넒은 들판·푸른 강물…눈길 닿는 곳마다 빼어난 경치

청송군 청송읍 청운마을 전경.
청송군 청송읍 청운리는 주왕산국립공원의 길목에 있는 큰 마을로 군청 소재지로부터 동쪽으로 6km 떨어진 곳에 있다.

동쪽으로는 송생리, 서쪽으로는 금곡2리와 파천면 신흥리, 남쪽으로는 주왕산면, 북쪽으로는 금곡3리, 교리와 인접해 있다. 주왕산국립공원과 대구·영천으로 가는 분기점이기도 하다.

마을 앞으로는 맑은 내가 흐르고 성황산이 용전천 강물에 푸르게 비치고 있으며 산 정상에는 축조 시기를 알 수 없는 성(城)이 세워져 있다.

청운리는 청송에서 가장 넓은 들판이 부채꼴 모양으로 배치돼 있고 예로부터 줄다리기와 풍물놀이, 환장대 세우기 등이 유명했다.

과거에는 가평이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지만 지금은 평해황씨, 예천임씨, 파평윤씨 등 다양한 성씨들이 살고 있다.

청운리는 조선시대 안기도에 딸린 청운역이 있던 곳에서 유래해 지금의 청운리로 불리게 됐다는 유래가 있다. 또 조선시대 공무를 수행하던 마을로 삼국시대 고분과 산성의 흔적도 남아있다.

청운리의 빼어난 경치에 제1경 성대신월(星臺新月·마을 앞산인 성황산에 초승달이 뜨는 모습), 제2경 부연모하(釜淵暮霞·마을 앞 용전천의 가마소에 생긴 저녁노을), 제3경 은어심담(銀魚深潭·마을 앞 은어소에 은어가 노니는 모습), 제4경 봉산낙조(烽山落照·마을 뒷산으로 해가 지는 광경), 제5경 선산초적(仙山樵笛·맨드락산에서 버들피리 부는 모습), 제6경 월구청탄(月駒淸灘·깨끗한 물이 흐르는 월구천의 풍광), 제7경 고만어화(菰灣漁火·고만천에서 밤에 고기 잡는 광경), 제8경 벽암조수(霹巖釣수·고만천바위에서 늙은이가 낚시하는 모습)의 ‘취동팔경(翠洞八景)’이라는 한시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청송군 청송읍 청운리 풍경.
△영이정(詠而亭).

취동팔경의 한 시가 걸린 영이정은 1734년(영조 15년) 마을의 한가운데 창건됐다가 세월이 흘러 무너지면서 1945년 지금의 장소로 옮겨졌다. ‘영이’란 ‘때(時)와 형세(勢)를 알고 소요자재(逍遙自在)함’을 뜻하는데, 평해황씨 청송 입향조인 황덕필(黃德弼)선생의 자호(自號)다. 선생은 계유정난에 연루되어 낙향했다가 중종 때에 청운리로 들어왔다고 한다. 영이정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전면에는 둥근 기중으로 권위를 세웠고 가운데 2칸은 대청으로 열고 양쪽에는 1칸X1.5칸 규모의 방을 두었다. 지금의 영이정은 2009년 3월 증축한 것으로 벽에는 취동팔경 각자판이 걸렸으며 증축에 뜻을 모은 문중 사람들의 이름이 비에 새겨져 있기도 하다.

청송군 청송읍 청운리 영이정
청운리 영이정 우측 정면 모습
△파서정(巴西亭).

마을을 기준으로 하천의 동쪽 물굽이에 영이정이 있다면 서쪽 물굽이에는 파서정이 있다. 파서정의 건립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덕이 빛나고 풍속을 바르게 고치고 이름을 감추고 자취를 감춰 길이 은둔해 유유자적 도를 즐기던 가의대부 황정필(黃廷必)이란 분이 계셨는데, 그를 기려 정자를 세우고 ‘파서정’이라 편액 했다고 전해진다.

‘파서정기’에는 “비처럼 쏟아지는 바위의 긴 다리가 가마소에 새로 놓여 병풍과 장막 같이 둘러있어서 영롱하기가 거울 같고 큰 강이 그 아래 흐르고…봉수(烽燧)와 성대(星臺)가 그 뒤에 팔짱 끼듯 하고”라고 묘사하고 있다. 영이정과 비슷한 구조인 파서정에서는 성황산과 남쪽으로 흐르는 능선이 모두 한눈에 들어온다.

청운리 파서정
청운리 파서정 좌측정면 모습.
△만취서당과 만취정.

만취정은 조선 후기 유학자 만취동 황학 선생을 기리는 정자다. 선생은 평생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해 마을 사람들이 자랑으로 여겼다. 그가 세상을 떠난 26년 뒤, 1830년 후손 황대손이 황학이 강학하던 곳에 만취서당을 지었고, 1847년 만취정을 세웠다. 만취서당과 만취정 모두 3칸 측면 2칸 규모로 마을 제일 위쪽에 자리한다.

청운리 만취정
청운리 만취서당
△줄 당기기.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청운마을 줄 당기기는 1981년부터 재현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마을 사람들로부터 짚을 모아 150~200m의 길이에 10~15㎝ 굵기의 가닥줄을 만들어 줄이 완성되면 줄 당기기 날까지 청·장년들이 보초를 선다. 줄 싸움은 줄놀이와 기세다툼을 거듭한 뒤 오후가 되면 양편이 “자 메우자”라는 고함소리와 함께 두 줄을 결합할 정소까지 운반하고 윗마을의 숫줄과 아랫마을의 암줄을 걸고 길이 1.5m, 굵기 20㎝ 정도의 참나무로 만든 종나무를 양 줄에 끼워 결합한 뒤 수백 명씩 참가해 줄 당기기를 시작한다.

줄 당기기는 정월 초순에 행해졌지만 최근에는 문화재 행사가 열리는 10월 말 군민 전체가 윗줄과 아랫줄로 나눠 군민화합 행사로 치뤄지고 있다.



△ 삼베길쌈.

청운마을의 길쌈은 안동의 금소보다 유명했다고 전해졌지만 나일론이 나온 뒤부터는 길쌈은 사라지고 지금은 몇 집만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삼은 초복 열흘 전쯤에 베어 가마솥에 쪄서 삼굿을 만들고 삼을 삼을 때는 밤에 여럿이 모여 둘레로 돌아가며 삼는다. 동네 여인들은 낮에는 들에 나가 일을 하고 저녁부터 밤늦게까지 삼을 삼고 새벽녘 닭 울음소리와 함께 일어나 다시 삼을 삼는다. 집집마다 딸이 시집갈 때 자신의 옷과 시댁 식구들을 위한 ‘정성 옷’을 직접 길쌈을 해서 만드는데 주로 무명 옷을 짓고 물레로 실을 자아서 베를 짠다.

삼베를 짠 뒤 누렇게 색을 내는데 콩깍지 등을 태워서 만든 재로 잿물을 받아 삼베에 발라서 아랫목에 묻어 하룻밤을 지내고 씻어내면 누런 옷감이 완성된다.

이정목 기자
이정목 기자 mok@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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