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회 경북일보 청송객주 문학대전

삼월 삼짇날이 지나자 제비가 왔다. 지난여름 내내 처마 밑에 보금자리를 틀고 새끼를 키우며 가정을 이루더니 머나먼 강남 길을 떠났다. 해가 바뀌면서 다시 돌아온 녀석들은 겨우내 텅 비었던 집을 부산하게 드나들며 수리한다. 문전 숙객이 머무는 동안은 시끄러운 소리와 배설물 세례를 감수 할 수밖에 없다. 집세 한 푼 내지 않고 멋대로 어질러가며 살았으니 박씨 하나 쯤 물어 줄지 모른다. 은근히 기다리며 철새를 보내고 맞는다.

명절 대목장이 서면 각설이가 난전을 편다. 신명을 얹은 가위가 철컹철컹 소리 지르자 엿판이 하얗게 모습을 드러낸다. 조각 천으로 꿰맴질한 젖 싸개를 저고리 위에 걸친 남자는 손바닥 만 한 헝겊으로 엉덩이 한쪽만 가렸다. 어긋나게 그린 눈썹과 빨갛게 칠한 입술이 들썩거리자 몸통 군데군데 달아놓은 냄비뚜껑이 호들갑을 떨고, 허리띠에 걸린 조롱박도 갈지자 리듬을 탄다. 각설이 엿장수의 등장은 할 일없는 시골난봉꾼과 아이들에게 공짜 구경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얼 씨구씨구 들어간다.’ 시끌벅적한 음향과 현란한 춤으로 좌중을 후려잡은 품바가 장타령을 늘여놓자 깡통 속의 동전도 ‘쨍그랑쨍그랑’ 추임새를 넣는다. 혼자 열을 쏟아내던 광대가 쿵 짝이 맞지 않는지 눈이 마주치는 관객을 유혹한다. 무대 앞으로 나가지 않겠다는 이와 짝을 부르는 각설이와의 실랑이가 만만치 않다.

잠자던 한량閑良의 유전자인가. 가슴이 쿵쾅거리더니 용수철처럼 몸이 튕겨나갔다. 휘몰아치는 리듬에 빨려들어 등줄기에 땀이 흘러내리도록 뛰고 흔들었다. 공연이 막바지에 이르자 품바는 깡통 속에 모인 엽전을 내게 쥐어 준다. 각설이의 짝꿍이 되어준 대가라며 큰절까지 한다. 온몸이 너덜거리도록 망가지고 엎드리며 동냥한 것을 먹고 살만한 내가 빼앗은 게 아닌가. 막무가내로 내게 건네준 것은 돈이 아니라 눈곱만한 자존심이라도 세워보려는 각설이의 몸부림일지 모른다.

단오가 지나면 어머님이 오신다. 남새밭에 널린 먹거리를 이웃에 나누어 줄 때마다 파 한 뿌리도 사먹는 자식이 눈에 밟혔던 모양이다. 맏물인 감자와 애호박, 양념에 푸성귀까지 챙겨 출가한 아들 집으로 오셨다. 이고 들고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면서 아들며느리가 사는 곳에 다다르면 호박은 멍이 들고 감자는 치여서 상처투성이다. 시들어 늘어진 푸성귀처럼 지친 육신이건만 신접살림에 보탬이 되기를 바라는 당신의 마음만은 싱싱하다.

코앞이 시장이라 질 좋은 찬거리를 싸게 구한다. 먼 길까지 가져온 생물은 이내 상해 버린다고 설득해보지만 어미의 피땀이 녹여진 결실을 자식에게 먹이고 싶은 모정은 막을 수가 없다. 곤비한 심신을 쉴 틈도 없이 어머님은 씻고 다듬고 찬거리를 만들며 며칠 동안 분주하다. 당신의 손발이 바쁘게 움직일 때마다 각설이의 장신구처럼 달캉달캉 소리를 낸다. 한차례 타령을 마치듯 숙제를 끝낸 어머님은 서둘러 거처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오가는 차비를 챙겨 드릴 때마다 밀고 당기는 실랑이가 벌어진다. 자식의 마음이 조금만이라도 전해지면 도리를 다 한 것처럼 뿌듯하다.

화장대 서랍에 낯선 봉투가 앉았다. 어머님은 가셨는데 당신의 꼬리가 길게 남았다. 아껴 모은 어머님의 용돈이 고스란히 담겼다. 드린 것보다 남겨 준 것이 더 많다. 제 밥벌이한다는 자식이 늙은 부모의 푼돈까지 빼앗은 게 아닌가. 얼굴에 불덩이를 뒤집어 쓴 것 같다. 못할 짓을 한 불편한 감정이 얼마동안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몇 번씩 되풀이된 보물찾기가 당연한 습관이 된 걸까. 어머님이 다녀가시면 뭔가 숨겨져 있을만한 곳을 살핀다. 어미에겐 새끼가 늘 애처롭고 자식에겐 연로한 부모가 걱정되는 게 사람 사는 이치인가.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부모의 즐거움이면 부모의 도움을 받는 것 또한 효를 하는 것일지 모른다. 몇날며칠 북 치고 장구 치며 장타령을 마친 어머님은 당신의 건재하심을 꼬투리로 남겨놓고 홀연히 거처로 가셨다.

