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영남 도호부 객사…굽이굽이 사연 간짓한 밀양강 바라보며 '아리랑 恨' 달래네

▲ 우리나라 최고의 누각 중 하나로 칭송받는 영남루는 강물 위 높은 절벽에 자리잡아 멋진 풍경을 보여준다.
밀양시 내일동 영남루 입구에서 낮익은 얼굴을 만난다. ‘애수의 소야곡’ 의 작곡가 고 박시춘이다. 밀양시가 영남루 입구 왼쪽 언덕에 박시춘의 생가를 복원하면서 그의 동상도 조성해두었던 것이다. 박시춘의 생가를 복원한 뒤 박시춘을 밀양의 자랑이라고 홍보하던 밀양시가 한때 곤욕을 치렀다. 일제시대때 친일 행적이 드러나면서 시민의 혈세를 들여 친일 인사의 생가를 복원하는 일이 맞느냐는 시비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영남루 입구에도 재밌는 물건이 하나 있다. ‘밀양아리랑’ 노래비다. 비석 옆에 있는 버튼을 누르니 비석 뒤 스피커에서 ‘날좀 보소 날좀 보소’ 밀양아리랑이 우렁차게 흘러나온다. 버튼을 직접 눌렀는데도 깜짝 놀랐다. 자기 발자국 소리에 놀란 고양이 형국이라고나 할까.

영남루가 있는 너른 마당으로 들어서면 왼쪽 건물은 영남루, 오른 건물이 천진궁이다. 천진궁에는 단군 신위를 비롯해 부여 신라 고구려 백제 가락 등의 시조, 고려 태조 및 발해 고왕, 조선 태조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져 있다. 역사의 물줄기가 한 굽이굽이 꺾어돌 때 마다 역사의 새 장을 펼친 인물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곳이다.
밀양강가에서 본 영남루

영남루는 조선시대 영남 도호부의 객사 건물 인데 밀양을 찾아온 빈객이 시연을 즐기거나 시인 묵객이 잠을 자는 누대로 활용됐다. 신라시대에는 영남사의 종각인 금벽루가 있던 곳이었는데 고려시대에 절이 없어지고 누각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공민왕 14년(1365년)에 누각을 새로 짓고 절의 이름을 따 영남루라고 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세조 6년(1460년) 중수하면서 규모를 넓혔고 순조때 불에 탔지만 밀양부사로 온 이인재가 헌종 10년(1844년) 중수해 오늘에 이르러고 있다.조선시대 건축물이 온건하게 남아있는 몇 안되는 자료다.

가운데 영남루가 있고 좌우에 능파각과 침류각이라는 익랑(좌우 출입문에 잇대어 지은 행랑)을 거느린 독특한 형태다. 마치 새가 양날개를 펴고 강과 도시를 내려다 보고 있는 형상이다. 정면 다섯칸, 측면 네칸형식인데 마루가 넓고 천정이 높은 웅장한 누각이다. 기둥은 장대하고 내부장식도 화려하게 치장했다. 천장에 방형의 청룡 백호 주작 현무 그림이 있고 들보에는 수많은 시인묵객 유명인사들이 글씨를 쓰고 시를 걸었다. 이같은 이유로 영남루는 평양의 부벽류, 진주의 촉석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꼽힌다.
영남루에서 본 밀양강

동쪽에 있는 침류각枕流閣은 세종때 덧붙여 지은 것으로 알려진다. 영남루보다 낮게 지어 통로를 계단으로 만들었다. 상하고저 층층으로 지어 건축미와 기능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현판이름은 ‘침류수석’이라는 고사에서 나왔다. 냇물을 베게 삼고 돌로 양치질을 한다는 뜻이다. 이꼴 저꼴 안보고 깊은 산속에 들어와 자연과 더불어 안분지족하는 삶, 선비의 이상향을 담았다.

