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선 문경 고려왕검연구소장

경북 문경시 농암면의 한 폐교에서 전통칼을 만들어 온 고려왕검연구소 이상선 소장. 이 소장은 '왕의 칼'로 전해져오는 사인검을 지난 1998년 이후 12년만인 올해 2월 21일에 제작했다.

보통 칼은 한쪽 날만 있는 도(刀)와 양날이 있는 검(劍)으로 나뉘어 구분한다.

한국은 검, 일본은 도를 사용했고 한국검이 악한 행동을 자르고 선한 정신을 키우며 정진하는 바른 행동과 인정, 자비, 친절, 효도, 정직, 희망 등을 수양하며 타인의 생명을 지키는데 사용한 활인검(活人劍)이라면 일본도는 살생을 위한 살인도(殺人刀)라 할 수 있다.

용기 있는 자의 검이 지혜로운 자의 검을 이기지 못하고, 지혜로운 자의 검이 덕 있는 자의 검을 당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바른 용기와 지혜를 갖춰야 진정한 덕인이 될 수 있고 용기와 지혜, 덕을 자랑스럽게 아는 자만이 소중한 명검을 소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도가 살인을 목적으로 발달돼 왔다면 한국검은 보검이기에 장식 위주로 발달돼 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조선시대에 생성된 사인검(四寅劍)은 인년(寅年), 인월(寅月), 인일(寅日), 인시(寅時) 즉 호랑이해, 호랑이달, 호랑이날, 호랑이시 즉 사인을 갖춰 12년만에 제작되는 검으로 왕들의 호신용 보검이다.

즉 범의 기운이 4번 겹치기 때문에 사악한 기운을 물리친다고 해서 영물로 불렸고, 왕이나 왕이 특별히 하사한 공신 등만 소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사인검의 한쪽 날에는 검에 대한 정신과 검의 자세를 기술하고 다른 면에는 270개의 성좌가 금으로 상감돼 우주의 진리와 인간의 마음 하나로 잇는 신비의 검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영물(靈物)이며 '왕의 칼'로 전해져오는 사인검은 범띠해(寅年) 음력 정월(寅月) 인일(寅日) 인시(寅時)인 지난 2월 21일 경북 문경시 농암면 한 폐교에서 전통칼을 만들어온 고려왕검연구소 이상선(李相善·57) 소장에 의해 1998년이후 12년 만에 제작됐다.

이를 위해 3개월 전부터 준비해 온 그는 2월20일 자정무렵에 검 제작을 알리는 고사를 지내고서 쌓아둔 장작에 불을 지펴 3시간가량 태웠다.

1998년에 사인검 30자루를 처음으로 만들어 본 그가 사인검을 벼리고자 12년을 별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놓칠 수 없었던 것은 당연지사이다.

그는 인시에 고온으로 달군 칼을 물에 담근 뒤 식혀 날을 단단하게 만드는 열처리를 위한 담금질에 초점을 맞췄다.

이미 3개월 전부터 쇳덩이를 가마에 넣어 두드려 늘린 다음 칼 모양을 만들고 연삭기로 갈아 45자루의 칼을 만들었다.

다조작업은 기계의 힘을 빌리더라도 고온에 달군 쇠는 망치질을 무수하게 가해야 하고 연마작업 역시 사방으로 튀는 불꽃과 쇠가루를 맞아가며 참아내야 하기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니다.

불이 어느 정도 사그라졌을 무렵 이 소장은 유일한 제자인 아들(28)과 함께 단조와 연마작업을 거친 45자루의 칼을 숯불 속에 집어넣고 달궜다.

그리고 마침내 인시인 새벽 3시가 지나자 이 소장은 달궈진 칼을 차례로 꺼내 칼날 부분을 찬물에 식히기 시작했다.

사그라졌다고 해도 불은 여전히 1천도 이상의 고온이어서 차가운 날씨 속에서도 이 소장은 중간 중간 땀을 닦거나 물을 마셔가며 화기를 식혔다.

휘어지지는 않았는지, 금은 가지 않았는지 살피고서 두들겨가며 담금질을 했다.

이 소장은 한 번 담금질이 끝나 어느 정도 식은 칼을 다시 불 속에서 열처리하고서 서서히 식혀 새벽 4시 30분께 마무리했다.

