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길은 줄이다. 줄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으로 이어진다. 길이 만남을 만들고 줄이 사람을 만들어 내는 가운데 저마다의 삶에는 갖가지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힌다. 만약 누군가가 옛길을 찾아 간다면 이는 과거의 어느 줄을 만나려는 갈망 때문이다.

가늘디가는 정맥 같은 산동네 집들이 골목을 따라 줄처럼 이어져 있다. 곁지기인 그와 나는 은혜를 갚는 까치의 심정으로 골목을 접어들었다. 사십 여 년이 지난 세월이건만 이곳만은 세월도 비켜갔나 보다. 그가 한 하꼬방 앞에 섰다. 집이 주인을 닮는 것일까, 아니면 주인이 집을 닮는 것일까. 사람은 분명 바뀌었는데 내미는 얼굴은 낯설어도 여전히 낯이 익다. 엄동설한, 아궁이 연탄불도 못 피울 형편이었을 때, 감자나 강냉이를 간간이 건네주었다는 할머니는 그에게 밥줄이었다.

소년은 가장이나 다름없었다. 어머니는 위암으로 밤낮 구역질을 해대고, 뱃사람인 아버지의 품삯은 어머니의 약값 대기에도 벅찼다. 가난과 굶주림에 찌든 육남매의 맏이인 그는 밧줄을 붙잡아야할 나이에 밧줄을 내려야 하는 신세였다. 열세 살인 어느 날, 그는 쟁기를 끌고 밭을 개간하러 산비탈에 올랐다. 가시넝쿨을 걷어내고, 칡뿌리를 캐내고, 돌멩이를 골라냈다. 연장을 쥔 손가락은 마디마디 물집이 잡히고 쓰라렸지만 씨앗을 뿌리고 싹이 돋는 기쁨에 설렜다. 하지만 푸성귀를 거둘 즈음에 나타난 땅 주인은 제 땅이라는 이유로 애써 심고 가꾼 호박이며 채소를 몽땅 뽑아 내동댕이쳤다.

악연도 생각하기에 따라 줄이다. 평생 놓지 못하고 살았으니까. 일찌감치 세상을 향한 눈을 뜨게 해 주었으니까. 그런 줄은 때때로 험한 세상을 건너는 오기나 인내가 된다. 오기는 단순한 힘이 아니라 생명의 기운이다. 그래서 줄은 누구로부터 어떻게 내려지든 어떻게 붙잡느냐에 따라 생의 노정이 달라진다.

포츠담의 한 갤러리에서 그림 한 폭과 마주쳤던 기억이 난다.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그림 속 청년의 발아래로는 사나운 파도가 출렁대고 있었다. 밧줄을 꽉 움켜쥔 손목에 불끈 돋아있는 힘줄에서 그 상황이 얼마나 아찔한지가 절실히 느껴졌다. 삶이 지옥보다 더 지옥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생사의 기로 앞에 서면 살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 그 생물학적인 절박감에 콧잔등이 짠했다.

줄에는 생명이 있다. 보잘 것 없고 쓸모없는 볏짚 가닥일지라도 모아서 비비고 엮어 나가면 무엇이든 묶을 수 있고 감을 수 있는 기능이 생긴다. 하물며 사람을 이은 줄이랴. 자신만을 위한 이기나 탐심, 권위나 권력의 욕구로 엮은 줄은 패망의 줄이 되고 인내와 겸손, 성실과 헌신으로 엮은 줄은 세상을 이롭게 하는 생명줄이 된다. 생명이 되는 것이 어찌 이뿐일까. 어미 뱃속의 태아는 태반을 연결하는 탯줄을 통해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 받고, 용뉴에 매달린 범종은 쇠줄로 들어 올리어져야만 세상을 밝히는 청명한 소리를 낸다. 이렇듯 누군가가 누군가를 위하여 내리는 줄은 인생에서 삶의 주어가 되고 목적어가 되기도 한다.

줄에는 두 개의 방향이 작용한다. 위를 향해 붙잡는 줄과 아래를 향해 내리는 줄이다. 붙잡는 줄은 오직 자신만을 위해 움켜쥐지만 내리는 줄은 은혜와 긍휼로 남을 위해 넉넉히 펴 보인다.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아래로 내려주는 줄이 있기 때문인데, 이 줄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주며 어둠 속에서 빛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된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용감한 시민 상을 받는 사람들에게 감동하고, 사글세에 살면서 개미처럼 일해 모은 돈을 선뜻 장학금으로 기부하는 할머니의 일화에 감격한다. 그리고 세상은 아직도 충분히 살 만한 곳이라고 감탄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줄이 될 때도 있다. 유명한 일화를 남긴‘윈스턴 처칠’과‘알렉산더 플레밍’과의 우정에서 이러한 삶의 이치를 읽어낸다. 귀족 아들인 처칠과 가난한 농부의 아들 플레밍과는 어릴 때부터 친구였다. 어느 날 플레밍은 물에 빠진 처질을 죽을힘을 다해 구해낸다. 그로 인해 처칠은 그를 아꼈고, 의과대학을 가고 싶어 하던 플레밍이 의사가 되기까지 아버지를 통하여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훗날 처칠이 폐렴에 걸려 목숨이 위태로울 때 플래밍은 그가 최초로 발견한 ‘페니실린’으로 친구의 목숨을 살려낸다. 그러고 보면 줄이야 말로 모든 긍정의 아이콘이라 해도 좋겠다.

사람에게만 줄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사물에게도 줄이 있어야 제 구실을 하는 것들이 있다. 가야금이나 비올라, 첼로 같은 현악기는 줄이 엉키거나 느슨해지면 제 소리를 낼 수 없다.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팽팽히 당겨져야 아리따운 선율이 피어난다. 또, 다이아몬드 브릿지나 골든게이트처럼 쇠사슬에 의지하여 매달아 놓은 현수교는 빗살처럼 꽂혀 있는 쇠줄이 교량 상판을 붙들고 있을 때, 균형을 유지하여 안전하고 탄탄한 다리가 된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줄을 잡았던 그가 이젠 줄을 내리고 있다. 자신에게 줄이 되어준 사람들을 찾아 나선지도 몇 해이다. 먹고 난 꼬지를 몇 개 슬쩍 감추어도 모른 척 주는 돈만 받던 어묵 집 할머니. 여름철 해변에서 샤워 물을 팔 때, 드럼통도 마다않고 수돗물을 제공하던 단짝친구 어머니. 끊임없이 믿고 격려해 주던 학교 선생님... ‘사랑은 받는 것 보다 주는 것이 더 복되다’는 현자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기꺼이 내려준 줄은 한 사람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사람에게 두 손이 있는 이유를 문득 알아차린다. 한 손으로는 나를 위해 줄을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남을 위해 줄을 내리라는 조물주의 섭리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고, 따뜻하고, 아름다운 줄은 강강수월래처럼 원을 이루며 손에 손을 잡는 줄이다.

돌아오는 길에 소낙비가 한차례 후려치더니 구름 사이로 햇볕이 비친다. 한풀 꺾인 연한 햇살이어도 만물 위에 고르게 내리는 구원이요, 자라고 소생시키는 생명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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