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어졌던 사찰종이의 맥 이어

외발물질하는 영담스님, 뒤에 紙壽千年서체는 무위당 장일순선생글씨

1984년부터 나는 기존의 발과 발틀을 벗어나서 종이 작업을 자유롭게 하기 시작했다.

망창을 이용해서 우둘 종이, 오목 종이, 물방울 종이, 물결 종이, 구멍 종이 등 다양한 종이를 만들었다. 이런 행위는 아마도 나의 어린 시절의 추억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발상이라고 본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우리 집에 실성한 할아버지 한 분이 얹혀 지내게 됐다. 한의사인 아버지께서 침과 약으로 치료하자 안정을 찾은 할아버지는 양평 무내미(지금의 문호리)에서 종이 뜨던 통꾼(紙匠)이었다는 것이다.

어느 해 큰 물난리가 나서 집과 처자식을 몽땅 잃고 자신만 살아남아 실성한 채로 떠돌아다니다가 우리 집에 얹혀 지내게 된 분이다.

당시 아버님은 첩약 싸는 종이를 순지(닥종이)를 사용했는데, 약탕기 뚜껑을 순지로 봉해서 약을 달이면 습도조절이 잘되어 약이 잘 다려진다고 했다.

정이월이면 순지 서너 동이(한 동이는 종이 2,000장)를 수레에 실어 왔고, 온 식구가 첩약지를 도련 하고 약 봉투를 만들곤 했다.

1987년 영담스님이 만든 최고급 인경지로 정부에서 간행한 ‘직지’

도련 하고 남은 자투리 종이로는 할머니와 어머니가 물에 풀어서 종이 접시, 종이함 등 생활도구를 만들어 사용했다. 아버지께서는 종이 뜨는 간단한 시설을 마련해서 할아버지가 종이를 뜨게 했다. 아마도 한의원에서 필요한 일 년치 종이를 마련할 겸 할아버지에게 삶의 활로를 찾아주려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종이 만드는 데 지심이었다,

철이 없는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할아버지가 닥을 삶아서 방망이질 해 놓은 지료를 몰래 퍼다가 흙담에 던지기를 하며 놀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공을 들인 귀한 섬유인데 너무 철이 없던 악동이었다. 또한 아이들과 딱지치기를 많이 하였는데 나는 두꺼운 장지로 딱지를 접어 나가서 아이들의 딱지를 다 따곤 했다.

최고급인경지 영담제작

양지 딱지는 팔딱팔딱 잘 뒤집어 지지만 내 장지딱지는 한번 광풍을 일으키고 땅바닥에 착 달라붙으면 쉽게 일으킬 수 없었기에 아이들 딱지를 다 따곤 했다. 닥종이를 오리고 붙여서 연을 만들어 연날리기 하고 엽전 구멍에 종이를 넣어 빼서 제기술을 만들어 제기 차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다양한 종이를 만드는 발상을 일으켰다고 생각한다.

1983년, 나는 운문승가대학을 나와 남양주 수동골에 지곡서당 청명 임창순 선생님 슬하에서 한학 공부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동국대학교 총장 황수영 박사님에게 취미로 만든 전통 한지 몇 장을 드리게 된 것이 인연이 되어 동국대학교 개교 80주년 기념으로 불국사 석가탑에서 나온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신수화엄경’을 영인할 한지를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듣게 됐다.

황 박사님 말씀이 전국 어디를 찾아 헤매도 이런 진짜 한지를 만날 수 없었다면서 불사(佛事)하는 마음으로 종이를 만들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984년 12월, 원주시 단구동 원주 천변에 지장(紙匠 ) 두 분과 종이 건조장 한 분과 티 고르는 아주머니 여섯 분을 고용하여 전통한지연구소를 차리고 종이제작에 들어가게 됐다.

불경 책을 영인할 종이이기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온 정성을 다해 백닥 음양합지로 외발 종이작업을 하여 1만 여장의 최고급 닥종이를 만들어 동국대학교에 납품했다.

황 총장님은 기뻐하시며 나에게 맥이 끊어진 사찰종이 복원의 원력을 갖도록 곡진히 권하셨다. 나는 흔쾌히 일하면서 수행한다는 정신으로 사찰종이 재현과 우리 전통종이 질의 맥을 찾아서 전통 한지 연구에 뛰어들게 됐다. 1986년도에는 제11회 전승공예대전에 오색 한지로 특별상을 받았고, 연말 청와대 대통령초청 문화예술공로인 리셉션에도 초대 받았다.

또한 문공부로부터 ‘직지’와 ‘왕오천축국전’, ‘월인천강지곡’등의 국보급 영인본 종이제작을 주문받아 최고질의 백면지를 만들어서 정부에 납품했다. 공교롭게도 내가 종이를 본격적으로 만들자마자 동국대학교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보급 영인본 불경책지를 주문받았던 것은 시절인연의 절묘한 계합이요 일생일대의 영광스러운 일이다.

1987년 영담스님이 만든 최고급닥종이에 정부에서 간행한 왕오천축국전

△전통 한지 질의 맥은 사찰의 스님들이 지켜왔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종이는 지금으로부터 1,268전인 신라 경덕왕14년(755년)에 연기법사 스님에 의해 만들어지고 사경 된 순닥종이로서 국보로 지정된 ‘신라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이다. 이 ‘신라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은 자색(紫色) 닥종이에 금은니(金銀泥)로 채색된 표지의 변상도가 유명한데, 비범한 솜씨의 회화적 특징을 보여주는 통일신라 시대의 연대가 확실한 중요한 자료이다.

