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사고로 노동자가 다치거나 사망하는 ‘중대 재해’가 발생할 경우 사업주와 경영 책임자를 처벌하는 내용의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안(중대재해법)이 지난 8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가운데 ‘노동자 인권’을 주장해온 지역의 노동운동가 평전이 출간돼 주목을 받고 있다.

경북 경주 출신의 불굴의 노동운동가 김말룡의 한평생 이야기 ‘김말룡 평전’(이창훈, 학민사)이 출간됐다.

김말룡 선생은 노동자로 태어나 노동자의 권익향상을 통한 사회발전을 위해 일생 동안 투쟁하고 노력했던 노동운동가. 어떠한 이념이나 진영논리도 거부하고 오직 노동자 중심으로만 생각하고 행동했던 사회운동가이다.

이창훈 씨가 펴낸 ‘김말룡 평전’은 불굴의 노동운동가로 한평생을 살았던 그의 일대기를 들려준다. 경제성장 속에 국민의 삶은 과거보다 크게 좋아졌지만, 각종 산재사고로 매년 2천여 명이 사망하고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 현상 또한 여전하다는 점에서 김말룡의 일생 이야기는 현재진행형이라 할 수 있다.

1927년 경주의 월성에서 태어난 김말룡 선생은 소학교 졸업 후 14살 나이로 일본에 건너가 노동자로 일했다. 해방되자 귀국한 그는 이듬해 결성된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대한노총)의 산하조직인 조선펌프제작소분회 대표로 노동운동의 길에 뛰어든다.

이후 그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숱한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오로지 노동 운동가의 길을 걸어갔다. 1956년부터 대한노총 대구지구연합회 위원장으로 있으면서 이승만의 영향 아래 있던 대한노총을 개혁하려 했으나 무산되자 1959년 서울에서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국노협)를 결성해 중앙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된다.

다음 해에 4월혁명이 일어나자 두 조직은 한국노동조합총연합회(한국노련)으로 통합되고, 김말룡은 중앙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돼 최초의 민주적 노조위원장으로 발돋움했다. 하지만 1961년 5·16쿠데타로 박정희 군부가 집권하면서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이 출범했고 한국노련은 해산되고 만다.

계속되는 시련 속에서도 그의 도전은 멈추지 않았다. 1966년 연합노조위원장으로 복귀해 한국노총으로 통합된 한국노련의 탈환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이후 3차례나 노총위원장직에 도전했지만 역시 무산됐다. 유신체제에서 더이상 제도권 노동운동을 할 수 있다고 판단한 그는 1974년 노총전국대회를 끝으로 노동운동 일선에서 물러났다.

대신에 다음 해부터 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정평위)에서 노동상담을 하기 시작해 동일방직사건을 사회문제화하는 데 앞장섰다. 김수환 추기경으로부터 영세를 받은 그의 천주교 세례명은 ‘이냐시오’. 서울 명동성당의 한 귀퉁이 건물에 명동노동상담소를 차리고 억울한 노동자들을 보듬어 안은 것이다. 1979년 10·26사태로 유신정권이 무너지고 이듬해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복직투쟁을 이유로 한때 구금되기도 했으나 노동상담은 계속됐다. 1987년까지 상담 건수는 무려 1만8천여 건에 이른다.

1990년 거대 여당 민주자유당(민자당)이 등장하자 이에 대항해 이듬해에 통합민주당(민주당)이 결성됐고, 선생은 1992년 치러진 제14대 총선에서 민주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한다.

정치인의 길 또한 노동운동의 연장선이었다. 1991년과 1993년 원진레이온 산업재해사건 특별조사단장, 1993년 전국 구속수배해고노동자 원상회복운동 대책위원회 위원, 1996년 전력노조 김시자 열사 분신대책위원회 등 노동자가 고통받는 현장에는 어김없이 나타나 책임자들에게 호통을 쳐가며 문제해결을 촉구했다.

저자는 “평생 노동자의 권익향상을 통한 사회발전을 위해 투쟁하고 노력했던 선생의 노동운동에 대한 생각은 마르크시즘보다는 페이비언주의자 시드니 웹이 내세운 산업민주주의에 가까운 노동조합주의였다”며 “이번 평전 발간을 계기로 한국사회에서 노동운동의 성장과 발전에 기여한 선배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이 기록을 넘어 올바른 역사적 평가를 받는 과정이 되기 바란다”고 말한다.

곽성일 기자
곽성일 기자 kwak@kyongbuk.com

행정사회부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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