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깨어나십시오.

누구냐고, 여긴 어디냐고,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고 묻지 못했다. 그는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어둠이 물러가는 동안 그는 눈꺼풀만 껌벅거렸다. 애써 내뱉은 말은 속에서부터 일그러져 신음이 되고 말았다. 이마에 땀이 맺혔다. 그는 숨을 토해내며 몸에서 힘을 뺐다. 눈꺼풀이 힘없이 내려갔다. 빛이 그의 감은 눈꺼풀을 통과해 안구에 닿았다. 손가락 끝이 바르르 떨렸다.

“깨어나십시오.”

그는 다시 눈을 떴다. 시야를 가로막는 막이 있었다. 그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손가락 몇 번 움직이는데 온몸에 땀이 흘러내렸다. 희미하게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나더니 순식간에 땀이 증발했다. 이게 뭐지, 그가 생각하는 순간 막이 스르르 열렸다. 짙은 먼지의 습격에 그는 얕게 콜록거렸다. 먼지 맛이 이상했다.

“당신은 102년 만에 동면에서 깨어났습니다.”

음성의 주인공이 그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 얼굴 뒤로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 같은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려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저는 휴머노이드입니다. 당신이 깨어나길 기다렸습니다.”

먼지가 바람처럼 몰아치더니 금세 흐트러졌다. 휴머노이드가 손을 뻗어 그의 손을 붙잡았다. 금속성이 아닌 가죽 질감에 그는 화들짝 놀랐다.

“인간들의 관습대로 악수를 하려던 것이었습니다.”

손을 옆으로 빼버렸다는 걸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새 팔이 움직이게 된 것이었다. 휴머노이드는 계면쩍은 표정을 지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사람으로 보일 정도로 휴머노이드의 외피가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그가 동면에 들기 전 휴머노이드는 반려동물과 가사도우미 역할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진화되었다. 표정만큼은 쉽사리 진화되지 못했던 이유는 외피가 금속재질이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먼지바람이 불었다. 그가 동면에 들 당시 모든 동면캡슐은 비어있는 넓은 공공부지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건물 붕괴의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만큼 먼지가 많은 공간이었다. 캡슐에 들어갈 때 바람소리가 유난했던 기억이 떠올라 그는 입맛을 다셨다. 먼지에서 진짜 흙 맛이 났다. 당시의 중금속 가득한 흙먼지가 정말 쇠 맛이었는지 그저 그렇게 생각한 거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환경오염이 심각해진 건 한두 해의 일이 아니었다. 식량 문제가 가장 먼저 불거졌다. 전체 인구의 반 이상이 균형 잡힌 식사를 하지 못했다. 의료와 교육 혜택을 받는 인구는 20프로가 겨우 넘었다. 혁명이나 반란은 이전 시대의 전설로 치부되었고 생계형 범죄자들은 수감조차 못 되고 사라지기 일쑤였다. 차라리 세상이 망하면 좋겠다는 한탄이 중금속 가득한 먼지바람을 타고 퍼져나갔다. 하층민이 원하는 건 모두가 평등하게 망하는 것이었다. 상층민만을 위한 고가의 소우주선이 제작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 그는 하층민들의 움직임을 기대했다. 상층민이 탑승한 광속의 소우주선은 빛보다 빠르게 지구를 벗어났다. 하층민들은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해지도록 웃었다. 이젠 자신들의 세상이 올 거라면서. 지구를 떠난 이들은 우주에서 미아로 떠돌다 늙어 죽을 거라면서. 시간의 상대적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하층민을 보며 그는 헛된 기대를 가졌던 자신을 비웃었다. 하층민의 눈으로는 광속으로 이동하는 우주선 안에 있는 상층민이 늙어 죽는 걸 볼 일이 없을 터였다. 교육에서 소외된 지 오래된 하층민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남겨진 자들은 어쨌거나 평등하게 망하리라는 생각에 그는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소우주선보다 훨씬 저렴한 동면캡슐이 시판되기 전의 일이었다.

휴머노이드가 다시 손을 내밀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그 손을 잡았다. 가죽의 질감은 부드러웠다. 휴머노이드가 손을 천천히 잡아당기며 그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의 온 관절이 낡은 로봇처럼 삐걱거렸다. 캡슐 밖으로 나온 그는 자신이 서있는 곳을 둘러보았다. 온갖 잔해가 널브러져 있는 땅바닥, 시야에 잡히는 것이 없는 땅과 하늘 사이의 공간, 먼지로 대부분 가려진 하늘. 사막보다는 폐허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휴머노이드가 그에게 탈부착형 망원경을 건넸다. 그는 망원경을 쓰고 휴머노이드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개울인지 하천인지 모를 얕은 물의 흔적이 보였다.

“한강입니다.”