서쪽에 있는 능파각凌波閣은 연산군 때 덧 지었다. ‘능파’는 ‘물위를 사뿐히 걷는 신선’ ‘ 빼어난 물의 경치’ ‘ 뱃놀이 할 때 부르는 노래’ 등의 뜻으로 쓰인다. ‘침류’도 ‘능파’도 밀양강을 끼고 있는 영남루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누가 높은 다락을 지어 하늘 가까이 올렸나
벽 사이에 걸린 판상시가 기둥머리를 다 채웠네
세월은 세차게 흘러 개을 속에 임하니
지난 일 아득하여 기둥 가에 기대네
십리 뽕나무와 삼에는 비와 이슬이 깊었고
한 지경 산과 물에는 구름과 연기가 자욱하네
늦게 찾아오니 저무는 해 아름답게 보이고
달빛 가득한 긴 강에 다시 자리를 펼치네

하륜의 시 ‘영남루’

누각 안에는 ‘영남제일루’ ‘현창관’ ‘용금루’ 같은 현판이 걸려있다. ‘현창’은 ‘훤희 트여 시원하다’는 뜻이고 ‘용금’은 ‘절벽에 우뚝 솟아 있는 아름다운 누각’을 수식하는 말이다.

누각 앞쪽에 ‘영남루’ 현판이 걸려 있고 좌우로 ‘강좌확부’ ‘교남 명루’라고 쓴 큰 현판이 보인다. ‘강좌확부’는 밀양이 낙동강 좌측의 아름다운 고을이라는 뜻이고 ‘교남명루’는 문경새재 이남의 가장 아름다운 누각‘이라는 뜻이다. ’강성여화‘라는 현판도 있는데 밀양강과 영남루 아래에 있는 밀양읍성 성곽이 마치 꽃과 같다는 표현이다.

영남루에는 수많은 시인 묵객이 다녀가면서 그 흔적을 남겼다. 조선시대의 권근의 시가 대표적이다.


영남루에서 본 천진궁


백 척의 높은 정자 긴 하늘 당기는데
풍경은 책상 앞에 벌어지며 볼만하네
내 가까우니 물소리 난간 밖에 지나가는데
구름 걷히니 산의 푸름은 처마 끝에 들어오네
천 이랑의 밭두두에는 벼가 비를 맞았고
십리 마을의 나무에는 연기를 내뿜네
필마로 남쪽와서 경치 좋은 곳 지나니
올라와 바라보며 손님자리에 낄만하네

권근의 ‘영남루’

영남루에서 내려다 보는 밀양강과 밀양시가지는 한편의 파노라마다. 비가 오는 밀양강은 흐름이 도도하고 물의 빛은 짙푸르다. 강변은 깔끔하게 정리 돼 있는데 그 너머 비에 젖는 도심은 아스라하다. 난간 아래 성곽이 있고 성곽 아래에 대나무 밭이 있는데 이 대나무 밭에서 아랑이 억울하게 죽었다. 아랑의 원한을 풀어 준 ’아랑의 전설‘이 있는 곳이다.

이야기는 이렇다. 밀양부사가 밀양에 부임해오면 첫날 밤에 죽었다.벼슬아치들이 밀양부사로 가는 것을 꺼렸는데 이상사라고 하는 사람이 밀양부사를 자원했다. 밀양부사로 온 이상사는 첫날밤에 지내고도 멀쩡하게 살아 남아 통인(수령의 심부름이나 명령을 전달하는 아전) 주기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상사는 통인 주기를 처형하고 아랑의 시신을 대나무 밭에서 찾아내 장사를 지내주었다. 그러자 그 뒤로는 원혼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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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사진
김동완 자유기고가
아랑은 본래 조선 명종때 밀양부사 윤동옥의 딸이었는데 통인 주기가 아랑을 남몰래 사모했다. 주기가 유모를 시켜 아랑을 영남루로 유인한 뒤 사랑을 고백하고 겁탈하려다 실패하자 죽여 대나무 밭에 버렸다. 아랑이 억울한 사연을 호소하기 위해 새로 부임하는 부사에게 귀신차림으로 나타났으나 놀란 부사가 혼절하여 죽고 말았던 것이다.

이후 밀양주민들이 아랑낭자의 정절을 기려 밀양강가의 영남루 아래쪽 절벽에 열녀사를 세웠다고 하나 정확한 연대를 알수 없다.그후 밀양시가 ’아랑각‘을 지었으며 매년 음력 4월16일에 제사를 지낸다. ’영남루 제영‘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밀양아리랑의 모티브를 제공했다. 당시 밀양지방 아낙네들이 아랑의 정절을 사모하여 ’아랑아랑‘하고 불렀는데 그것이 변해 ’밀양아리랑‘이 됐다는 것이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정든 님이 오시는데 인사를 못해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벙긋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 박시춘 흉상과 생가.
김동완 자유기고가
이동욱 논설주간 donlee@kyongbuk.com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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