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이야기] 21. 영주시 휴천1동
[우리동네 이야기] 21. 영주시 휴천1동
  • 권진한 기자
  • 승인 2021년 02월 07일 19시 13분
  • 지면게재일 2021년 02월 08일 월요일
  • 13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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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부터 자연석까지 가득 '냇물도 사람도 쉬어가는 힐링 마을'
영주시 휴천 1,2동 드론사진

‘냇물도 사람도 쉬어 가는 곳’으로 이름난 휴천1동은 영주시의 중심부에 위치해 도시와 농촌지역으로 구성된 도농복합지역이다. 공업지역이 위치해 공업발전 잠재력이 풍부한 곳이다.

면적은 시 전체의 0.8%이며 2693가구 670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휴천1동 지역은 3개의 자연부락이 있다.

첫째는 마을 앞의 내(川)가 두 갈래로 흘러가고 있는데 그 물줄기의 모양에서 지금도 마을 이름을 ‘둘개비’ 또는 ‘둘구비’다.

두 번째는 하나의 자연부락인 ‘구서원(舊書院·현재 7통)’은 조선 명종 13년 군수(郡守) 안상(安常)이 이퇴계(退溪)선생을 향(享)하기 위해 이곳에 이산서원(伊山書院)을 창건했는데, 옛날 서원(書院)이 있던 마을이라 해 마을 이름을 ‘구서원(舊書院)’이라 부르게 됐다.

세 번째는 현재 4·6·8통 지역을 일명 ‘광심’이라고 하며, 마을 뒤 송림(松林)이 무성한 산속에 옛날 광승사(廣昇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그 절 이름에 연유(緣由)해 마을 이름을 ‘광승’이라고 부르고 있다.
 

고인돌 입석

△영주 최고(最古)의 선사시대 유적의 보고.

휴천1동 지역은 영주의 역사를 품은 지석묘(고인돌) 2기와 입석(선돌)1기가 있다.

휴천동 선사시대 지석 및 입석은 경상북도 지방기념물 제24호로 지정된 휴천1동의 대한노인회관 분회경로당 앞마당에 위치하고 있다. 우리나라 선사시대 중에서도 청동기 시대에 살았던 사람의 무덤과 기념물로 알려져 있다.

지석묘 입석.

지석묘는 고인돌이라고도 불리는데. 일반적으로 표면의 큰 뚜껑돌 밑에는 여러 형태의 매장시설이 마련돼 있다. 그러나 이 고인돌은 발굴조사가 실시되지 않아 하부가 어떠한 형태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고인돌(지석묘)롸 선돌이 있었다는 것은 이곳 일대가 과거 오래전부터 우리의 먼 조상이 살았음을 일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특히 지석묘와 입석이 함께 있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희귀한 예에 속한다고 역사학자는 말한다,

입석의 크기는 140×50㎝ 정도고 재질은 화강암이다. 지석묘 상석으로 추정되는 2기의 크기는 220×120×40㎝, 240×200×30~50㎝이고, 재질은 역시 화강암이다. 선돌이 마을을 수호해 준다고 믿고,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 전날 밤에 마을의 안녕과 발전을 기원하는 의미로 동제를 지내고 있다.
 

뚜께바위.

△자연석 바위 위에 뚜겅돌이 얹힌 ‘뚜께바위’.

휴천1동 주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뚜께바위’는 영주시 휴천동 광승이 마을 뒤산에 자리 잡고 있는데 높이는 10m. 지름은 7m가량이다.

둥실한 항아리 모양에 뚜껑이 얹혀 있는 형상이어서 이 마을 사람들은 ‘뚜께바우’ 혹은 ‘뚜께바위’ 라고 부르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선사시대 지석 및 입석 표지판

조선 초기 천성이 착한 송석(宋石)이란 소년이 광승이 마을에서 서쪽 10리쯤 떨어진 못골(문정동) 한천서당에 글을 배우러 다녔는데, 하루는 어떤 노인이 꿈에 나타나 못골 못에 있는 잉어를 잡아 생짜로 먹으면 힘이 세질 것이라 일러주어 그대로 했더니 과연 천하장사가 됐다.