그는 망원경을 벗고 휴머노이드를 의심스럽게 쳐다봤다. 바람에 지층의 흙이 이동하여 평야지대에 둔덕이 생기거나 한강처럼 주변부가 깎여나가는 등 이전과는 지형이 많이 달라졌다고 휴머노이드가 설명했다. 휴머노이드는 그가 다시 쓴 망원경의 액정을 터치했다. 진흙탕처럼 보이는 한강 속이 꿀렁거렸다.

“내륙에는 물이 거의 없습니다. 해수를 담수로 바꾸는 과정을 단순화하는 기술을 개발하였기에 문제는 없습니다. 진화된 휴머노이드의 기술 개발은 인간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을 지향합니다.”

생명체가 사라진 지구에서 무산소 박테리아가 발생한 후 해파리 같은 강장동물이나 지렁이 류, 곤충류까지 출현하는 데에 30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자연발생적인 변화에 전기 자극, 생체 분리와 합성 등의 기술을 더했기 때문이었다. 더 복잡한 조직의 동물을 출현시키기 위한 휴머노이드의 기술 개발은 상당히 진행된 상황이었다. 휴머노이드의 설명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아 그는 다시 한강으로 시선을 돌렸다. 꿀렁이던 진흙탕에서 무언가 불쑥 튀어나왔다 들어갔다.

“망둥이와 유사한 어류입니다. 인간의 식량 확보를 위한 첫 실험에 이미 성공했습니다.”

그는 고개를 돌리며 망원경의 시력으로 다른 곳을 살펴보았다. 황량한 폐허를 지나 잔해가 유난히 지저분하게 널려있는 곳에 그의 시선이 멈췄다. 휴머노이드는 도심 외곽에 있던 집들의 흔적이라 설명했다. 그는 상층민에게 집짓기가 유행하던 때를 떠올렸다. 영생을 꿈꾸듯 상층민은 외곽 지역에다 온갖 고가의 재료를 동원하여 별장 같은 집을 지었다. 어지간한 재력이 아니면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막상 상층민은 은퇴 후에도 도심 안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외곽의 편의시설이 도심보다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중층민인 그에게는 그저 남의 일일 뿐이었다. 제법 건물 흔적이 남아있는 고궁터를 지나 그의 시야에 다시 폐허가 들어오자 그는 망원경을 벗었다. 먼지바람이 잠잠해졌는데도 눈앞이 흐려졌고 한 걸음도 걷지 않았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겨우 한 사람 누울 정도의 공간이지만 캡슐은 안락했다. 바이탈 체크 결과에 맞춰 수분과 영양이 공급되었고 정화시스템으로 온도와 습도, 내부 공기가 쾌적하게 유지되었다. 잠에서 깬 그는 건물에 관한 휴머노이드의 말을 돌이켜보았다. 휴머노이드가 보여준 입체도면 상의 건물은 층층이 캡슐의 기능을 가진 공간이 들어찬 형태였다. 폐허가 된 지구에서 자원의 한계는 효율을 우선할 수밖에 없다는 설명에 그는 다른 의견을 표할 수 없었다. 동면에서 깨어난 사람의 신체기능이 완전히 회복되면 캡슐은 기능을 멈추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자체 에너지 생산 모듈이 정지되는 것이었다. 캡슐 막 위에 둥그런 눈알 두 개가, 마치 그를 염탐하듯 은밀하게 다가왔다. 그가 놀랄 사이도 없이 캡슐 막이 열리며 휴머노이드가 손에 든 풀 한 포기를 내밀었다. 뿌리에 몽글몽글한 흙이 묻어있는 걸로 보아 살아있는 풀이었다. 휴머노이드는 캡슐 옆 땅을 조심스럽게 손으로 파내고 풀포기를 심었다.

“기술 개입 없이 자연 발생한 식물입니다. 제법 번식이 된 걸로 보아 현재의 토양에 적응한 게 틀림없습니다.”

자연 발생한 풀로 인해 대기 질이 인간 스스로 호흡하는 데 문제가 없게 되면 캡슐은 인간의 동면을 해제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호흡기와 그 외 신체능력에 따라 인간이 깨어나는 순서는 다르지만 살아있기만 하다면 동면에 든 모든 인간은 결국 깨어날 것이었다.

“이 풀 이름이 뭐죠?”

“아직 이름이 없습니다.”

풀 이름에 관심을 둔 적이 없었다는 게 그는 괜히 미안해졌다. 미안하다니, 누구에게? 그는 휴머노이드를 쳐다봤다.

“나를 기다렸다고 했죠? 언제부터죠?”

“당신이 잠들었을 때부터입니다.”

휴머노이드는 땅을 파느라 십자 모양으로 흠집이 생긴 손등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휴머노이드의 손뿐만 아니라 팔뚝과 몸집과 다리에도 흠집이 많았다. 흠집 사이로 번져있는 오래된 얼룩은 언뜻 무늬처럼 보였다. 휴머노이드는 웃는 모양에 따라 주름이 생기고 햇볕을 받아 피부가 검어진, 몸에 몇 가지 상처가 표식처럼 남아있는, 나이 든 사람 같았다. 휴머노이드는 건물터에 가보자며 그를 잡아끌었다. 한결 가뿐해진 몸으로 그는 휴머노이드를 뒤따랐다.

