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동진의 시인 도연명은 조선 선비의 롤모델이었다. 그는 평택현령으로 지내던 중 감독관이 순시를 오자 ‘쌀 다섯말을 위해 향리의 소인배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며 벼슬살이를 걷어차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때 썼던 글이 ‘귀거래사’다. 귀거래사는 천년 세월이 지나 조선의 벼슬살이들에게 비상구노릇을 했다. 정치에 환멸을 느낀 관리들은 귀거래사를 읽으며 돌아와 살 땅,‘퇴후지지’를 그렸고 집에 도연명 초상화를 걸어두고 계산풍월의 전원생활을 꿈꿨다. 정치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즉각 낙향해 정자를 지었다. 경주와 안동 영천 순천을...
충북 괴산군 청천리 화양계곡은 바위가 주인이다. 하늘을 찌르는 기암과 세월이 층층이 쌓은 바위가 절벽을 이뤄 선경을 빚어낸다. 이곳에서 물과 나무는 바위의 조연이다. 청화산(988m)에서 발원한 화양천은 그 일대의 도명산 낙영산 가령산 조봉산을 구획하며 세울 바위는 세우고 엎드릴 바위는 엎드리게 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계곡에는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바위들이 물속에 발을 담궜고 산이 끝나는 곳에는 어김없이 절벽이 우뚝 서서 화양의 아름다움을 이야기 한다.화양계곡의 하이라이트는 화양구곡이 있는 3km 구간이다. 주자의 무이구곡...
취묵당은 백곡(栢谷) 김득신(金得臣·1604~1684)이 지은 정자다. 김득신을 찾아 가는 길에 ‘노둔(魯鈍)하다’라는 낯선 단어를 만났다. 사전적 의미는 ‘둔하고 어리석으며 미련하다’이다. 대개 지능지수가 떨어져 암기력은 물론 이해력도 떨어지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노둔한 인물은 공자의 제자 증삼이다. 공자가 그의 수제자 10명의 특징을 요약하면서 “덕행에는 안회 민자건 염백우 중궁이, 정사에는 염유 자로가, 언어에는 재아 자공, 문학에는 자유 자하가 뛰어났다”고 말한 끝에 “증삼은 노둔했다”라고 ...
겸재 정선이 그린 쌍계입암(雙溪立巖)은 경북 영양군 입암면 선바위의 진경을 그린 그림이다. 일월산이 반변천과 청기천을 가르며 뻗어 나오다 돌연 치솟아 오르며 멈추서서 아찔한 절벽을 만들어냈으니 자줏빛 비단 병풍, 자금병(紫錦屛)이다. 자금병 아래서 반변천과 청기천 두 물길이 만나는 두물머리가 남이포다. 남이포 앞에 있는 정자가 남이정이다. 입암(선바위)은 자금병과 남이포,남이정이 한눈에 들어오는 부용봉에 우뚝 서 있는 바위이다. 보기에 따라 벌떡 일어선 곰 형상 같기도 하다. 정선은 청하현감으로 포항에 내려와 있을 당시인 17...
청송군 현서면 월정리 여암마을 앞을 지나는 길안천은 갈대가 주인이다. 강 속의 물은 흔적만 남긴 채 빠져나갔고 물이 빠져나간 자리에 누렇게 갈대가 자리를 잡아 바람이 불 때 마다바람보다 먼저 눕거나 바람보다 먼저 일어서고 있었다. 바람이 서쪽에서 우루루 몰려오면 바람이 속삭이는 지, 갈대가 수군거리는 지 규정하기 어려운 소리의 무리가 우루루 길안천을 따라 동쪽으로 흘러갔다. 초겨울 현서면 여암마을 앞 길안천에는 물 대신 바람이 흐르고 있었다. 갈대밭 너머 계곡 건너편 고모산 아래 언덕에 서 있는 세 채의 정자가 침류정, 오월헌...
