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정 세력에 쓴소리 마다치 않고 처절한 피바람 속 충절 지켜

경산시 하양읍 부호리에 있는 금호서원(琴湖書院,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49호).
경산시 하양읍 부호리에 있는 금호서원(琴湖書院,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49호).

△계유정란의 피바람 속에서 살아남은 허후

1453년(단종1) 10월 10일, 수양대군의 칼부림이 시작됐다. 좌의정 김종서가 수양대군의 기습을 받아 죽고 영의정 황보인과 병조판서 조극관 이조판서 민신 등이 입궐하다가 궁문에서 철퇴를 맞아 죽었다.

의정부 좌참찬 허후(許후, 미상~1453)는 계유정난의 피바람 속에서 살아남았다. 허후의 호는 일영(一寧) 시호는 정간(貞簡), 본관은 하양이다. 세종과 문종, 단종에 걸쳐 좌부승지 예조판서 우참찬을 지냈다. 아버지는 문경공(文敬公) 경암(敬庵) 좌의정 허조(許稠)이며 어머니는 대사헌 박경의 딸이다.

허후는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세종대에 좌부승지 예조판서에 올랐으며 문종대에 들어와서 우참찬에 임명돼 김종서 정인지와 함께 ‘고려사’ 편찬에 참여했다. 문종이 승하할 때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와 함께 고명을 받들어 어린 임금 단종을 보좌했다. 그는 이른바 ‘고명대신파’였다. 수양대군의 편에 서서 정변을 주도한 ‘대군파’들이 살려둘 리가 없었는데 그는 살아남았다.

그가 ‘살생부(殺生簿)’에서 빠진 것은 수양대군이 고명사은사로 명나라로 갈 때 했던 진언 때문이다. 단종 즉위년 9월, 수양대군이 고명사은사로 명나라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허후는 수양대군을 만났다. “지금 임금이 어리며 나라가 혼란스러워 대신들이 왕을 따르지 않고 백성들의 마음도 안정되지 못합니다. 대군께서 나라의 기둥이거늘 이 시국에 명나라로 떠나신다는 말입니까” 하고 만류했다. 이 말이 나중에 허후를 살렸다. 수양대군은 허후의 마음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었다. 그렇지 않더라도 단종의 측근 중에서 인품이 있는 중신 한 명 정도는 품고 싶었다. 수양은 명나라로 떠나기 전 자신에게 나라 걱정을 하던 허후를 떠올리며 살생부에서 그의 이름을 뺐다.
 

경산시 하양읍에 있는 허후 허조 부자 정충각.

허후는 원칙주의자였다. 강직하고 곧은 성격이 아버지 허조를 닮았다. 세종 때의 일이다. 허후는 왕의 비서인 승지였다. 세종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이 악공樂工의 딸, 기녀를 첩으로 삼았다. 세종이 이를 허락했다. 허후는 단호히 말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아들을 옳은 방향으로 가르쳐 불의에 빠져들게 하지 않게 한다 하였사온데 마음대로 불의를 감행하고 음란한 행동을 하는 것은 방관한다면 왕이 스스로 불의를 저지르는 것입니다”라며 따지고 들었다. 결국 세종은 ‘이미 허락해놓고 즉시 버리라고 명한다는 것은 내 차마 하지 못하겠다. 앞으로 생각해 보겠다’며 물러섰다. 한번 뱉은 말을 거둬들일 수 없으니 아비의 입장, 왕의 체면도 좀 봐달라는 뜻이었다.
 

정충각에 핀 목백일홍.

△살아 있는 것도 족하거늘 고기를 먹겠습니까

피바람이 그친 뒤 계유정난 성공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렸다. 정난으로 단종을 무력화 시킨 수양대군은 영의정에다 주요 판서 자리를 몇 개씩이나 차지하며 국정의 전권을 틀어쥐고 있었다. 술이 돌고 풍악이 울렸다. 누군가의 말끝에 재상 정인지와 한확 등이 손뼉을 치고 기뻐하며 웃었다. 허후는 내내 우울한 낯빛을 드러내며 고기를 먹지 않았다. 고기가 죽은 선배 동료들의 살점 같았다. 수양대군이 왜 고기를 먹지 않느냐고 물었으므로 집안에 제사가 있는 날이라고 핑계를 댔다. 수양은 허후의 속내를 짐작했지만 더 이상 따지지도 묻지도 않았다.

얼마 뒤 김종서와 황보인의 머리를 효시하고 그 자손을 죽이라는 명이 떨어졌다. 왕명이었지만 수양대군이 배후에 있음을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었다. 허후가 나섰다. 목숨을 내건 진언이었다. “이 사람들이 무슨 큰 죄인이라고 목을 내걸어 보이며 처자식을 죽이기까지 한다는 말입니까. 김종서는 저와 교류가 소원하여 그 마음을 잘 알지 못하지만, 황보인이라면 그 사람됨을 자세히 알고 있으니 모반할 리가 만무합니다”라며 지나친 처벌에 반대했다.

수양대군이 노기를 띠며 말했다.
“그대가 그날( 계유정난 성공 축하연회) 고기를 먹지 않았던 것은 그 뜻이 진실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구나.”

