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 왕위찬탈 비판 '조의제문' 실록에…직필로 사림 정신 구현

청도군 이서면 서원리에 있는 자계서원.

△자계에 비친 맑은 달 같은 선비

자계제월(紫溪霽月)은 비 갠 맑은 날 자계에 비친 달이다. 자계는 청도군 이서면에 있는 청도천 지류다. 자천이라고도 한다. 비슬산과 자양산에서 흘러나온 물이 자계서원 앞에서 합류해 서원천이 되고 청도천, 유천을 거쳐 밀양으로 흘러든다. 개울물이 자계서원 앞을 흐르기 때문에 자계서원 영귀루에서 바라보는 달이라는 뜻으로도 이해한다. 청도팔경 중 7번째 경치로 꼽힌다. 월인천강(月印天江)이라고 했다. 달은 온 세상의 강을 다 비추므로 자계에 비친 달을 특별히 청도 팔경으로 꼽은 데는 다른 까닭이 있다. 자계서원은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의 옛 집터이고 김일손이 운계정사를 짓고 강학하던 곳이다. ‘자계에 비친 달’은 김일손의 고결하고 맑은 선비정신을 상징하기도 한다. “새로 하사받은 편액을 해와 달처럼 높이 걸고/오래된 정려를 구름과 안개 길이 에워싸고/ 탁영대 곁에는 가을바람 일어나 / 뜻있는 선비의 마음을 흔들고 아프게 하네” 권해는 ‘자계서원’이라는 시에서 김일손의 맑고 고아한 선비정신을 이렇게 찬양했다.

자계의 본래 이름은 운계(雲溪)다. 구름 가득 몰고 다니는 개울이 핏빛 붉은 개울, 자계로 이름을 바꾼 것은 조선을 뒤흔든 역사적 사건, 무오사화와 연결돼 있다. 무오사화로 김일손이 처형당하자 운계의 물 색깔이 핏빛으로 변해 사흘 동안 역류했다고 한다.

김일손은 1464년(세조 10) 아버지 사헌부 집의 김맹과 어머니 용인이씨와의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지금의 청도군 이서면 서원리다. 본관은 김해,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이다. ‘탁영’은 굴원의 ‘어부사’에서 나왔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으리라’는 탁영탁족(濯纓濯足)의 처세관에서 가져왔다.

삼형제는 출중했다. 맏형은 10살 많은 준손(駿孫), 둘째 형은 9살 많은 기손(驥孫)이다. 어머니 용인이씨가 혼인한 날 밤, 준마 세 마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세 줄기 푸른 구름으로 변해 자신의 품 안으로 날아드는 꿈을 꾸었다. 세 아들의 이름에 ‘말 마(馬)’자가 들어가고 자를 ‘백운(伯雲), 중운(仲雲), 계운(季雲)으로 정한 이유가 다 꿈에서 나왔다. 준손과 기손은 1482년 삼 년마다 치르는 식년시에서 차석과 장원을 차지했고 일손은 그다음 식년시에서 차석으로 합격했다. 여러 시관들이 김일손을 1등으로 꼽았으나 이극돈 만이 홀로 ‘과장의 제술은 정식이 있는데 정식에 맞지 않다’ 주장해 차석으로 내려 앉혔다. 이극돈과의 악연은 이때부터 시작돼 결국 무오사화로 이어졌다.

17세에 김종직을 찾아가 문하에 들었다. 김종직은 ‘나의 의발(衣鉢)을 전할 사람은 그대인데, 훗날 문병(文炳)을 차지할 것이다’라고 기대를 드러냈다. ‘문병’은 예문관과 홍문관의 대제학을 일컫는다. 그는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 정여창, 김굉필, 강혼, 남효은 등과 동문수학하며 교유했다. 김일손은 성종대에 예문관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 등에 근무하며 춘추관기사관과 기주관을 겸했다. 뒤에 막강한 인사권을 가진 이조전랑에 오를 정도로 성종의 신임이 두터웠다.

성종은 김일손 삼형제를 상당히 총애했다. 삼형제가 노모 봉양을 이유로 수시로 벼슬을 물러나겠다고 하자 홍인문 근처에 집을 하사하고 노모를 봉양하도록 했다. 어머니가 서울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자 김준손이 함양군수로 나가면서 반납했다. 그러자 성종은 김일손에게 집을 내렸다.
 

영귀루와 탁영선생 순절 500주년 추모비.

△이극돈 개인 비리 드러나자 사화 일으켜

언관이자 사관인 김일손은 강직했다. 자신을 아끼는 성종이라고 봐주지 않았다. 성종은 폐비사건을 겪을 정도로 후궁이 많았고 유흥을 좋아했다. 예문관 겸열로 있을 때 ‘임금이 술을 좋아하고 희첩을 가까이 하며, 종친과 기생을 데리고 놀기를 좋아하는 폐단’을 지적했다. 당대의 금기사항도 거리낌 없이 공론화했다. 단종 후사를 정해 제사를 지내자는 입후치제다. 노산군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고혼이 의탁할 곳이 없이 떠돌고 있다며 제사를 지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일손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소릉의 복위를 들고나왔다. 세상을 떠난 현덕왕후는 아무런 죄가 없는데 노산군(단종)의 생모라는 사실만으로 서인으로 강등됐으니 이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성종은 노산군 부인 송씨에게 적몰재산을 돌려주었고 송씨는 단종의 조카이며 문종의 외손자인 정미수를 양자로 삼아 제사를 지내게 했다.