매학정은 구미시 고아면 예성리 보천탄 언덕 위에 있다. 북쪽으로는 고산이 병풍처럼 막아서고 남 동 서쪽으로 3면으로 강이 한눈에 들어오는 절경지다. 매학정 이름 그대로 입구에 매화 7그루가 서 있으나 꽃을 피우려면 이 추위가 물러갈 쯤까지 기다려야 한다. 보천탄에는 학이 없다. 물오리 떼가 학이 있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1533년(조선시대 중종 28년)에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1521-1575 이후)가 조부의 뜻에 따라 정자를 지었다. 정자 앞마당에는 매화나무를 심고 학을 길렀다고 한다. 그리며 14세에 사마시에 합격하...
방초정은 김천시 구성면 상원리 원터 마을에 있다. 조선시대의 관영숙소인 상좌원(上佐院)이 있던 곳인데 마을 이름은 여기서 비롯됐다.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조선중기인 1519년( 중종3)으로 추정된다. 연안이씨 부사공파 일가가 처음으로 터를 잡고 마을을 이룬 이래 세거지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연안이씨는 이무가 시조다. 무는 신라 태종 무열왕 7년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정복할 때 나당 연합군 사령관을 맡았던 소정방의 부장으로 왔다가 신라에 귀화했다. 무열왕은 중국 노자의 후손인 그를 연안후로 봉하고 식읍을 내렸다. ...
포천(布川)계곡은 성주군 가천면 신계리에 있는 가야산 계곡이다. 짙푸른 물과 바위가 마치 베(布)를 널어 놓은 것 같다 하여 그렇게 부른다. 이 계곡의 핵심 경관은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1792년 ~ 1872) 가 아홉 곳의 경승지에 이름을 붙이고 경영한 포천구곡이다. 약 7km에 이르는 구곡은 너럭바위와 소(沼), 작은 폭포가 수도 없이 펼쳐지는 절정의 경승지다. 이원조는 구곡에 이름을 붙이고 굽이마다 시를 지어 ‘포천구곡가’를 완성했다. 또 시로 다 표현하지 못한 풍경은 ‘포천지’로 풀어 놓았다. 1곡은 ‘법림교’다. ...
포항에서 청송가는 길. 죽장 지나 꼭두방재 넘어 청송 현동으로 달려가는 내내 길가에 사과 밭이 펼쳐진다. ‘볼빨간’ 사과의 바다 끝에 짙푸른 하늘이 얕게 깔리고 그 위에 흰 구름이 뭉게 뭉게 연기처럼 피어오른다.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의 대비는 눈부시다. 11월의 늦가을 풍경은 보는 내내 구름이 피어오르듯 뭉클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시절의 최종병기는 역시 ‘단풍’이다. 울긋불긋 단풍은 가을이 제 방식으로 풀어내는 꽃대궐이다. 청송군 현동면 개일리 오체정 앞길은 가을의 대미를 장식하는 단풍으로 붉거나 노랗거나 주황색으로 타오르...
청송군 청송읍 월막리에 있다. 1428년(세종 10년) 청송부사 하담이 경치가 빼어난 용전천 절벽 위에 지었다. 세종의 명을 받아 지었다고 한다. 정면 4칸 측면 4칸 구조인데 세종의 여덟 아들이 어머니 소헌왕후(昭憲王后·1395~1446를 위해 두 칸씩 지었다고도 한다. 소헌왕후는 세종과의 사이에 8남 2녀를 두었다. 첩첩산중 시골마을은 소헌왕후 덕에 세종 즉위년인 1418년 청부군으로 승격됐다가 1423년 청송군이 됐고 소헌왕후의 아들인 세조대에 와서는 청송도호부로 승격됐다. 찬경루기문은 당시 관찰사인 홍여방이 썼다. 홍여...