“그런데 당신 이름은 뭔가요?”

그의 질문에 몸이 살짝 흔들린 휴머노이드가 걸음을 멈췄다.

“제 이름은, 없습니다. 그냥 휴머노이드입니다.”

그도 걸음을 멈췄다. 설명을 원하는 그의 마음을 알아챈 듯 휴머노이드는 다시 입을 열었다. 휴머노이드의 첫 번째 임무는 기다리는 것이었다. 희망이 사라진 땅이 다시 숨 쉬기를,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든 인간이 깨어나기를. 기약이 없는 긴 시간, 인간이라면 절망과 우울에 빠져 자살할 수도 있었다. 진화된 휴머노이드에게 자아나 감정을 처리하는 프로세스가 생긴다면 인간처럼 자살할 위험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절망과 우울이 이름과 무슨 상관이죠?”

그의 질문에 휴머노이드의 몸이 다시 흔들렸다.

“다른 휴머노이드와 저를 이름으로 구분하게 되면 자아의 개념이 생기게 됩니다.”

설명하는 휴머노이드의 목소리도, 몸처럼 흔들렸다. 얼른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휴머노이드가 걸음을 재게 놀리는 바람에 그는 더 질문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가장 적합한 지반으로 골랐다는 건물터는 신산스러웠다.

“기억하시겠습니까. 이곳엔 아시아에서 최고 높이였던 건물이 있었습니다.”

아시아 최고층빌딩의 붕괴는 자연재해 못지않은 재난이었다. 그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었다. 상층민 구역이었던 빌딩 주변부는 이후 하층민 구역이 되었다. 건물의 잔해는 그가 태어난 이후에도 치워지지 않았고 그 구역에는 더 이상 높고 화려한 건물이 세워지지 않았다.

“쌓여있던 건물의 잔해 덕분에 다른 곳보다 토양의 마모가 적고, 오래 파헤쳐지지 않았기에 지반이 단단합니다.”

하층민 중에서도 가장 빈곤한 축이 아니면 가까이 가려 하지도 않았던 지역이었다. 빌딩 붕괴 시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악귀가 되어 주변을 떠돈다는 소문은 과학과 캠페인으로도 막기 힘들었다. 그는 개운치 않은 마음으로 휴머노이드를 쳐다보았다.

“가장 우선시해야 할 점은 효율……”

휴머노이드가 문장을 끝맺기도 전에 뒤쪽에서 큰 소리가 났다.

“아니, 지금 나더러 노가다를 하란 소리요?”

키가 작고 체격이 단단한 남자가 옆에 있는 휴머노이드에게 삿대질을 했다. 남자와 동행한 휴머노이드는 화를 참는 것처럼 얼굴 거죽을 씰룩였다. 먼지바람이 불어 벗겨지기 시작한 남자의 머리카락이 가볍게 흩날렸다.

“상식적으로 말이야, 기계가 사람한테 일을 시키는 게 말이 돼?”

“다시 설명 드리겠습니다.”

활동하는 인간이 없고 자원마저 고갈된 지구에서 휴머노이드를 새로 제작할 방법은 없었다. 자체 에너지를 고갈시키거나 파손되는 등 휴머노이드의 개체 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잉여자원이 된 동물과 인간의 가죽으로는 휴머노이드의 외피나 교체할 수 있을 뿐이었다. 외피 교체는 내부 칩을 보호하기 위한 방책이었지만 가죽 외피는 너무 쉽게 마모되었다. 시간이 지나며 가죽마저 고갈되었다. 환경 조사, 정보의 수집과 취합, 캡슐 보호를 위한 활동 외에 휴머노이드의 육체노동을 금지하는 프로세스가 작동되었다. 그도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남자는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노동은 신성한 것입니다.”

그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동면 전에도 농담 취급조차 받지 못한 오래된 명언을 읊조리는 휴머노이드의 표정이 진지하고 단호했던 만큼 그의 웃음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관망하고 있던 그의 휴머노이드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휴머노이드는 노동력을 잃었습니다. 노동력은 인간만이 가진 능력입니다. 인간과 휴머노이드는 협력해야 합니다.”

그의 휴머노이드와 남자의 휴머노이드는 외피뿐만 아니라 목소리도 달랐다. 갑자기 먼지바람이 크게 몰아쳤다. 남자가 허리를 접으며 얼굴에 피가 쏠리도록 기침을 했다. 남자의 휴머노이드가 남자 팔을 붙들더니 왔던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수많은 의문들이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혔지만 그 역시 호흡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조용히 다가온 그의 휴머노이드가 팔을 붙들었다.