품고 있던 새끼가 둥지를 떠났다. 안보면 보고 싶은 게 부모자식일 게다. 벼르고 벼르다 아들생일을 핑계로 저들의 보금자리를 찾았다. 오랜만에 만남은 신이 났지만 반가움은 잠시다. 밤새도록 컴퓨터에 앉아 일하는 아들내외의 등 뒤에서 알 수 없는 어색함이 부모자식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새벽녘에 잠깐 눈 붙인 자식들은 동트기 바쁘게 출근길을 서두른다. 천금 같은 아들의 시간을 뺏는 것 같아 가시방석이다.

왼 종일 텅 빈 집만 지킨다. 신접살림의 이곳저곳을 살피며 내 손길이 필요한 곳을 찾아보지만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 원망이라도 듣지 않을까. 가만있는 게 나을 것 같아 무료하게 시간만 죽인다.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아 서글퍼진다. 늙은 어미에게 제 발을 씻으라고 들이댄 중년아들의 망동妄動 뒤에 숨은 마음이 보물처럼 여겨진다.

아들은 집지킴이로 하루를 보낼 어미가 마음 쓰였을 게다. 백화점이라도 구경 가라며 카드와 열쇠를 쥐어주는 자식의 선심에도 심드렁하다. 내 멋대로 왔으니 문전박대하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다. 저들이 사는 모습과 얼굴이라도 보여줬으면 됐지 관심과 배려까지 기대하는 것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일지 모른다. 둥지를 떠난 생물이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게 자연의 법칙 아닌가. 섭섭한 마음이 고개를 내밀다가 요동을 친다. 동냥 온 비렁뱅이 신세가 된 것 같아 뱃속이 편치 않다. 속히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한 푼이라도 더 모으겠다고 쉴 틈 없는 자식이 눈에 밟힌다. 어미가 도울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내안에 각인된 어머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주머니를 털었다.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를 바라면서 식탁에 봉투를 올려놓았다. 삶의 이치를 멋대로 요리하는 자존심의 간사인들 어쩌랴.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아들내외도 보물을 찾은 듯 좋아해주길 바랐다. 자식에게 공밥 먹으러 온 게 아니고 도움 주러 온 것이라고 자위한다.

‘타인이 나에게 혹은 내가 나 자신이나 타인에게, 뭔가를 기대하거나 기대를 기대함으로써 하루하루 삶을 유지하는 것은 다 동냥이다.’는 중국 근대 문학의 개척자 루쉰의 글이 머리를 스친다. 부모라는 명분을 앞세워 몇 푼 남겨놓고 자신을 챙겨줄 것이라 기대하는 것도 동냥치의 모습이 아닌가. 내 것 다줘도 모자라는 새끼에게 껌 딱지처럼 붙고 싶지 않다. 자식이 품안에 있을 땐 상관처럼 호령했는데 자식이 상전이 되었으니 갈대처럼 유연하게 굽실거려야 할까. 누구에게도 치대지 않고 내 생각과 속도대로 살아가는 것만이 스스로 비렁뱅이의 삶을 벗어나는 길이리라.

먼저 치른 친구들의 조언이다. 자식 분가시키고 자주 찾아가면 각설이 신세가 된다고. 강남 갔던 제비도 돌아오길 기다린다. 처마 밑에 살아도 가족의 연이 닿으면 박씨 하나 쯤 물고 올지 누가 알겠는가. 부모는 애완견 다음 순서라는데 제비가 새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자식들 얼굴이라도 자주 보면 날짐승이 끼어 들 틈새가 없어질지 모른다고 착각한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반갑지 않은 동냥치가 얼마나 보기 싫으면 죽지도 않고 또 왔다고 덧붙인다. 찌그러진 냄비뚜껑 두드리고, 고달픈 날들을 품바장단에 토악질하며 난장판 놀음이다. 장타령 속에 사람 사는 모습이 구구절절 담겨 흥에 겨울수록 더 서럽다.

각설이를 깨달을 각(覺), 말씀 설(說), 이치 리(理)의 한자로 풀면 깨달음의 말로 이치를 알려준다는 뜻일 게다. 익살스러운 품바의 몸짓은 동냥치를 넘어 뼈 같은 진실과 피 같은 효를 가르치며 눈곱만한 자존심을 일깨운다.
 

김애자 약력
신춘문예등단(창조문학신문사. 2012)
6회 매일시니어 문학상
제6회 경북일보문학대전 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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