성종은 김일손을 아꼈지만, 그의 강직한 성품에 대해서 걱정도 없지 않았다. “김일손은 성품과 행실이 너무 준엄하고 고상할 뿐만 아니라 젊어서인지 기상이 너무 날카롭고 언론이 심히 곧으니 노성해질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성종의 이 같은 우려는 결국 연산군 시대에 접어들어 현실로 나타났다. 성종이 죽자 사방에 적들로 우글거렸다. 왕은 사림파를 극도로 싫어했고 왕의 비위를 맞추는 훈구파들이 득세했다. 운명의 무오년이 왔다. 김일손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죽음의 길로 들어섰다. 무오사화(戊午史禍)의 도화선은 이극돈이 자신의 개인 비리를 덮기 위해 유자광과 손잡고 김일손의 사초를 문제 삼으면서 일어났다.

실록청 당상관으로서 ‘성종실록’ 편찬 책임자였던 이극돈은 사초를 열람하다가 김일손이 쓴 사초 중에서 자신의 비리를 적은 기록을 보게 됐다. 정희왕후가 상을 당했을 때 장흥의 관기를 데리고 놀았던 일, 뇌물을 받은 사실 외에 불경을 잘 외운 덕에 세조의 눈에 띄어 출세했다는 것 등 하나같이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내용이었다. 김일손을 찾아가 삭제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다급해진 이극돈은 유자광을 찾아갔다. 유자광은 김일손의 스승인 김종직에게 개인적인 감정이 있었다. 유자광이 경상도관찰사로 함양에 갔다가 학사루에 자신이 쓴 시를 걸어두었다. 함양군수 김종직이 소인의 글이라며 현판을 떼 불살라 버렸다. 이극돈은 유자광에게 김일손이 세조 때 드러나서는 안 될 궁중비사를 사초에 적었다며 이를 말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세조와 죽은 의경세자의 후실 즉 세조의 두 며느리, 윤씨와 권귀인과 관계된 내용이었다. 김일손은 사초에 윤씨에 대해서는 ‘세조는 소훈 윤씨에게 많은 전민과 가사를 내렸고 항상 어가가 따랐다’라고 썼고 권귀인에 대해서는 ‘권귀인은 바로 덕종의 후궁인데 세조께서 일찍이 부르셨는데도 분부를 받들지 아니했다’고 기록했다. 덕종은 의경세자다.

연산군은 불같이 화를 냈다. 세조가 며느리를 탐했다는 말이 아닌가. 사관이 무슨 근거로 이런 일을 사초에 함부로 쓰는가, 이것은 왕권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다. 그렇치 않아도 단종 제사, 소릉복위 등을 언급하며 눈엣가시 같았던 김일손이었다. 수차례 벼슬을 내려도 불응하던 괘씸한 자가 아니던가.
 

김일손이 무오사화때 체포됐던 함양청계서원.

김일손은 고향 청도에서 어머니의 상을 치른 뒤 함양의 청계정사에 내려가 있다가 의금부에 끌려왔다. 심문과정에서 김종직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썼고 김일손이 이를 사초에 실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조의제문은 숙부 항우에게 죽은 초나라 회왕, 즉 의제의 죽음을 조문한다는 내용이다. 사실상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고 죽인 세조를 우회적으로 비판한 내용이다. 일이 커졌다. 훈구세력은 마침내 ‘조의제문’에서 사림을 집단학살할 명분을 찾았다. 김일손은 잡혀 온 지 20일 만에 능지처참당했다. 그의 나이 39세였다. 권오복 이목 허반 권경유 등이 죽었고 정여창 김굉필 박한주 임희재 등 김종직의 제자들은 귀양을 갔다. 김종직은 부관참시 당했다.
 

청도군 화양읍 백곡마을에 있는 탁영종택.

△김일손의 유적

무오사화 이후 김일손은 ‘직필의 사표’로 추앙받았다. 우암 송시열은 ‘탁영집’ 서문에서 “사필을 잡은 사관은 오직 직필하는 것만이 그 직분이 아니겠는가. 선생은 우주간의 간기를 타고 나시어 그 태어남이 우연이 아닌데 그 죽음을 어찌 사람이 능히 할 수 있었겠는가.” 김일손은 중종반정 이후 신원됐다. 죽은 지 300년이 지난 1830년(순조 30)에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추증됐으며 6년 뒤 ‘문민(文愍)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김일손이 강학했던 운계정사.

자계서원은 청도군 이서면 서원리에 있다. 자계사에서 1578년(선조 11) 자계서원으로 승원했으며 1661년(현종 2) 왕으로부터 편액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됐다. 운계정사가 자리했던 서원의 동재 옆에는 김일손이 직접 심었다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자리하고 있다. 1615년부터 조부 김극일과 장조카 김대유를 함께 제향하고 있다. 김극일과 김일손, 김대유는 청도김씨 삼현공파 파조다.

탁영종택 에는 김일손 내외를 모시는 불천위(不遷位, 사당에 영구히 두고 모시는 것이 허락된 신위) 부조묘가 있다. 당초에는 사불천위(私不遷位)였으나 1661년 자계서원이 사액되면서 국불천위(國不遷位)로 사승됐다.

함양 청계서원은 김일손이 정여창을 찾아와 한동안 공부하던 청계정사 옛터에 세운 서원이다.김일손은 무오사화가 났을 때 이곳에 있다가 의금부에 잡혀갔다. 정여창을 제향하는 남계서원과 이웃해 있다. 탁영김 선생 유허비와 사당인 청계사가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글·사진=김동완 작가·한국국학진흥원 집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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