수면모드를 선택하고 캡슐에 누운 그는 내내 화가 나있던 남자를 떠올렸다. 캡슐형 건물에 대해 저항 없이 받아들였던 그는 남자의 반응이 못내 낯설었다. 생각이 없는 거야, 말을 안 하는 거야. 이별을 통보하기 전 그녀는 그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두 사람의 미래, 하다못해 그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조차 그는 그녀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어쩌면 생각이 없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그녀는 매사 적극적이었다. 그런 그녀의 성격이 아니었다면 계층을 뛰어넘는 연애는 불가능했을 것이었다. 동면 전의 일상이 떠오르자 그는 진저리를 쳤다. 몇 년 사이에 상층민과 중층민의 인구비율이 급격히 낮아지면서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하층민은 점점 세분화되었다. 층위가 나뉜 하층민 사이에서 분쟁이 늘어갔다. 상층민과 중층민은 하층민 간의 분쟁에 무관심했다. 그들끼리 싸우는 한 위의 계층을 공격할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의 삶은 실상 하층민과 다를 바 없었다. 집에는 커튼이 없었다. 커튼 살 돈이 없기도 했지만 가로등 불빛을 받아 살며 전기요금을 아껴야 했다. 오래된 대형냉장고는 찬장으로 썼다. 진짜 음식을 먹는 일은 드물었고 싸구려 식품알약으로 대부분의 식사를 대체했다. 중층민의 기준 중 하나인 40평대 주택을 지키기 위해 그의 부모가 선택한 생활방식이었다. 그의 부모가 원래부터 궁상스러웠던 건 아니었다. 젊을 때는 큰 욕심 부리지 않았고 여유를 즐길 줄 알았다. 퇴직 후 연금이 깎이고 세금이 오르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하층민처럼 살았던 그의 부모가 가장 두려워한 건 하층민으로 떨어지는 것이었다. 계층 간 이동은 자유로웠으나 계층별 권리와 제한은 엄격했다. 제한된 권리와 경제적 불리함을 딛고 계층 상승을 이루는 건 실질적으로 불가능했다. 그의 부모는 임시직 공무원을 벗어나지 못하는 아들을 보며 한숨만 내쉬었다. 그에게 달리 할 수 있는 일도, 무언가 해보려는 의지조차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눈을 번쩍 떴다. 캡슐 막은 이미 열려있었다. 휴머노이드가 그를 향해 빙긋 웃었다. 깊게 잤는지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는 새로운 도시가 건설될 먼지 가득한 공간으로 시선을 두었다. 과거의 도시는 계층별로 철저히 구획이 나뉘었다. 계층 간 이동이 많았던 시절에는 다른 계층의 거주구역에 드나드는 게 일상적이었다고 했다. 계층 별 반목이 생기고 권리의 구별이 뚜렷해지면서 분위기는 달라졌다. 다른 계층의 거주구역에 드나드는 걸 꺼리는 건 물론이고 공동구역에서 마주치는 다른 계층의 사람들은 공적인 일이 아니면 말도 잘 섞지 않았다. 미래도시는 어떤 모습일지, 사람 사이에 또 다시 계층이 나뉠지, 그는 여전히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그 미래도시라는 건 누가 설계한 거요?”

그를 향해 다가오는 남자는 그새 혈색이 많이 회복돼있었다.

“인간입니다.”

남자와 같이 걸어오는 휴머노이드의 대답이었다. 남자는 과장되게 혀를 찼다.

“휴머노이드가 이렇게 하나마나한 소리를 하는 이유를 모르겠네. 젊은 양반은 알겠소?”

‘젊은 양반’이라는 말이 그의 머릿속에 걸려들었다. 그는 여태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기억이 돌아온 걸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캡슐을 나와 남자 앞에 섰다.

“혹시 본인 이름 기억하시나요?”

남자는 멍한 표정이 되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소리를 반복하던 남자는 휴머노이드에게 자신의 이름을 물었다.

“인간의 이름을 기억해내는 건 휴머노이드의 임무가 아닙니다.”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름과 자아 개념이 연결된다는 설명이 떠올랐으나 돌이켜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남자는 그새 휴머노이드가 액정에 띄운 건물 설계도면에 머리를 들이대고 있었다.

“아니, 이게 무슨. 설명 들은 것보다 더 심하잖소. 사람이 인형도 아니고.”

남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는 남자가 40평대의 감옥을 원하는 건지 궁금해졌다.

“젊은 양반은 저런 데서 평생을 살 수 있겠소? 사람하고 마주 볼 수도 없고, 아이를 안아서 달랠 수도 없고, 아내와 서로 희롱할 수도 없는……, 아니 그러니까 앞으로 생길 가족이……, 에이씨.”

