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럽고 질긴 우리 종이…은근·끈기의 국민성 꼭 빼 닮아

김영담 '칠불', 145x74, 닥종이에 자연물감, 2008.
김영담 '칠불', 145x74, 닥종이에 자연물감, 2008.

닥종이가 좋았습니다. 함께 길을 걸었습니다.

닥종이는 내 유년의 추억과 함께 언제나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윤기가 흐릅니다. 만지면 만질수록 손끝에 느껴지는 감촉은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부추기고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합니다. 텅 빈 한 장의 종이처럼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그렇게 너그럽고 자유롭게 가없는 세상에 회향합니다.

-2009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초대전 ‘닥종이와 함께 純,巡,順’ 작가노트에서-
 

영담스님의 작업한 한지들

△종이 만들기에서 작품이 되기까지

내가 닥종이작업을 하다가 작가가 된 사연에는 세계적인 사진가이며 내셔날지오그래픽 편집장을 역임한 故에드워드 김(김희중) 선생님의 영향이 크다. 1987년 에드워드 김 선생님은 나를 취재 오셨고 취재과정에서 내가 작업해 놓은 별난 종이들을 보며 매우 현대적 작품이라고 놀라워하면서 그중에 한 작품을 소장하겠다고 사인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 사인을 할 줄 몰랐던 나에게 최초로 작품에 사인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당시로선 종이 값의 몇 십 배에 해당하는 금액을 작품 값으로 주신 것이 계기가 되어 작품을 하게 됐다. 이후 틈틈이 작품성 있는 작업을 하여 1989년 처음으로 원주전통한지연구소에서 작품전을 열었으며, 1993년 서울 국립중앙박물관(당시 중앙청홀) 책문화특별전에서 종이 뜨는 시연과 함께 ‘영담스님의 닥종이 작품’전시를 하게 되었다. 이때 자연물색들인 별난 종이작품 30여점이 인기가 높아서 한 장도 남김없이 다 구매자를 만났고 외국인들도 좋아했다.
 

김영담 ‘마음의 창’,  160x160, 닥섬유, 부조, 자연물색.
김영담 ‘마음의 창’, 160x160, 닥섬유, 부조, 자연물색.
김영담 ‘해인삼매’, 64x95, 닥섬유 음양.
김영담 ‘해인삼매’, 64x95, 닥섬유 음양.

닥종이를 만들다 보면 닥섬유의 부드러움과 변용성에 놀라게 된다.

어떻게 질기고 부드러우며 부드러우면서도 질긴 상반된 물성을 한 몸에 지녔을까? 닥종이에 갖가지 자연물감을 들이다보면 그 함축성, 변용성, 포용력이 뛰어남에 놀라게 된다.

쓰는 이의 의중을 읽기라도 하는 양 물감을 받아들이고 내품는 능력이 탁월할 뿐 아니라 하다가 내버려두어도 오랜 시간 경과 후에 다시 작업하는 데에 아무런 불편이 없다.

닥종이는 그 자체가 주는 자연적인 미감(美感) 뿐만 아니라 부드러우면서도 질기다는 점에서 은근과 끈기로 대변되는 우리나라 국민성을 꼭 빼어 닮았다.
 

김영담 ‘사바세계’, 김영담, 사바세계, 180x240, 닥섬유, 감물.

흰가 하면 누렇고 누런가 하면 푸른빛도 돈다. 닥껍질의 외피 안쪽에는 청태(靑苔)라는 것이 있는데, 흰 종이(白紙)를 만들려면 이 청태를 깨끗이 벗겨내야 한다.

그러니까 맨 외피인 검은 밤색의 겉껍질을 벗겨내고 그 안쪽에 청태 마저 벗겨 내야만 순수한 백닥이 되는 것이다.

닥껍질의 흰 살점을 덜 뜯기려고 칼질을 할 때, 힘의 균형을 맞추고 살포시 칼날을 들면서 긁어내야 하니 그 섬세한 작업은 고감도의 중노동이다.

