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무릅쓰고 당쟁의 폐해 열거한 정명론 상소 대의와 지조 지켜

영양 주실마을에 있는 옥천종택. 옥천은 조덕린의 호다.

△왕이 내민 ‘독배’ 사간원 사간

1725년 3월, 조덕린(趙德린·1658~1737)은 소용돌이치는 정국 한가운데로 불려 나갔다. 영조가 그를 불렀다. 갑술환국이 나던 1694년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 영양 주실마을에 은거한 지 30년 만이었다. 그의 나이 68세였다.

정국은 살얼음판이었다. 갑술환국 이후 정국은 그의 정계 복귀 30년 동안 롤러코스터를 탔다. 남인은 완전히 실각해 정치권 밖으로 사라진 듯이 보였고 노론과 소론간 주거니 받거니 피비린내 나는 정권 쟁탈전이 벌어졌다. 경종 때 신임사화로 소론이 집권하면서 노론 4대신이 죽었고 영조가 즉위하자 다시 정권을 쥔 노론이 소론의 4대신을 죽였다. 노론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오른 영조는 거센 파도 위에 올라탄 일엽편주처럼 위태로웠다. 영조는 노론 천하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고 싶었다. 그 돌파구를 영남 남인 조덕린에게서 찾으려 했다. 영조가 즉위 8개월 만에 노론의 눈총을 감수하며 그를 부른 이유다. 이때는 벼슬자리가 죽을 자리였다. 조덕린은 자신에게 내민 ‘독배’를 수차례 거부했으나 왕은 막무가내였다. 왕은 종6품 홍문관수찬을 임명했다가 사양하자 세자시강원 필선, 용양위 부호군에 제수했다. 조덕린은 사양했다. 종3품직인 사간원사간에 제수하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왕이 내민 ‘독배’를 수용했다.

왕은 조덕린에게 혼란스런 정국을 타개할 시무책을 요구했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 을사년에 내놓은 10가지 시무책 ‘을사십조소’를 내놓았다. ‘성학을 바르게 할 것, 덕을 닦아서 하늘에 보답할 것, 재물을 절약하여 비용을 절약할 것, 공도를 넓혀 사사로움을 없앨 것, 실제와 명분을 바로잡아 왕도를 세울 것’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개혁안이다. 조덕린은 나라에 당고(黨錮)의 습관이 굳어져 작은 나라를 하나로 만들지 못하고 한쪽을 위축시키고 한쪽에서 인재를 겨우 얻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논어’의 ‘군군 신신 부부 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를 인용해 이름과 실질이 제자리를 찾지 못해 임금은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는 신하답지 못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답지 못하고 자식은 자식답지 못한 나라가 됐다며 이를 바로잡기 위한 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내용이다.

십조소는 목숨을 건 상소였다. 당고의 습관이 굳어졌다는 말과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다는 지적은 정권을 독차지한 노론을 직격하고 있었다. 노론이 권력을 오로지 하고 왕위에 군림하고 있다는 말에 다름이 아니었다. 노론이 벌떼같이 일어났다. ‘조덕린의 소가 그 지적함이 불측하니 관직을 삭탈해야 한다’ ‘소어(疎語)가 흉패(兇悖)하니 섬으로 유배 보냄이 옳다’며 탄핵했다. 당파갈등을 조장하고 왕에게 할 말 아니 할 말 가리지 않고 특정 정파의 입장만 대변한다며 들끓었다. 영조는 이복형 경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노론의 지지를 받아왔다. 왕세제에 책봉되고 왕위에 오르기까지 노론이야말로 자신의 절대 지지기반이기도 하면서 개혁의 발목을 붙잡는 걸림돌이었다. 게다가 영조는 경종을 독살했다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왕은 한발 물러섰다. “조덕린에게 죄가 없는 줄 내가 잘 알지만, 이 많은 화살촉과 빽빽한 칼날을 나라고 어찌하겠는가”라며 탄식했다. 삼천리 밖 오지 함경도 종성에 귀양이 떨어졌다. 나이 70세를 눈앞에 두고 멀리 떠나는 그를 위해 오광운(吳光運)이 시를 썼다. ‘북천증행시(北遷贈行詩)’다.

곧은 이를 받아들여 종성고을은 커졌고
어진이 나셨으니 새재는 더욱 높아졌네
일편단심에 북관의 달을 보며 괴로워하고
몸은 늙어도 뜻은 변방의 구름 위에 높고 멀어라
容直鍾城大 生賢鳥嶺高
丹心關月若 身老塞雲遙


조덕린의 자는 택인(宅仁), 호는 옥천(玉川), 본관 한양이다. 아버지 조군(趙군)과 어머니 풍산류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지금의 주실마을이다. 주실마을에 한양조씨 세거지를 마련한 사람은 조덕린의 증조부인 호은(壺隱) 조전(趙佺)이다. 1629년에 들어왔다. 어려서는 형 덕순과 함께 숙부 조병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하회 외가에도 드나들며 외조부 류세장 등에게 수학했다. 장성해서는 영남 남인의 영수였던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20세 학사 김응조의 외손인 안동권씨와 결혼했으며 33세 증과문과에 급제했다. 승문원 정자를 시작으로 관직에 들었다가 1694년 갑술환국 때 노론의 세상이 되자 신병을 이유로 사임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주곡에 초당을 짓고 현실 정치와는 담을 쌓고 산다. ‘주역’과 ‘태극도설’을 읽었다.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초상을 치르고 스승 이현일의 제문을 지어 올렸다. 1706년 48세에 춘양 법전 소천리 소라에 별서를 짓고 책 읽고 강학하며 세상일을 잊고 지냈다.
 