남자가 섧게 흐느꼈다. 동면캡슐 구매는 중층민 이상의 계층에만 허락되었다. 중층민 중에도 비용 때문에 캡슐을 구매하지 못한 경우가 있었으니 허락되었던들 하층민이 캡슐을 구매할 수는 없었을 것이었다. 가족을 이룬 중층민의 경우 가족 모두가 캡슐에 올랐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남자가 소매로 눈물을 닦아내더니 땅바닥에 아이들 낙서 같은 설계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수면실과 주방과 거실이 분리된 형태의 집은 넓은 평형의 주택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남자는 자신이 그린 설계도 한 쪽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나는 여기에 사진을 걸어두고 싶소.”

남자는 손가락으로 화분을 놓고 싶은 자리, 책을 놓고 싶은 자리, 가족과 게임을 하고 싶은 자리를 점찍었다.

“미래도시 프로그램은 기반시설을 완성하고 인프라를 구축한 이후에 생활공간으로써의 집을 짓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휴머노이드의 말에 남자는 주먹으로 제 가슴을 치는 시늉을 했다.

“거 순서 좀 바꾼다고 큰일 난답니까?”

“휴머노이드에겐 프로그램 변경 권한이 없습니다.”

그와 남자의 시선이 마주쳤다. 프로그램 변경 권한은 깨어난 자들에게도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었다.

“우주선 타고 토낀 작자들은 지금 어찌 됐소?”

남자의 목소리가 은근했다. 휴머노이드는 소우주선의 행로를 추적할 프로그램이 없다는 대답으로 남자의 호기심을 차단했다. 결국 휴머노이드와 깨어난 자들은 기반 시설 마련해놓고 우주에서 돌아올 상층민을 기다려야 하는 거였다. 기어코 살아남은 이유가 이전과 똑같이 살기 위해서였다니, 그는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차라리 다시 동면에 드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거처는 그렇다 치고, 당신들, 그러니까 휴머노이드 거처는 어쩌시려고?”

무거운 정적과 함께 먼지바람이 그들 사이를 떠돌았다. 남자는 내내 그와 동행했던 휴머노이드의 팔을 붙잡아 올렸다. 길게 두 줄의 사선으로 찢어진 자국 옆으로 가죽 찌꺼기가 지저분하게 붙어있었다.

“휴머노이드 개체수가 중요하다면서? 이렇게는 오래 못 버티지 싶은데? 그 작자들이 시키는 대로만 할 거요?”

두 휴머노이드는 얼굴 근육을 접었다 폈다, 꼭 난감해 하는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휴머노이드의 거처가 생긴다면 임무에 도움이 되리라 판단하십니까?”

그의 휴머노이드가 차분한 목소리로 남자에게 질문을 했다.

“거야 나는 모르지.”

남자의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지나갔다. 프로세스 변경 범위 안에서 가능한 일인지 회의에 부친다며 두 휴머노이드가 자리를 떴다. 휴머노이드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남자의 눈엔 의구심이 가득했다. 그는 어서 캡슐에 눕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휴머노이드는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휴머노이드 사이의 소통 방식을 그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사람은 휴머노이드를 육성으로 불러야 했다. 휴머노이드를 부를 수는 있어도 뭐라고 불러야할지 그는 막막했다. 이름이 없다는 건 아무래도 불편했다. 신주강이라는 이름을 기억해낸 남자는 편안한 얼굴이 되어 캡슐로 돌아갔다. 자진해서 남았다는, 그렇게 살아 뭐 할 거냐며 오히려 화를 냈다는 남자의 가족들은 알았을 것이었다. 부스러질지언정 남자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리라는 것을. 좁은 전용공간을 어떻게 쓸지 고민하는 남자의 얼굴은 연애를 시작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이름이 떠오르면 남자처럼 삶에 대한 기대가 생길지, 자신과 미래를 향한 설계가 가능해질지, 그는 조금 궁금해졌다. 떠오르지 않는 이름 때문에 답답한 심정은 이름으로 인해 자아가 부여된다던 휴머노이드의 설명을 다시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의 부모는 죽어도 포기하지 않을 것 같던 집을 처분해 그에게 캡슐에 오르도록 했다. 더 나은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 아들에게 했던 마지막 말은 당부라기보다 다짐 같았다. 살아보지도 못할 세상에 대한 기대라니.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 앞으로 살아가야 할 세상에조차 기대가 없는 게 바로 그였다. 그의 부모가 생을 마친 세상에서는 모두에게 이름이 있었다. 애완동물도, 가사도우미 휴머노이드도, 생존이 버거운 하층민들에게조차도. 그까짓 이름이 뭐라고. 그는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그까짓 게 뭐라고 이름을. 풀포기나 휴머노이드나 자신이나, 이름이 없어도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하자 그는 마음이 편해졌다. 무슨 일에든 포기부터 하려 드는 그를 보며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고 혀를 찼고 화를 냈다. 호기심이 많은 그녀는 새로운 일에 겁먹지 않았다. 마음먹은 일이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 결과를 만들어냈다. 신규 유망 직업으로 부상한 미래생활 컨설턴트가 되기 위해 그녀는 밤을 새워 각종 자격증을 땄고 무보수로 실무에 투입되어 경력을 쌓았으며 세련된 옷차림과 행동을 미리 준비하고 연습했다. 그는 그녀의 방문을 위해 비싼 세제를 사서 청소를 해야 했고 비싼 전기를 들여 조명을 밝혀야 했으며 비싼 식재료를 구입해 대접을 해야 했다. 상층민인 그녀는 그 간극을 이해하지 못했다. 결별을 고하면서 그녀는 그에게 가치 있게 살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아무 의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같은 상층민 남자와 결혼해 소우주선에 올랐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도 그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계층을 넘어선 연애를 선택한 건 그녀였고 그는 그저 따랐던 것뿐이었다. 그는 그녀가 꿈꾸는 찬란한 미래가 자신의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당시엔 그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는데, 이상했다. 다시 생각하니 그녀가 부러웠다. 그녀는 빛의 속도로 이동하는 우주선 안에서 나이도 먹지 않고 지구로 돌아올 미래를 기대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의 얼굴이 갑자기 뜨겁게 달아올랐다.