이 종이는 정성껏 도침한 종이로서 곱고 조직이 단단한 닥종이 이며 1979년 국보 제196호로 지정되어 현재 삼성리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의 발문에 보면, 종이를 만들기 위해 닥나무를 기르고 종이를 만드는 과정에서부터 온갖 정성을 기울였음이 잘 표현되어 있다.

1987년 영담스님이 만든 최고급인경지로 정부에서 간행한 월인천강지곡

특히 닥나무에 향수를 주어 길렀다는 표현과 최고 기술의 紙匠들의 이름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점은 우리나라 제지사(制紙史)에도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물과 불에 가장 약한 종이가 천 년 성상을 견디며 현존하고 있으니 그 강인한 닥종이의 내구력(耐久力)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고려 시대로 내려오면서 불경을 사경(寫經)하는 행위는 수행의 큰 방편이었으며 불경 책을 널리 보급하는 공덕경으로 종이에 직접 경전을 쓰는 필사(筆寫)의 공덕은 높이 찬양 됐다.

따라서 사경을 위한 종이의 필요성은 스님들로 하여금 최고질의 종이를 만들어 내게 하였으며 부처님의 말씀인 법을 담는 그릇으로서 법장‘法藏’ 인 닥종이에 기울이는 스님들의 정성은 지극했다. 스님들은 종이를 만들며 어떻게 하면 오래 보존하고 좀이 안 먹게 할 수 있을까 고심하여 닥섬유에 꽃무릇 즙을 섞어 종이를 뜨면 좀이 안 먹는다는 방법도 연구해 내었다. 사찰종이는 당시 제지술의 최고 수준이었기에 그 종이에 그려진 고려불화와 고려사경품은 오늘날까지도 생생하게 남아서 국보로 보존, 전시되고 있는 것이다.

국보제196호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주본의 발문부분

그러나 조선 시대로 넘어오면서 억불숭유의 시대,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종이 만드는 기술이 있고 닥나무밭을 소유하고 있는 이유로 사찰의 스님들은 나라에 부역을 당하게 되고 탐관오리들의 부당한 착복과 지방 호족들의 노동력 착취에 시달리게 됐다. 자발적 신심과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 오던 사찰제지의 전통은 지역(紙役)의 가중(加重)으로 훼손되고 승려들의 인권은 무참히 짓밟혔다. 고통이 극에 달하자 절에서는 종이 뜨는 도구를 치우고 닥나무 밭에서 닥나무를 뽑아 버리며 젊은 스님들은 종이 뜨는 기술을 전수하지 않고 부역을 피해 절을 떠나는 경우가 허다했다.

전국적으로 빈대 때문에 망했다는 절이 수 십 군데인데 이는 거의 다 종이 부역과 연관이 있는 것이다.

국보제196호 신라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표지변상도

사찰은 자체 내의 필요에 의해서 종이 생산이 요긴하였기에 절에서 종이 뜨는 일은 다반사처럼 일상화되어 있었다. 지금도 큰 절에 가면 보이는 구시통(木槽, 가운데를 파서 밑에 물구멍이 있는 구유 모양의 통나무 紙槽)은 닥섬유를 삶아 흐르는 물에 담그어 세척과 자연 표백하던 도구이며 통도사에 남아 있는 석구는 소가 빙빙 돌며 닥섬유를 고해하던 돌방아이다.

조선 세조10년(1461년)에 ‘간경도감’이 설치되어 불경의 언해본 등이 간행되고 ‘경국대전’등 많은 전적을 대대적으로 펴내었고, 명나라로부터 조공품으로 종이를 요구받는 사례가 빈번하여 국내외적으로 종이수급을 위한 관영수공업이 조성됐다. 관 주도로 전국에 지소(紙所)를 221개나 둘 정도로 대대적인 규모였다. 그러나 관영 제지소들은 공납 등 공물체제가 혼란해지고 부패한 관료들의 부정과 횡포가 심하여 관리가 잘되지 않아서 종이수급 체계는 그야말로 크게 혼란했다. 대우도 제대로 못받고 고생을 견디다 못한 지장(紙匠)들이 지소(紙所)를 떠남으로서 관영제지소들은 문을 닫게 되고 민간제지수공업으로 넘어가게 됐다.(조선 시대 제지수공업 연구, 김삼기 참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지장승(紙匠僧)들은 승군(僧軍)으로 규합하여 구국(救國)활동을 하기도 하였으며 암암리에 사찰종이의 수요를 감당하였지만, 가렴주구의 고통에 시달린 사찰의 지장(紙匠) 승려들은 절을 떠나게 되었으니 빈 절에 버려진 닥섬유 찌꺼기들은 보온성이 좋아서 빈대가 서식하기에 알맞은 조건이 되어 자연히 종이 뜨던 절은 빈대가 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불과 200여 년 전의 일이건만, 내가 종이를 시작할 무렵인 1980년에는 전국 어디에도 종이 만드는 사찰이 한 군데도 없었고 종이를 연구하는 스님도 한 분 없었다. 오늘날 스님들은 고생을 싫어하며 좌선 정진만을 최고의 수행인양 여기니 격세지감을 아니 느낄 수 없다. 노동의 즐거움은 살아있음을 실감 나게 하고 깨어있게 한다.

종이를 도반 삼아 종이와 함께 가는 이 길에 나는 만족한다.

영담스님 현 청도 영담한지미술관 관장, 섶마닥종이문화원 대표 닥나무에서 종이가 되기까지, 종이에서 작품이 되기까지 전 과정 마스터한 경력 45년의 지장이며 K-PAPER 연구가이다.
영담스님
현 청도 영담한지미술관 관장, 섶마닥종이문화원 대표
닥나무에서 종이가 되기까지, 종이에서 작품이 되기까지 전 과정 마스터한 경력 45년의 지장이며 K-PAPER 연구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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