영양주실마을 표지석.

△‘을사십조소’는 자신을 찌르는 칼

조덕린이 귀양살이를 하던 1727년, 정국은 또 뒤집어졌다.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정권을 잡으면서 조덕린은 유배지 종성에서 2년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사헌부집의, 홍문관 부응교, 홍문관응교, 사간원 사간 등에 제수됐으나 사양했다. 1728년에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다. 조정은 오명항을 순무사로 박문수를 종사관으로 급파했다. 문제는 영남이었다. 이인좌의 난에 영남 우도 인사들이 대거 참가했기 때문에 의병을 모으는 호소사는 영남 지역 인물로 임명해야 했다. 노론이 주도하는 조정에는 영남 인사가 없었다. 조덕린이 통정대부 품계를 받고 호소사로 임명됐다. 그의 나이 71세였다. 조덕린은 급하게 안동부로 내려와 초유문을 지어 열읍에 돌려 의병을 모으고 정랑 류승현을 대장으로, 권만을 부대장으로 삼아 출병하려 했으나 난이 진압됐으므로 해산했다.

이인좌의 난이 진압되자 1736년 79세 조덕린에게 또 다른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노론은 ‘을사십조소’를 남인과 조덕린을 치는 칼로 활용했다. 사헌부 지평 김한철이 다시 ‘십조소’ 카드를 꺼냈다. 그 상소가 이인좌의 난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영조가 부당하다는 뜻을 분명히 했으나 이번에는 양사(兩司)가 들고 일어났다. 조덕린을 통해 세상을 바꿔 보려던 영조는 힘이 없었다. 의금부에 압송돼 국문을 받았으나 무죄로 방면됐다. 왕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조덕린에게 함경도 미곡과 역마를 하사하며 호송하게 했다.

일이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이현일의 제자인 김성탁이 스승 이현일의 원통함을 호소하는 내용의 ‘갈암신원소’를 올렸다. 갈암신원소는 아슬아슬 줄을 타던 정국에 뇌관을 건드렸다. 노론은 이 기회에 조덕린을 제거하려고 발 빠르게 움직였다. 조덕린도 김성탁도 이현일의 문인이었고 넓게 보면 퇴계 이황의 제자들이었다. 그들은 또 다시 ‘십조소’를 거론하며 영남의 영수인 조덕린이 배후에 있다고 주장했다. 영조는 마침내 조덕린을 제주도에 위리안치하라고 명했다. 1737년 7월, 조덕린은 안동에 들러 친지와 이별하고 광주·영암을 거쳐 강진에 도착한 뒤 거기서 사흘을 머물렀다. 7월 20일 “생사에는 한도가 있으니 천명을 어길 수는 없다. 목욕은 깨끗하게 하고 염하고 묶는 것은 반드시 단조롭게 하라. 엷은 판자와 종이 상여를 만들어 말에 실어서 돌아가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으니 그의 나이 80세였다.
 

옥천동택 옆에 있는 창주정사. 조덕린이 강학하던 곳이다.

△조덕린의 유적지

옥천종택은 영양 주실마을 산자락 구릉 위에 세워진 집이다. 주실마을은 시인 조지훈이 태어나 자란 곳이다. 조지훈은 조덕린의 12대 방손이다. 높은 곳에 자리 잡아 전망이 좋다. 17세기 말의 전형적인 양반주택으로 살림채인 정침, 글 읽는 별당인 초당, 가묘인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교 없는 살림집이 검소하고 마루와 석축 아래 디딤돌이 예쁘다. 볏짚으로 이엉을 엮어서 지은 초당은 조덕린의 장자인 조희당이 부모를 추모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검소하게 지었다고 한다. 사당은 1790년에 건립된 3칸 건물로 정침의 우측 뒤편에 자리한다.
 

옥천종택 소장 백세청풍 병풍.

종택의 오른편에 나란히 들어선 건물은 창주정사(滄洲精舍)다. 2022년 현재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조덕린이 강학하던 곳이다. 창주는 조덕린의 별호다. 조덕린이 51세 되던 1708년에 태백산 노고봉 기슭에 세운 것이라 한다. 이후 1720년에 청기면 임산리(霖山里)로 옮겨 문생들을 가르치며 만년을 보낼 곳으로 삼았다. 150여 년이 흐르면서 정사가 소실되자 사림에서 강당을 재건해 임산서당(霖山書堂)이라 이름하고 강학을 이어오다 현재의 자리로 이건한 것은 1990년이다.
 

봉화 법전면 옥곡천에 있는 사미정. 춘양구곡의 2곡이다.

봉화군 법전면에 있는 사미정(四未亭)은 조덕린이 함경도 종성에 유배 갔을 때 아들을 시켜 지은 정자다. ‘중용’을 읽다가 “군자의 도에 네 가지가 있으나 나는 하나도 능한 것이 없다”라고 한 공자의 말씀에 이르러 책을 덮고 탄식했다. 그때가 정미년 정미원 정미일 미시였으므로 사미정으로 이름했다. 봉화 춘양구곡 중 2곡으로 꼽힐 정도로 경치가 빼어나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글·사진=김동완 작가·한국국학진흥원 집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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