남자에게 동행이 있었다. 휴머노이드가 아니었다. 얼굴에 여드름이 나있는 소녀였다. 호기심 가득한 소녀의 눈이 별처럼 반짝거렸다.

“어려서 그런가, 어찌나 회복이 빠른지. 이름도 금세 기억해내고.”

남자가 미소를 지었고 소녀는 뒤통수를 긁었다. 두 사람은 사이좋은 부녀지간 같았다. 멀리 휴머노이드 셋이 걸어오고 있었다. 남자는 그에게로 허리를 숙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사람답게 살 거처를 설계해주면 휴머노이드의 거처도 우리가 만들어주겠다고 제안했소. 어차피 쟤들, 그림이나 그릴 줄 알지……”

남자는 휴머노이드의 눈치를 보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프로세스를 변경하였습니다. 휴머노이드의 개체 보존을 위해 자원과 노동력을 투여해야 한다는 결론은 논리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습니다.”

휴머노이드의 통보에 남자는 그를 향해 득의만만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휴머노이드도 인간처럼 거처를 개별 소유하기로 하였습니다.”

휴머노이드의 입에서 나온 ‘소유’라는 단어가 생경해 그는 남자를 쳐다봤다. 남자는 헛기침을 하고선 입을 열었다.

“그래, 임무를 완수했다 칩시다. 그러고 나서 당신들은 어떻게 되는 거요?”

휴머노이드의 개별 거처 소유의 문제로부터 파생된 생각이 틀림없었다. 개별 거처의 공유화와 사유화에 대한 합의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그는 남자의 생각이 너무 앞서간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먼지바람이 그와 남자와 소녀에게 닿았다. 소녀는 잔기침을 했지만 힘든 기색은 아니었다.

“폐기될 것입니다.”

“리부팅될 것입니다.”

두 휴머노이드가 동시에 대답했다. 휴머노이드가 개별 진화한 만큼 폐기에 대한 정의가 다른 걸로밖에 볼 수 없었다. 휴머노이드를 구성하는 물질은 어떤 방식으로든 재생이 가능할 터였다. 외피가 보존된 경우라면 진화된 프로세스에 임무만 바뀔 수도, 하드웨어를 교체할 수도 있었다. 일반적인 리부팅으로 정의할 수 있는 경우였다. 외피의 마모가 심하다면 어떻게 쓰일 수 있으며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 건지 그는 혼란스러웠다. 그의 휴머노이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자원이 귀한 상황에 휴머노이드를 구성하는 물질은 새로운 휴머노이드의 재료가 될 수도, 생필품의 자재로도 쓰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리사이클링입니다.”

남자의 휴머노이드가 반박하자 그의 휴머노이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산산이 부셔져 가루가 되어 지반을 구성하는 흙의 대용이 되는 것조차도, 넓은 의미의 리부팅입니다.”

“그것은 폐기입니다.”

이번엔 소녀의 휴머노이드가 반박했다. 남자와 소녀는 그저 이쪽저쪽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도 혼란스럽긴 마찬가지였다. 폐기라 쳐도 완전한 끝은 아니며 한 존재의 끝이 모두의 끝은 아니다. 그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그 정도였다. 캡슐에 오르며 그는 끝이라 여겼다. 깨어난 뒤의 세상에 대해서는 상상도 해보지 않았다. 막상 깨고 보니 긴 시간을 지나왔어도 삶이 고스란히 이어졌다. 삶의 가치까지는 몰라도 살아있는 목숨은 어떻게든 부지해야 했다. 그는 휴머노이드를 봤다. 자아프로세스를 제거한 채 긴 시간을 버텨온 존재. 휴머노이드의 시간과 노력은 프로세스의 진화와 외피의 흔적으로 남아 기억되고 재구성될 것이었다. 그도 아니라면 살아있는 무수한 존재들의 필요로 그 가치를 증명할 것이었다.

