名家를 찾아서 - 21. 문경시 산북면 대하1리 장수황씨 종택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집촌…400여년전 황사간이 지어

문경시 산북면 대하1리에 자리한 장수황씨 종택.

단순한 '고택(古宅)'이 아닌, 여전히 우리 곁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선인들의 숭고한 가르침을 전해주는 종가. 황희 정승의 청백리 정신을 가풍으로 여기며 면면이 이어온 종가.

조선의 르네상스를 연 황희 정승의 맥을 잇고 있는 문경 장수황씨 종택은 약 400여년 전 건립됐으며 문경시 산북면 대하 1리에 위치하고 있다.

황희(1363~1452)의 호는 방촌. 조선초기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노력한 유능한 정치가일 뿐만 아니라 청백리의 전형으로 조선왕조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재상으로 꼽히고 있어 그의 종택은 오늘날까지 우러러보는 자랑꺼리다.

장수황씨 종택 안에는 약 400년된 탱자나무가 있다. 높이가 6m쯤 되는 우람한 자태를 뽐낸다. 탱자나무는 경상북도 기념물 제 135호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다.

그 옛날 종가를 세운 조상은 세상을 떠났지면 종택은 지금도 건재하며 베품의 철학도 면면이 이어져 오고 있다.

대하리는 장수황씨가 입향한지 200여년이 지난 1800년대에 접어들면서 상·하마을로 나누어졌다. 1700년대 대종가를 중심으로 집성촌을 이루었던 웃한두리에서, 1800년대 들어 소종가들이 아랫한두리(대상 1리)로 분가했다.

장수황씨는 중국 후한(後漢)의 유신이었던 황 락(黃 洛)이 서기 28년(신라 유리왕 5년) 현재의 베트남 북부 하노이지방 교지국(交趾國) 사신으로 가다 동북해에서 심한 풍랑을 만나 현재의 울진군 평해(平海) 월송(月松)지방에 표착(漂着)한 후 그곳에 자리잡고 살면서부터 시조가 됐다. 자칭 황장군(黃將軍)이라 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황씨의 시원(始源)이다.

장수황씨 종택 건물은 안채, 사랑채, 중문채, 고방채가 있다. 오른쪽에는 별도로 영정각 및 숙청사가 담장 내 배치돼 있다. 사당의 단청이 400여년의 세월에도 제 빛깔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황 락(黃 洛)은 갑고(甲古)·을고(乙古)·병고(丙古) 세 아들을 두었는데 각각 기성군(箕城君, 평해의 옛이름)·장수군(長水君)·창원백(昌原伯)에 봉해져 훗날 평해· 장수·창원 등 3관향이 여기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즉 맏이 황갑고(黃甲古)의 후손 황온인(黃溫仁)은 평해 황씨의 시조,둘째인 황을고(黃乙古)의 후손은 신라 경순왕의 부마이며 시중벼슬을 지낸 황 경(黃 瓊)으로 장수 황씨의 시조(始祖)가 되며, 셋째 황병고(黃丙古)의 후손인 황충준(黃忠俊)은 창원 황씨의 시조다.

고증(考證)할 문헌이 유실돼 역사기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장수 황씨(長水 黃氏)는 조선시대 4대 명상(名相)의 한사람으로 손꼽히는 황희(黃喜)정승의 증조부로 증(贈) 참의(參議)를 지낸 황석부(黃石富)를 1세조로 지금의 계보를 잇고 있다.

장수황씨 종택은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236호로 지징돼 있다.

문경 한두리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집촌으로 인적·물적 자원이 풍부한 곳이다.

장수황씨 동성마을이 형성된데는 황사간의 역할이 컸다. 삼가(三嘉)현감을 지낸 황사간은 7대조 황희의 영정과 유품을 보관하기 위해 숙청사(肅靑祠)를 비롯한 종택을 마련했고 '정우정'을 지어 후학을 양성했다.

종택의 역사가 약 400년의 역사를 말해주듯 장수황씨 종택은 지방 양반가옥으로서의 원형이 잘 보존하고 있다. 종택 건물은 안채, 사랑채, 중문채, 고방채가 있다. 우측에는 별도로 영정각 및 숙청사가 담장 내 배치돼 있다.

조선시대 지방 양반가옥의 원형이 잘 보존되고 있는 장수황씨 종택.

종택 안에는 약 400년된 탱자나무가 있다. 높이가 6m쯤 되는 우람한 자태를 뽐낸다. 이는 황사간이 터를 잡으면서 심은 것으로 원래 두 그루가 나란히 자랐으나 마치 한 그루인것 처럼 보인다.

종택 건물은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 236호로 지정돼 있고 탱자나무는 기념물 제 135호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종가에 내려오는 문헌자료는 많지않다.

종택이 유지된 400여년간 문경의 장수황씨는 조선시대 중앙관직에 나아가기도 했다. 그만큼 향촌에서는 명망있는 사족이었다. 그동안 장수황씨가 작성하거나 보존해오던 문헌자료는 상당수였으나 여러차례 절도를 당했다. 현재는 다만 1천500년전(연산군 6) 황희의 증손 황정이 작성한 분재기와 황희의 유품인 옥으로 된 종이 누르기(옥서전) 1장, 산호로 된 갓끈 1종, 옥 벼루 1개, 코뿔소 뿔로 된 띠(사각대), 1개가 보존돼 있다. 분재기에는 종가의 유물을 보존하기를 바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장수황씨 종가에서 불천위로 모셨던 분은 15대조 황사간과 13대조 황상중이지만 현재 불천위 제사는 지내지 않는다.

일제시대 생계가 막막했던 종택에서는 생존을 위해 사당의 제목까지 팔아야 했다. 처음에는 다락방에 신주를 모시고 사당삼아 제사를 모셨지만 이마저 경제적 형편이 어려워지자 모든 신주를 조매하고 말았다. 대신 종택에서는 매년 2월 10일 황희의 생일에 자손과 파손, 유림들이 모여 방촌선조 다례를 올리고 있다. 이 밖에 종택에서는 음력 10월 묘사를 지낸다.

종택 음식으로는 가양주인 '호산춘'이 유명하다. 이는 수 백년간 장수황씨 집안에 이어져온 전통주로 1990년 민속주로 문화재 등록됐으며 지금도 이 집안에서 빚어지고 있다.

'쌀 한되에 술 한되가 나온다'고 하며 술이 너무 좋아 술에 빠져 지내다가 몸과 집안을 망친다고 해서 망주(亡酒), 신선이 좋아한다 하여 호선주, 관리들이 이 술맛에 취해 임무도 잊고 돌아갔다 하여 망주(忘酒)로 불렸다는 유명한 술이다.

종손 황규욱씨(50년생)는 몰락한 종가의 종손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며 잘 살았다. 고등학교 역사교사로 재직하며 고향을 지켰고 집안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지금에 이르렀다. 지역사회 활동에도 적극적이다.

무엇보다 그가 실천하면서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는 말은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일을 사랑하라.'

그는 아버지의 정신을 이어받아 젊은 시절 고향에서 농촌운동을 펼쳤다. 5년간의 그의 활동은 고향마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10수 유실수 심기, 가축 열 마리 기르기, 농한기 없애기 등을 권장했던 것이 이제는 젊은 날의 소중한 추억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뿐아니다. "종가는 베푸는 삶을 실천하며 공익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이것이 종가의 전통을 잇는 것이기 때문이란다. 장수 황씨 황희 정승의 21대 종손의 자긍심은 꿋꿋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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