 서 있는 나는 이미 자정을 향해 있는 듯하다. 문득 하루 종일 지나왔던 시간들이 모두 백지가 된 것 같다. 시간의 마디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지금, 내가 서 있고자 했던 위치에서 나는 얼마만큼 어긋나 있는지 생각해본다. 문득 내가 낯설게만 느껴질 때가 있다. 내 안에 만연해 있는 어수선한 문장들로 나는 온통 내게 고질병처럼 감염되어 있는 것 같다.내가 가고자 하는 경로에서 나는 지금 나의 어디쯤 통과하고 있는 걸까, 생각해보다가 어쩌면 나로부터 너무 멀리 지나쳐 온 것은 아닌지 뒤돌아본다. 뒤안길이 아득하다
내가 도서관에서 책 반납과 대출을 도와주는 일하고 있던 시절 김희태는 내가 일하던 도서관에 일주일에 몇 번이고 찾아오는 단골 방문객이었다. 그가 고르는 책들은 늘 무겁거나 음산한 것들이었고 나는 할 일이 없을 때는 김희태가 빌린 책을 퇴근 후에 가져가 읽기도 했다. 김희태는 어느 날 내게 유자차를 건넸고 또 어떤 날은 시나몬 가루가 뿌려진 커피를 건넸다. 책을 빌리기 위해 도서관을 찾던 그는 책을 빌리지 않아도 도서관을 찾기 시작했고 언제부터인가 주차장에서 나를 기다리기도 했던 것 같다. 김희태가 즐겨 입던 세로 줄무늬 셔츠나 짙은
카페에서 사람들이 모여 메타버스 이야기를 할 때, 나는 눈앞에 없는 사람과 샤르도네를 마시고, 라면을 먹고, Chet Baker의 을 들었다. 나는 월급통장 쪼개기 강연보다 둥근 지구 속에서도 쏟아지지 않고 있는 나를 떠올리는 일이 더 흥미롭다. 4km 되는 거리를 자전거를 두고 걸어 다니며, 여전히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매일 상상하는 것이 슬픔을 가장 잘 참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여기고 있다.15년 된 잠옷 바지, 다 쓴 향수병, 쓸데없는 미신, 이제는 볼 수 없는 사람까지. 내가 사랑하는 것 역시 하필 문학임에 이 무용
제9회째를 맞은 올해 단편소설 부분 응모작은 작년보다 조금 줄어든 190편이었다. 이 중에서 예선을 거쳐 본선에 올라온 작품은 45편이었다. 세 심사위원은 15편씩을 나누어 읽고 그 중에서 13편을 본심에 올렸다. 본심에 오른 작품들은 일정한 수준에 도달해 있으나 선자의 눈을 끌 만큼 특출한 작품이 없어 윤독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윤독 후, 최종 본심에 올린 작품은 7편이었고, 그 가운데 집중적으로 논의의 대상이 된 작품은 「빨래를 널다」「모래의 시간」「일곱 발짝」「레일크루즈 패키즈여행」등 4편이었다.「빨래를 널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