“그런데 젊은 양반, 아직도 이름이 떠오르지 않소?”

남자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김은수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은수야. 은수 씨. 은수 님. 그는 자신의 이름이 그토록 낯설 수가 없었다. 제 입으로 부를 일이 없었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지어진 이름이었다.

“이름은, 새로 지으면 되는 거잖아요.”

그의 목소리 톤이 높아지자 남자가 흥미롭게 쳐다봤다. 그는 새 이름을 떠올리려 주변을 둘러보다 휴머노이드와 눈이 마주쳤다.

“휴머노이드도 마찬가지구요.”

그의 말에 휴머노이드가 몸을 떨었다. 그는 휴머노이드에게 성큼 다가가 손을 붙잡았다. 가죽 외피에서 미약한 온기가 느껴졌다. 휴머노이드의 자아 개념 금지는 절망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절망을 부르는 기약 없는 기다림은 그가 깨어나면서 끝났다고 봐야 하는 것이었다.

“휴머노이드에게 이름을 짓게 되면 노이즈가 발생합니다. 노이즈의 정도가 심하면 휴머노이드 프로그램이 블랙아웃될 수도 있습니다.”

그가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소녀가 수줍게 입을 열었다.

“이름은 잘 모르겠구요, 어쨌든 우리가 만드는 세상은 예전과는 다르겠죠?”

“아무렴. 달라야하고 말고.”

그는 남자의 밝고 가벼운 목소리가 어쩐지 어색하게 느껴졌다.

“국가를 포함한, 모든 집단을 건설하고 멸망하는 방식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습니다. 인간의 욕망이 늘 같은 방식으로 발현되기 때문입니다.”

불쑥 끼어든 휴머노이드의 말은 소녀와 남자의 희망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

“결국 인간은 같은 실패를 반복한다는 뜻인가요? 그러자고 지금 우리가……”

목소리가 높아진 그의 팔을 소녀가 가만히 붙들었다.

“아니에요. 역사책에서 배웠어요. 더 낫게 살기 위해 기록을 보고 공부하고 토론하고 싸우고, 그러다 나빠지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사람들은 계속 노력해왔다고 쓰여 있었어요.”

남자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세상이 어디 계획대로 됩디까? 당장, 건물 설계도 계획하고 다르게 되고 있잖소. 아니다 싶으면 고치고 바꾸고, 정 못 쓰겠으면 뒤집어버리지 뭐.”

남자와 소녀는 마주보고 해맑게 웃었다. 두 사람의 긍정이 그는 숨 막히기도, 부럽기도 했다. 소녀는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제 이름을 나꼬로 바꾸겠다고 했다. 나꼬가 애니메이션의 영웅인 줄 모르는 남자가, 낫또냐 나초냐, 물었다가 소녀의 원성을 샀다.

“휴머노이드는 당신의 이름을 기억할 수는 없지만 만들어줄 수는 있습니다.”

그는 휴머노이드를 돌아보았다. 기대하지 않았던 휴머노이드의 기능이었다. 이름을 지어주겠다는 제안을 먼저 한 걸 보면 휴머노이드의 프로세스가 급속히 진화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막상 그는 자신의 이름보다 휴머노이드의 이름을 짓는 게 더 고민스러웠다. 이름을 짓는 것으로 자아가 발생하는 게 문제라고 했으니 다른 방식을 찾아보아야 할 터였다. 그는 내내 자신과 동행했던 휴머노이드의 손을 제 앞으로 끌어당겼다. 휴머노이드의 손등엔 풀을 뽑다 생긴 십자모양 상처가 또렷했다.

“손등에 십자모양.”

그는 고개를 돌려 다른 휴머노이드를 가리켰다. 그에게는 가슴팍에 검은 얼룩이 있었고 또 다른 휴머노이드의 팔뚝엔 사선으로 난 두 줄의 상처가 있었다. 이름이 아니라 특징이었다. 모두가 말이 없는 가운데 소녀가 입을 열었다.

“팔뚝 사선 두 줄 님. 이렇게 부르면 이름이잖아요.”

그는 입을 다문 채 손가락 두 개로 제 팔뚝을 긋는 시늉을 했다.

“팔뚝에 두 줄, 팔뚝에 사선, 사선이 두 줄. 이렇게 번갈아 가면서 부릅시다.”

이름을 짓지 말고 그 특징만 짚어내자는 뜻이었다.



