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죽음 막지 못한 恨 '서연일기'에 비화 남겨

청암정과 충재.

△살얼음 정국의 판도라 상자, 영남만인소 촉발하다

권정침(權正忱)의 ‘서연일기’는 살얼음 정국의 판도라 상자였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임오화변(壬午禍變)’의 현장을 기록해뒀기 때문이다. 상자가 열리는 순간 정국은 피바람의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 들 것이었다. ‘서연일기(書筵日記)’는 사도세자의 스승인 평암 권정침이 사도세자가 죽은 뒤 고향 봉화에 내려와 쓴 사도세자 강연 일지다. 왕의 학습은 경연(經筵), 세자의 학습은 서연이라고 한다.

일기를 쓸 당시 그는 설서 겸 춘추관 기사관이었다. 설서는 세자시강원 소속 정 7품 관직으로 세자에게 경사와 도의를 가르치는 세자의 스승이다. 엄정한 심사를 통해 선발되고 나중에 청직으로 진출하는 엘리트 보직이다. 춘추관 기사관은 국왕의 측근에서 매일 매일의 정사를 기록하는 일을 담당하는 비중 있는 보직이다. 권정침은 서연일기에 세자에게 강연한 내용과 세자와 주고받은 문답 등을 기록하는 한편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죽어갈 때 일어난 일들을 자세하게 기록했다. 엄청난 폭발력을 가진 시한폭탄이었다.

처음 판도라 상자를 연 이는 영남유생 이도현·이응원 부자였다. 1776년 정조 즉위 원년, 이도현 부자는 사도세자 설원소(雪怨疏)를 지어 올렸다. 이도현은 태종의 일곱째 아들 온녕군의 11세손으로 왕가의 종친이다. 그는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고 역적을 처벌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가 처형당했다. 역적은 두말할 것도 없이 사도를 죽음으로 몰아간 노론이었다. 시기가 좋지 않았다. 정조 즉위 5개월에 사도세자의 죽음을 언급하며 노론을 처벌하라는 것은 정조에게도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정조는 노론의 높고 두터운 장벽에 둘러싸여 있었다.

이도현 부자가 ‘설원소’를 올린 근거는 권정침의 ‘서연일기’다. 서연일기 내용에 근거해, 현명하고 효성스럽고 학식마저 뛰어난 세자를 역적들이 죽음에 이르게 했으니 이를 바로잡고 역적들을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연일기에는 4월 18일부터 5월 21일에 이르기까지 날마다 ‘역경’, ‘강목’을 강독했다는 내용과 사도세자가 고대 중국의 요임금과 순임금, 우왕과 탕왕이 이어받은 도통(道統)에 대해 질문한 것이 기록돼 있었다. 이응원은 이렇듯 사도세자의 자질이 고상하고 식견이 명철한데 역적무리들의 흉계를 꾸며 세자를 죽음으로 몰았다고 주장했다.

이도현의 설원소 이후 26년이 지난 1792년(정조 16) 윤4월 27일, ‘서연일기’가 주목을 받았다. 승정원에 ‘특별한’ 상소가 접수됐는데 그 상소에서 권정침의 서연일기가 거론됐다. 사도세자 서거 30주기를 맞아 사도세자의 억울함 죽음을 신원하자며 영남지역 유생 1만57명이 연명한 상소였다. ‘제1차 영남만인소’다. 연명한 인원으로 보나 상소의 규격으로 보나 조선이 개국한 이래 처음 있는 매머드급 상소였다. 상소문은 총길이 95.5m, 폭 1.11m나 됐다. 한지 130장에 장당 80명의 유생이 수결한 두루마리 형태였다. 상소는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고 책임자를 찾아내 처벌하자는 내용이었다.

권정침이 태어났던 봉화 닭실마을 표지석.