허후가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조정의 원로가 같은 날 다 죽었습니다. 저는 살아 있는 것으로도 족하거늘 차마 고기를 먹겠습니까”
허후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수양대군은 크게 노했으나 그의 품성과 능력을 아껴 죽이지 않았다. 허후의 이 말은 정난 주도세력의 엄청난 반발을 샀다. 이계전이 끊임없이 탄핵했다. 결국 허후는 거제도로 유배를 떠났다. 그러나 명줄을 노리는 칼날을 피해 가지는 못했다. 허후는 결국 유배지에서 교살당했다. 축하연회 이야기는 남효온이 쓴 ‘추강집’ ‘허후전’을 다듬어 정리했다. 허후의 죽음에 대해서는 다른 이야기도 있다. 하양허씨 종친회가 발간한 ‘정간공허후선생 생애와 사상’이라는 책자에 소개된 ‘정간공 허후선생 실기’ 중 일부분이다.

정인지가 백관을 대동하여 어전에서 안평대군을 사사코자 주청하자 공(허후)은 상감에게 좌의정 정인지를 삭탈관직하옵시고 금부에 가두심이 지당한가 하오! 인지는 신자(신하)로 지친을 모함함은 관기를 문란케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결국 공(허후)은 거제도에 귀양 가고 우의정 정분, 평안도 관찰사 조수량, 안평대군은 귀양지에서 사약을 내리고 공께서도 1456년* 11월11일 교형에 처해졌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에는 1453년 사망으로 돼 있음.

허조는 허위의 아들이다. 할아버지 허조(許稠, 1369~1439)와 한글 이름이 같다. 자는 사가(思暇), 호는 응천(凝川)이다. 허조는 문과에 급제해 규장각에 선발됐고 집현전 수찬을 지냈다. 여동생이 사육신의 한 사람인 이개와 결혼해 허조와 이개는 처남매부간이다. 허조의 큰아들 연령이 김문기의 딸과 결혼해 김문기와는 사돈간이다. 허조를 중심으로 놓고 보면 아버지와 사돈, 매부가 단종 복위에 나섰다가 모두 변을 당했다.

허조는 아버지 허후가 사사되자 단종복위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등 사육신이 모두 조부인 경암 허조의 문하생이었다. 허후의 문상을 온 선배 동료들과 나랏일을 걱정했다. 자연스럽게 단종 복위가 거론됐고 상가는 단종복위운동의 거점이 됐다. 그 자리에 있던 김질이 배신해 고변했다.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가 차례로 문초를 받았다. 이들이 차례로 잡혀가자 허조는 차고 있던 칼을 꺼내 목을 찔러 자결했다. 나중에 부제학에 증직됐다. 왕위에 올랐던 수양대군(세조)은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 하며 시신을 거열하고 목을 효수했다. 허조의 아들 연령과 구령도 순절했다. 3대가 계유정난으로 희생된 것이다. 뒤에 부제학에 증직됐다.
 

허후의 아버지이며 허조의 할아버지인 경암 허조의 위패를 모신 금오서원.

△허후·허조의 유적지

허후와 허조는 1458년(세조4) 동학사 숙모전 단종묘정에 배향됐다. 1791년(정조 15)에 장능 단종충신단에 배식됐다. 허조의 아들 연령과 구령은 별단에 배향됐다.

1814년(순조 14년) 경산시 하양읍 부호리 고향마을 앞에 정충각(旌忠閣)을 세웠다. ‘허후 허조부자 정충각’이라 부른다. 정충각은 대구와 경산을 잇는 대경로 하양읍 부호리 구간 대로변에 있다. 대경로에서 경일대학교와 호산대학교 입구로 꺾어지는 지점에 있는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의 팔작지붕집이다.
 

정충각 내부에 있는 허후의 정려문 현판.
정충각 내부에 있는 허후의 정려문 현판.

비각 네면에는 벽체와 살창을 세웠다. 아래쪽에는 벽체를 설치하고 위에는 살창을 둘러 안이 들여다보이게 했다. 기둥은 모두 원주를 썼고 처마 네면 끝에는 활주를 세워 추녀를 받들었다. 정충각 안에 비는 없고 정면에 ‘충신 숭록대부 행 의정부좌참찬 증익 정간공 허후지문 忠信崇祿大夫行義政府左參贊增益貞簡公許후之門’이라고 쓴 허후의 정려현판이 있고 왼쪽에 ‘충신 통정대부 홍문관부제학 겸 지제교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행 통훈대부 집현전수찬 허조지문忠信通政大夫弘文館副提學兼 知製敎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行通訓大夫集賢殿修撰許조之門’이라는 허조의 현판이 있다.

금호서원은 정충각이 있는 도로에서 동북쪽에 자리 잡은 부호리 마을 안에 들어서면 있다. 허후의 아버지이며 손자 허조의 할아버지인 경암 허조(許稠)를 제향하는 곳이다. 정조 14년 금호서원으로 사액을 받았으나 대원군 서원철폐령 때 훼철됐다가 1913년 복원됐다. 외삼문은 준도문, 정면에 강당인 수교당이 자리 잡았다. 수교당은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팔작지붕집이다. 왼쪽에 4칸 규모의 맛배지붕집 성경재를 뒀으며 오른쪽 경사지에 사당인 경덕사를 뒀다. 금락리에 있는 금호서원은 허조 허위 허조 3대를 제향하는 서원이다. 숙종 10년 금락리에 세웠다가 사라리로 이건했으며 정조 14년에 사액을 받았다가 훼철된 뒤 복원하면서 부호리와 금락리 2곳에 각각 같은 이름의 서원을 세웠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글·사진=김동완 작가·한국국학진흥원 집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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