기초 시공부터 만만찮았다. 지반의 층위에 따라 부실 정도가 달랐다. 공정이 복잡했고 자원이 많이 필요했지만 그는 기둥을 중심으로 상호 연동하여 기초판을 구성하는 방식을 주장했다. 자원의 한계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 보니 계산된 효율과 주관적 필요가 상충되기도 했다. 합의를 거쳐 휴머노이드의 거처를 먼저 짓기로 결정이 되었다. 동면캡슐의 에너지 생산 모듈을 리부팅하여 기능을 연장한 것이었다. 그새 더욱 진화된 휴머노이드는 이미 확보된 캡슐을 이용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휴머노이드의 개체 보존이 시급하니 인간의 거처를 짓는 걸 미루자는 뜻이었다. 그의 불만에 남자는 호탕하게 웃었다. 휴머노이드의 거처를 지으며 습득한 기술은 사람의 거처를 더욱 발전되게 짓는 역할을 할 거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지어진 사람의 거처는 오로지 지구에 남은 자들의 것이었다. 휴머노이드와 사람의 공간 지분이 늘어나 돌아올 사람들을 위한 거처는 미래도시 계획에서 빠질 수밖에 없고, 굳이 끼워 넣는다 해도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게 남자의 주장이었다. 그 오랜 시간, 지구에 남은 자들을 위한 세상이 건설될 거라는, 남자의 낙관을 그도 믿고 싶었다. 그는 어두워지기 시작한 밤하늘을 쳐다봤다. 며칠 사이 별이 더 많아지고 가까워진 게 공기가 좋아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도, 다른 사람들도, 모든 휴머노이드도 알고 있었다. 만약 상층민이 짧은 시간 내에 돌아온대도 그들 스스로 약한 지반 위에 가벼운 재질로 만든 집을 지어야 했다. 쉽게 떠나간 자들이 치러야 하는 대가였다. 손등에 난 십자 모양을 몸 앞으로 내민 휴머노이드가 급한 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스스로 이름을 지었던 휴머노이드가 노이즈 발생 끝에 작동을 멈췄습니다.”

건물을 짓기 시작하고 세 번째 생겨난 일이었다. 그는 특징을 기억해 개별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휴머노이드에게 유사 자아 개념이 부여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에 만족하지 못한 휴머노이드 일부가 계속해서 프로세스를 변경하며 스스로에게 이름을 지어 결과를 검증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손등에 난 십자모양의 상처를 쓰다듬으며 몸을 떨고 있는 휴머노이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감정은 허락되지 않은 프로세스라며 휴머노이드는 위로를 거절했지만 그는 휴머노이드가 울고 있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휴머노이드 개체 확보가 시급합니다. 자원은 우선적으로 휴머노이드 생산에 투입되어야 합니다.”

그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잡혔다.

“어, 왜 나는 명령으로 들리지?”

남자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도 더 이상 가만히 있고 싶지 않았다.

“휴머노이드의 거처가 완성되는 즉시 사람의 거처를 지을 겁니다. 언제까지 캡슐에서 지낼 수는 없어요.”

단호한 그의 태도에 남자가 조금 놀란 기색을 보였다. 심장박동이 커지자 그는 이젠 익숙해진 먼지바람을 깊숙이 들이마셨다. 망설이는 듯하던 휴머노이드가 입을 열었다.

“휴머노이드는 개별 임무에 따라 진화의 내용이 다릅니다. 그 개별성까지 파악하여 저장하기엔 메모리 용량이 크지 않습니다. 미래를 위해서라도 메모리에 여유분을 남겨두어야 합니다.”

“뭔 소리가 하고 싶은 거요?”

남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새로운 휴머노이드가 즉시 생산되지 않는다면 미래도시 건설에 지장이 생기는 건 물론이고 인간 생존을 위한 환경의 진화가 멈추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휴머노이드가 이젠 협박까지 한다며 구시렁대는 남자의 얼굴에 깊은 그늘이 졌다. 그는 휴머노이드가 스스로 이름 짓기를 그만두도록 만들고 싶었지만 이미 진행된 프로세스를 무효로 만드는 일은 프로그램의 영역이었다.

“사람 거처 건설과 휴머노이드 생산을 동시에 진행합시다. 더는 양보할 수 없습니다.”

그의 제안에 휴머노이드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회의에 부치겠다고 말했다.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젊은 양반. 아니 미로 님. 저들은 받아들일 거요. 그 정도 합의점을 예상하지 않았겠소. 안 받아들이면 뭐.”

남자는 하늘로 향해 있던 손바닥을 뒤집어 바닥으로 향하게 했다. 물리력으로 저항하자는 뜻이었다. 휴머노이드의 개체수가 늘어난다면 노동력 역시 사람들만의 것은 아니게 될 수 있었다. 그는 어두워지고 있는 밤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급작스럽게 끼어든 소녀가 그의 시선을 가로막았다.

“저 빼놓고 얘기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래그래, 우리 나초 님.”

“아, 신주강 님 정말.”

“아니다, 낫또였던가?”

남자의 넉살에 그는 빙긋 웃었다. 멀어지던 휴머노이드가 걸음을 멈추더니 그들을 뒤돌아 봤다. 날카로운 그 눈빛에 담긴 질투의 감정을 그는 애써 외면하며 고개를 돌려 하늘에 떠있는 것들보다 더 빛나는 소녀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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