△영남만인소, 남인 부활의 길 열다

영남만인소는 정조의 ‘선물’에 대한 보답 성격이 강했다. 영남만인소가 접수되기 4년 전인 1788년, 영조는 남인 채제공을 우의정에 발탁했다. 영조 치세에는 남인계열에서 단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던 정승자리다. 채제공의 발탁은 갑술환국 이후 100년 가까이 시골의 한미한 선비로 지내야 했던 영남 남인들에게 길을 열어 준다는 뜻이며 정권을 독점한 노론 벽파에 대한 견제를 의미하는 정조의 정치적 승부수였다. 정조는 이어 신라 시조 박혁거세를 모신 경주 숭덕전과 도산·옥산서원에 제물과 제문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고 경주 옥산서원 세심대에서 지방초시를, 안동 도산서원에서 영남지역 유생들만 참가하는 영남별시를 열었다. 영남지역 유생을 정치적 동지로 받아들이겠다는 정조의 신호로 받아들였다.

정조가 영남 남인들에게 길을 열어주자 1만여 명의 영남유생들이 정조에게 힘을 보태주기 위해 다시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상소는 영남남인에게 길을 열어준 정조에게 보내는 영남남인의 보답이었으며 노론을 향해 날린 회심의 일격이었다. 만인소로 정국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임오의리(壬午義理)를 놓고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영남 사람으로서 세자시강원에서 가까이 모신 자가 그간 많이 있었는데, 돌아와서 말하기를 ‘세자의 학문이 고명(高明)하여 강론할 때에는 대부분 정미(精微)한 곳에 나아가고 예의 바른 용모는 장엄하여 아랫사람을 접할 때에는 은의(恩義)를 곡진히 한다’고 하였으니(…)일종의 음흉하고 완악한 무리들이 세자의 가차 없는 사색(辭色)에 남몰래 두려운 마음을 품고 이에 조정의 권력을 잡은 당여로서 비밀리에 국가의 근본을 요동시키려는 계책을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음모를 빚어내는 것은 귀신도 헤아릴 수 없었고 사람을 배치해 둔 것으로 세자의 좌우가 모두 적이 되어 오로지 속이고 과장된 거짓말로 하늘을 속이는 묘방(妙方)으로 삼아, 없는 일을 지적하여(…)”

영남만인소는 권정침의 ‘서연일기’를 근거로 학문이 고명하고 용모 준수하고 예의 바른 세자를 역적들이 흉계를 꾸며 죽음으로 몰았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역적들을 처단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서연일기’는 권정침이 죽은 지 25년 만에 영남 남인 부활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그 이후 남인의 관로 진출이 활발해졌고 남인은 정조의 정치적 동지로 성장하며 노론일색의 정국을 견제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영남남인은 100년 만에 부활했다.
 

봉화닭실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충재 권벌 입향 500주년 기념비. 권정침은 권벌의 7대 손이다.

△영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은 ‘안동 답답이’

권정침은 충재 권벌의 7세손으로 봉화 닭실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권신, 어머니는 전주류씨다. 자는 자성(子誠), 호는 평암(平庵),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이광정과 강재항문하에서 배웠다. 1757년(영조33년) 문과에 합격했다. 사관으로 추천되어 예문관 한림을 뽑는 시험인 한림소시에 응시해 합격했다. 노론 정권 아래서 남인 계열의 선비가 중앙에서 관직생활하기가 쉽지 않은 시대였다. 모친 병구환을 핑계로 사직했고 모친상을 당하여 다시 물러나면서 임명과 사직을 반복했다. 1762년 설서로 다시 돌아왔다.

권정침은 그때 사도세자를 성군으로 만들겠다는 희망을 품었다. 선현들의 가르침을 체득하여 성군이 되기를 강의했고 세자도 이를 잘 받아들여 학업 성취도가 빨랐다. 세자가 학업에 몰입하자 영조는 크게 감동하였고, 세자 또한 권정침을 매우 신임하여 강의를 다른 사람으로 바꾸지 말라고 명했다.