그러나 이 청태를 잘 이용하면 독특한 작품을 만들 수 있으니, 푸른빛이 살짝 감도는 연한 잿빛이라고 할까 설핏 물 먹은 하늘빛이라고 할까, 매우 신령스러운 빛깔의 닥종이작품이 탄생된다. 이런 종이는 종이 자체가 작품이라는 생각 때문에 거기에 인위적으로 물감을 칠하고 뭔가를 그린다는 것이 오히려 군더더기가 된다.

완성한 닥종이 위에 다시 섬유를 떠서 덧입혀서 작업하기도 하고, 종이를 구겨서 손아귀에 넣고 매매 접었다 폈다 수 십 번 하여 닥종이를 천처럼 만들기도 한다.
 

김영담 ‘자유자재’, 96x68, 닥섬유에 애개똥풀즙.
김영담 ‘자유자재’, 96x68, 닥섬유에 애개똥풀즙.

이런 작업을 줌치 작업이라고 하며, 이 줌치작업으로 작품을 하는 경우도 있다. 닥섬유의 물성, 특히 국내 닥섬유 중에서 참닥나무의 껍질섬유와 산닥나무의 껍질섬유 그리고 삼지닥나무의 껍질섬유를 마전해 보면, 각 닥나무마다 특성이 분명하며, 그 자연 빛과 매끄러운 윤기에 놀라고 감동하게 된다.

이 미미한 아주 민감한 물성의 차이에서 매력과 아름다움을 느끼고 그 차이를 변별해 내며 각 특성을 살려 작업할 줄 아는 장인이 몇 명이나 될까?

우리의 전통종이 K-PAPER의 우수성을 살펴보면

첫 째, 질기면서도 부드럽고 부드러우면서도 질긴 양면성을 지녔다.
둘 째, 인열강도(찢어지지 않으려는 힘)가 쎄다.
셋 째, 종이수명이 천 년이상(紙壽千年) 보존된다.
넷 째, 보온성이 좋다.
다섯 째, 통풍성이 있다.
여섯 째, 신축성과 가소성이 있다.
일곱 째, 희고 윤기가 나며 가볍다.
 

김영담 ‘인간tv’, 58x30x154, 닥섬유부조, 2009.
김영담 ‘인간tv’, 58x30x154, 닥섬유부조, 2009.

이러한 우리종이의 우수한 특성은 종이 한 장의 용도를 기록용, 서화용, 인쇄용, 조각용을 넘어 관혼상제, 불교의식, 놀이문화에도 폭넓게 활용했으며 갖가지 생활용품과 건강상품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닥종이 그 자체의 물성적 특징을 작품에 활용하는 작가들이 늘고 있으며 실제로 우리 것의 뿌리를 찾아 창작에 응용하려는 현대 미술작가들에게 한지와 닥섬유는 매우 정체성 있는 표현재로 각광받고 있다.
 

영담스님의 작품하는 모습

나의 작업은 부드럽지만 질기고 은은한 천연의 맛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닥섬유의 특징을 살려서 작품으로 승화하는 것이며 특히, 종이가 되기 이전의 상태를 즐기면서 자연적인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것이다.

나는 한지와 나의 한지작업을 어머니와 화엄경에 비유한다.

모든 것을 받아들여 함축하고 포용하는 넉넉함과 오랜 시간을 인고(忍苦)하며 견뎌내는 한지의 강인한 물성이 마치 이 땅의 외유내강한 어머니들의 품성과 닮아 있고 일체와 더불어 서로 화합해 하나가 됨은 원융무애한 화엄사상과 닿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의 한지작업은 인위적인 조형의 작업이 아니라 한지라는 또 다른 정서의 감성이 마음을 만나는 것을 의미하며 마음은 이를 작품화함으로써 바로 자연과의 교감의 결과를 현현하는 것이다. 나의 작업은 무작위적이고 무목적성이 두드러지지만, 그러나 결코 작업을 하는 과정과 작품이 마무리 되는 과정을 방관하지 않고 자연스럽고 면밀하게 주도하며 깨어있음으로 일관하고 있다.
 

영담스님
현 청도 영담한지미술관 관장, 섶마닥종이문화원 대표
닥나무에서 종이가 되기까지, 종이에서 작품이 되기까지 전 과정 마스터한 경력 45년의 지장이며 K-PAPER 연구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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