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집터서 세 명의 현인 태어날 것"…'세 번째 귀인' 언제 나올까

필자는 ‘풍수썰전’ 기고에서 경주 양동마을 풍수에 대해 다룬 적 있다. 그때는 양동마을 전체를 대상으로 풍수적 특성을 설명했다. 이에 이번 회는 월성 손씨 대종가이자 마을의 풍수적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서백당(書百堂)을 알아본다.

‘손동만 가옥’, ‘송첨 고택’, ‘월성 손씨 대종가’ 등 여러 이름이 붙지만, 그래도 귀에 익숙한 이름은 서백당이다. 마을의 손씨 입향조인 손소(孫昭·1433~1484)가 조선 세조 5년(1459)에 양동 처가 마을에 정착하면서 지은 집으로 전한다.

서백당의 건축학적 의의는 우리나라의 살림집 중 가장 오래된 집이다. 충남 아산의 맹씨 행단이 건축 연도는 더 오래되었지만, 그곳은 부속건물이 다 없어지고 안채만 일부 남아 있다. 또 사람도 살지 않는다. 그래서 살림집으로서 온전한 모습이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주택은 이곳 서백당이다.

한편 풍수학자인 필자에게는 서백당의 터에 더 눈길이 간다. 이곳은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성리학자인 손중돈(孫仲暾, 1463~1529)과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이라는 걸출한 두 인물이 태어난 집이기 때문이다.
 

건너편 능선에서 바라본 서백당의 풍수 조감도

가문에는 ‘이 집터에서 세 명의 현인이 탄생할 것’이라는 전설이 이어져 온다. 그래서 손씨 집안에서는 시집간 딸이 몸을 풀러 친정에 와도 받아주지 않는 관습이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전국의 여느 고택에 비해 외부인의 방문에 민감한 편이기도 하다.

그럼 서백당이 걸출한 두 명의 현인을 배출할 만큼 풍수적 역량이 있는 터인지 살펴보자. 먼저 서백당의 풍수적 맥락을 알기 위해 맞은편 능선(무첨당 현무봉)에 올라가 본다. 여기에서는 설창산에서 서백당으로 이어지는 산줄기(來龍)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설창산에서 뻗어 내린 내룡이 몇 번의 방향을 바꾸며 진행한다. 기복(起伏)과 굴곡(屈曲) 변화를 갖춘 생룡(生龍)의 모습이다. 내룡이 진행하다가 서백당 뒤에서 봉긋한 봉우리를 일으킨다. 서백당의 현무봉이다. 높지 않지만, 씨름선수 종아리처럼 통통하고 옹골차다. 대단한 힘이 느껴진다.

현무봉 뒤편에는 귀성(鬼星)이 있다. 귀성은 땅 기운의 방향을 90° 바꿔 주는 바위나 흙무더기를 말한다. 이곳 귀성의 모습은 오랜 기간 묵혀 둔 밭뙈기 형태로 남아 있다. 그 너머로는 낙산(樂山)이 받치고 있다. 낙산은 현무를 뒤에서 보호함과 동시에 귀성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한 번 더 받쳐주는 산이다. 낙산의 세 형태(特樂·借樂·虛樂) 중 옆으로 길게 펼쳐진 차낙의 형태다.

다시 현무봉에 한 번 더 주목하자. 단순하게 보면 현무봉이 하나인데, 하나가 아니다. 직접 밟고 자세히 보면 현무봉이 세 개다. 현무봉이 안채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다시 두 번의 미세한 봉우리를 솟구치는 것이다. 풍수의 형지세축(形止勢縮)의 모습이다.

아무리 기복·굴곡 변화가 아름다운 생룡이어도 ‘혈을 맺을 자격’이 있을 뿐이지 ‘혈을 맺을 준비’가 되지 않으면 혈을 맺을 수 없다. 단지 생룡이라 해서 혈을 맺을 준비가 안 된 곳에 터를 잡으면 자칫 과룡지처(過龍之處)가 된다. 땅 기운이 머물지 않고 계속 지나가는 자리란 뜻이다.