사제관계는 얼마 가지 않았다. 한 달 남짓한 시간이 지나자 ‘나경언의 고변사건’이 터졌다. 세자의 비행 10개 조목이 담겨 있었다. 이 일로 영조가 세자와 마주했을 때 모든 관료들이 자리를 비켜났으나 오직 권정침과 사서 임성, 한림 임덕재만이 시종했다. 세자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나경언과 대질심문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권정침이 영조 앞에 나아가 나경언을 엄히 국문하여 원통한 모함을 풀어달라고 읍소해 영조의 노여움이 약간 풀렸다. 이날의 사태는 일단 세자의 화증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결론지었다.

윤5월 13일, 한여름 땡볕 아래서 사도세자가 뒤주에 들어갔다. 영조는 휘녕전 안에 있던 모든 신하와 궁관을 쫓아냈다. 권정침은 “이와 같은 대사변에 사관이 어찌 잠시라도 현장을 떠날 수 있겠는가”라며 나가지 않았다. 권정침은 오히려 영조에게 나아가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을 흘렸다. 이는 신하의 잘못이니 세자 대신 자기를 죽여 달라고 읍소했다. 그는 세자의 스승이었던 것이다. 세자가 숨을 몰아쉬며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자 권정침은 누구도 들이지 말라는 영조의 엄명을 어기고 기어이 내의 방태열을 불러 약을 올리게 하고 한림 윤숙과 함께 세자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영조가 불같이 화를 내며 권정침을 끌어내고 육진에 정배시키라 명했다. 화가 덜 풀렸는지 다시 사형을 명했다. 권정침이 감옥에 갇혔는데 밤 삼경에 사형을 중지하라는 명이 내렸다.
 

봉화 닭실마을에 있는 청암정.

권정침은 임성과 함께 다시 세자에게 나아가 옆에서 떠나지 않고 모셨다. 세자가 덥다고 하자 부채를 올렸고 세자가 세손을 보고 싶다고 하자 진선궁에 가서 세손을 내관에게 업혀 데려왔다. 세손을 안아서 내보내고 권정침을 궐문 밖으로 내쫓았다. 권정침이 다시 궐 안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문이 굳게 닫혀 열리지 않았다. 권정침은 모자를 부수고 신발을 벗어 던지며 통곡했다. 음식을 먹지 않고 며칠을 버티다가 거의 죽음에 이르러 사람들에게 들려 나왔다. 세자는 뒤주 안에서 죽었다.

권정침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6년간 두문불출했다. 겨울에는 불을 때지 않았고 여름에는 시원함을 취하지 않았다. 이웃과 친척의 경조사에도 일체 발길을 끊었으며 손님이 찾아오면 병을 핑계로 만나지 않았다. 사도세자의 기일이 돌아오면 조복과 띠를 두르고 서쪽을 향해 통곡했다. 1766년 관직이 회복돼 영조가 세손의 사부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다. 그를 아꼈던 영조는 ‘안동 답답이(安東沓沓)’라고 부르며 길게 탄식했다.
 

권벌의 호를 따 지은 집, 충재.

1767년(영조 43) 2월 28일 58세를 일기로 고종(考終)했다. 죽을 때 숨을 몰아쉬면서 ‘세자를 신원하지 못한 것이 필생의 한’이라는 유언을 남겼다. 1789년 그의 사후 23년에 정조는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을 조성하고 친히 시문(誌文)을 지으면서 ‘궁관 권정침이 죽기를 무릅쓰고 나가지 않았다(宮官權正忱 拚死不出)’라는 글을 써넣었다. 7년 후 정조는 권정침의 증손 권재대에게 벼슬을 내렸고 권정침의 부인 임씨에게 옷감과 식료품을 내리기도 했다. 영남의 사적을 편찬할 때 권정침의 사적이 빠져 있자 생졸년(生卒年)만이라도 써넣으라고 지시했다. 권정침을 향한 애틋한 마음이었다. 권정침은 은거하는 동안에 여러 저서를 남겼는데 현손 권영하(權泳夏)가 저서와 문집을 모아 ‘평암문집’으로 출간했다.

글·사진=김동완 작가·한국국학진흥원 집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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