얼마 후 큰 비가 내려 이웃 동네의 장례 행렬이 남원천을 건너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었는데, 이때 소년이 나타나 사람들을 모두 상여에 태운 채 혼자서 번쩍 들어 내를 건네줬다. 이 소문이 삽시간에 한양까지 퍼지자 조정 신하들이 “이 소년을 살려두면 장차 나라에 큰 우환이 생길 것이다” 해 임금에게 죽음을 명하도록 했다.

뚜께바위 정자

소년은 이 소문을 듣고 걱정하는 어머니께 “나라에서 아무리 날 죽이려고 해도 저의 겨드랑이에 비늘이 붙어 있는 한 누구든 감히 저를 건드리지 못합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이 하나를 살리자고 온 집안을 풍비박산(風飛雹散)나게 할 수는 없어 어머니는 소년이 깊이 잠든 틈을 타 겨드랑이에 있는 비늘을 떼어버렸다. 그러자 그 소년은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지르며 죽고 말았다.

그 후 몇 일 뒤 등에 갑옷을 실은 용마가 나타나 슬피 울며 못골 연못둑을 몇 바퀴 뛰어 돌더니 갑옷을 이 바위에 넣고 뚜껑을 덮은 뒤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그 후로 많은 사람이 이 바위를 신성하게 여겨 금줄을 두르고 치성을 드렸으며, 바위에 배를 문지르면 아이를 가진다 해 아이를 원하는 부인들의 발길이 이어지기도 했다.

사람들이 호기심에 바위의 갑옷을 꺼내려고 몇 차례 접근했는데, 그때마다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와 주위가 어두워지고 천둥 번개가 내리쳐 감히 손을 대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매년 1월 1일에는 뚜께바위에서 해맞이 행사를 해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떡국을 제공해 주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다.
 

기려자 송상도 영정

△애국지사 기려자 송상도 선생을 기리며.

애국지사 기려자 송상도 선생은 영주 휴천동 사람이며 1910년 일제에게 침탈 당한 후 수많은 독립운동가 애국선열들의 항일투쟁을 했던 행적을 30여 년 간에 걸쳐 전국을 현지 답사하며 기록해 ‘기려수필’을 출판했다.

기려수필

기려수필은 2018년부터 시와 문화재청에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6년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휴천1동 행정복지센터에서 200m 지나면 기려자 송상도 생가터가 있다.

기려자 유고집

유서 깊은 이곳에 선생의 숭고한 우국충정의 정신을 기리고 서세 70주년을 추모해 후학들이 옷깃을 여미며 돌 하나를 세운다. 집터에서 왼쪽으로 30m쯤 산기슭에 바라보이던 선생의 묘소는 1982년 국립대전현충원에 이장됐다.

이 경술국치(1910) 이후 국권회복을 위해 35년간 전국을 발로 누비며, 의병 독립운동가의 행적을 르포기사처럼 남겨 후세 구국운동의 사료인 기려수필은 2018년부터 시와 문화재청에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 지역에 순국선열을 모셔 둔 충혼탑이 가까이 있는 것 같다.
 

술바위.

△술바우와 술바우 전설.

휴천1동 세영첼시빌에서 이산 방면으로 가는 길에 좌측에 ‘술바우’란 큰 바위가 있다.

옛날에 영주에서 예안(안동)으로 가는 길목이어서 예전에는 이곳에 주막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선지 ‘술이 생기는 바우’라고 오래전부터 그렇게 불러온 모퉁이돌·비보석(裨補石·허하고 약한 땅을 자연환경을 이용해 도와 채움)이기도 하다. 세월따라 바위 앞으로 새로 난 원당천의 물길이 가로 막고 있어 점점 사람들의 이목에 멀어지는 것 같다.

술바위 경술10노암.

‘술바위’에는 영천군시설 선정비(군수 정동기 청덕 선정비, 군수 조영화 청백인애비)가 암각 돼 있다.

인근 도로 교차로 이름도 술바우 교차로로 명명돼 있다.

이진호 휴천1동장은 “선사시대부터 현재까지 이어진 휴천1동을 더욱더 발전하기 위해 주민들의 산책로인 원당천의 잡목을 제거하는 등 아름답게 꾸미고, 등산로인 뚜께바위를 새로 단장해 사람들이 힐링하는 장소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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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진한 기자 jinhan@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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