이때 멀리 달려온 땅 기운이 멈추어 혈을 맺을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지표면에 흔적을 보이는데 이것이 형지세축이다. 터와 인접한 뒤에서 기복(起伏)하는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의 간격이 좁아지고, 봉우리의 크기도 또한 점점 줄어든다. 그래서 풍수 현장에서는 터 바로 뒤에 몇 개의 미세한 봉우리(泡)가 있는지를 찾게 된다.

이곳의 현무봉이 두 번의 미세한 봉우리를 세운 것은 설창산 땅 기운이 드디어 제 자리를 찾아 혈을 맺을 준비를 하는 모습이다. 이 모습은 음택이든 양택이든 아주 미세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오랜 기간의 현장 경험이 필요하다.
 

전순이 지각을 받치고 반시계방향으로 크게 휘어져 뻗어 내린다. 그래서 전순과 지각 사이에 미세한 골짜기도 있다.

혈을 맺을 준비를 마친 땅 기운은 서백당 안채로 정확히 이어진다. 바로 안채에서 두 명의 인물이 탄생한 것이다. 안채에서 혈을 맺고 남은 땅 기운(餘氣)은 크게 반시계 방향(右旋)으로 뻗어내려 둔덕 아래 가랍집까지 이어진다. 풍수의 전순의 모습이다.

이때 전순 바깥쪽(오른쪽)으로 지각(요도)이 크게 받치고 있다. 전순이 반시계 방향으로 크게 휘어져 갈 때 지게 작대기처럼 받쳐주고 있다. 이로써 혈장(마당 지점)과 전순이 산사면 아래 방향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안정적일 수 있다.

단 전순이 산수동거(山水同去)인 점은 아쉽다. 전순이 우측에서 흘러오는 골짜기 물을 따라 서백당 왼쪽으로 휘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왕 휘어질 바에 골짜기 오른쪽으로 휘어져 역수(逆水)의 기능을 했다면 풍수적 품격이 한층 더 높아졌을 것이다.

한편 서백당 터는 여느 고택 터와 사뭇 다른 점이 있다. 우리나라 고택의 대부분은 산의 말단부, 즉 산이 끝나고 평지가 시작되는 지점에 자리한 경우가 많다. 전형적인 배산임수 입지다. 그런데 서백당은 완전히 산줄기 위를 타고 있다. 그것도 제법 높다.

엄밀히 보면 서백당 터는 묏자리에 가깝다. 본래 묏자리로 쓸 수 있는 자리에 집터로 만든 독특한 형태다. 이 점은 서백당이 가진 또 하나의 풍수적 의의다.

건물 구성에서 특징적인 것은 서백당 영역에서 제일 앞에 있는 행랑채가 가림막 역할인 듯한 구조다. 우리나라 고택들은 단정한 봉우리가 잘 보이도록 마당과 대문을 설치했다.

반대로 험상궂은 봉우리나 바위 절벽이 보일 때는 건물이나 나무를 심어 가렸다(차폐, 遮蔽). 대표적으로 안동 하회마을 만송림이 그렇다. 마을에서 험상궂은 부용대 바위 절벽을 가리려고 소나무 숲을 만든 것이다.

서백당 행랑채 대문을 통해 본 앞산의 형태가 그리 예쁘지 않다. 오히려 가리고 싶은 정도다. 건축주인 손소도 필자와 생각이 다르지 않았던지 행랑채를 오히려 가림막으로 삼았다.

그리고 뒤의 살림채 방향을 아예 남동향으로 틀어 귀인을 닮은 성주봉으로 향했다. 설창산 땅 기운을 받아 성주봉을 닮은 귀인을 배출하고자 하는 서백당 조영자의 풍수적 의지로 해석된다.
 

박성대 대구가톨릭대 지리학과 대학원 겸임교수·풍수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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