하지만 칼은 만드는 과정은 끝나지 않았다. 칼 중심부에 사인검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28~31개의 별자리와 글씨를 새겨야 한다.

크기가 제 각각인 칼에 맞춰 나무와 가오리가죽 등으로 칼집을 만들고, 상감이나 조각을 통해 손잡이도 만들어야 한다.

그때까지 몇 개월이 걸릴지, 몇 년이 소요될지 장담할 수 없고, 담금질 과정에서 버려야 할 불량품이 몇개나 발생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담금질이 끝났을 뿐이다. 이같이 검의 제작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도검사(刀劍士)가 장인(匠人)의 정신으로 순수 수공예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경북 문경에서 고려왕검연구소를 운영하는 이상선 소장은 전통 칼을 만드는데 일생을 바치고 있다.

"열여섯살 때 영친왕 제사에 갔다가 처음 사인검을 보고서 미쳤었지요. 그 곳에 세워놓은 칼을 보고 갖고 싶었습니다. 그때는 그게 사인검인 줄도 모르고 그저 임금이 갖고 있던 칼이란 사실만 알았었지만…."

고향이 충남 예산인 이 소장은 전주 이씨 양녕대군 18대손으로 조선왕실의 자손이란 점 덕분에 다른 사람보다 일찍 사인검을 접했지만 왕실의 자손이란 점이 또한 칼을 만들고 싶은 생각이 그의 온몸에 꼭차게 한 것이다.

"그때만 해도 대장간 일이라고 하면 천하다고 했거든요. 칼 만들겠다며 그들과 어울렸으니 집안에서 좋아했겠습니까?"

17세 때 은장도 만드는 기술자한테 칼 만드는 기술을 배운 그는 지금까지 전통칼 제작에 정열을 쏟아오고 있다.

일제 식민지시기를 거치면서 국내에는 전통칼 제작기술이 단절된 탓으로 전통칼 제작기술 터득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그러한 어려움을 아랑곳하지 않은 그는 대장간에서 칼을 벼리는 법과 목공소에서 목제 칼집 만드는 법을 습득했고 함석집에서 칼 장식 만드는 법을 어깨너머로 익혔다.

전통칼 제작을 가르쳐준 스승도 없이 칼 만드는 기술만을 습득한 그에게는 도검제작을 위한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또 다른 난관에 부딪히기도 했었다.

3년을 기다려 마침내 1990년 내무부장관의 허가를 받은 그는 눈물을 흘렸을 정도로 좋았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쌀이 떨어지는 일이 다반사였을 정도로 생활은 궁핍해 아내가 다른 일 하자며 바가지를 긁힌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지만 검에 미치다보니 아내도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이해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제는 진검을 사용하는 검도장이나 칼을 소장하려는 사람이 꾸준히 늘면서 끼니를 걱정해야 하던 시기는 벗어나게 된 것이다.

특히 수년 전 관객 1천만명 이상을 끌어 모았던 영화 '왕의 남자'에도 그가 만든 칼이 중요한 소품으로 사용됐고, 2007년 노동부로부터 야철도검부문 기능전승자로 선정되는 등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는 그다.

명품만을 고집하는 국내 유일의 도검사 이씨는 "검의 제작은 시대적 역사에 입각한 사실적 작품이어야 하며, 무엇보다 전통적인 기법에 충실해야 생명력이 있고, 주물선택에서부터 찬란한 빛의 문양을 그대로 살려야 하는 등의 혼이 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소장은 "모든 나쁜 기운을 불에 태우고 좋은 기운만 담아서 만드는 것이 사인검"이라며 "올해는 자신의 나이를 기리는 57자루의 칼을 만들어 볼 것"이라고 했다.

한편 외적의 침입시 나라를 지켜온 칼은 위험한 물건이라는 편견 때문에 우리나라 도검문화의 발전을 막아 왔다는 이씨의 주장이다.

각 지방마다 훌륭한 전통검이 많았지만 광복 이후 옛날 칼을 모두 불법무기로 취급, 제철소로 보내는 바람에 아까운 전통문화가 녹아버린 것도 도검에 대한 문화가 너무 없었기 때문으로 풀이되고 있다.

"도검에는 그것을 만든 장인의 혼이 스며 있다"는 이씨는 "도검이 공예품으로 인정돼 전통문화가 활성화되는 것이 희망"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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