경기도 이천은 신라와 백제 고구려 삼국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한강이 수중에 들고나고는 이천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달려 있었다. 신라 진흥왕(568년)이 이천의 지금의 도청 소재지격인 남천주를 설치했다. 고구려 땅 남천현이었는데 진흥왕이 정복전쟁을 벌여 땅을 빼앗고 주를 설치했다. 그로부터 백년이 지나 660년 태종무열왕이 김유신 장군을 비롯한 5만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이천의 남천정에 집결했다. 남천정은 설봉산성이다. 이때만 해도 백제는 신라가 고구려를 칠 것으로 생각했다. 김유신과 5만 병력은 북진하는 것처럼 했다가 이천에서 남...
“만물은 주인이 있지만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은 주인이 없어 취하는 자가 주인(소동파의 적벽부)”이라고 했다. 제천의 청풍이 ‘맑은 바람과 밝은 달’(淸風明月)을 고장 이름으로 짓고 풍월주인(風月主人)이 됐다. 1914년 제천군과 청풍군이 제천군으로 통합되면서 제천이 청풍명월을 안았다. 조선 세조 성종때 문장가로 이름을 떨친 이승소는 청풍을 이렇게 노래했다. “호남 50성을 두루 다녀보았지만 경치 좋은 땅, 오늘에야 그윽한 정취를 만난다. 산이 좋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납극( 나막신에 초를 바름. 진나라의 완부는 나막신을 좋아하여...
하목정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하산리에 있다. 하목정의 ‘하’와 적산 마을의 ‘산’을 땄다. 하목정이 이 마을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정자의 서쪽으로 낙동강이 길게 흐르고 뒤로는 동산을 빼곡이 채운 대숲이 아름답다. 정자에서의 첫 인상은 ‘소쇄’하다는 느낌, 맑고 깨끗했다. 정자에 앉으면 서쪽 들창문 사이로 멀리 낙동강물이 보인다. 강물은 서쪽으로 넘어가는 햇살을 등에 업고 멀리서도 눈부시다. 정자 담장 밖으로는 낙동강을 끼고 달리는 자전거족들이 한 폭의 풍경이다. 정자의 병풍 노릇을 하는 대숲은 더러 바람을 쏟아냈는데 숨을...
세검정은 서울 종로구 신영동에 있다. 상명대 입구에서 홍제천을 따라 상류로 가다보면 계곡 가에 서있다.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4소문 가운데 하나인 창의문 밖 탕춘대 옆이다. 탕춘대는 연산군이 냇가에 수각을 짓고 미희들과 놀았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영조는 탕춘대에 거동하여 활쏘기로 무사를 뽑고 탕춘대를 고쳐 연융대라 했다. 세검정은 피비린내 나는 정쟁의 증언록이다. 광해군 15년(1623) 이귀와 김류 등이 홍제천에 집결한 뒤 창의문을 도끼로 부수고 궁궐에 들어가 광해군을 폐위하고 인조를 옹립했다. 많은 이들이 죽고 상했다. ...
1786년 5월,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1745 ~ 미상)는 2년 남짓한 안기찰방 근무를 마치고 도화서로 복귀한다. 안기 찰방은 안기역을 중심으로 하는 11개 역과 역도를 담당하는 종6품 관리. 안기역은 현재의 안동 안기동에 있었다. 찰방은 역장이나 우체국장쯤 되는 벼슬이지만 주로 대간이나 정랑직에 있는 명망 있는 문신이 맡아 수령의 탐학을 보고 하는 감찰 역할도 맡는 비중 있는 자리였다. 김홍도의 스승인 강세황은 이를 두고 “나라에서 기술자(중인)를 등용한 것이 본시 여간해서 없던 일이며 단원은 서민으로서 최고의 영광을...
도산구곡은 오천 군자리에서 청량산 입구까지 낙동강 상류 아홉굽이 50리 길이다. 조선 성리학의 거목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걷었던 길이다. 주자의 ‘무이구곡’을 본 따 이황 사후에 퇴계의 후계인 이야순 이이순 등이 설정했다. 일반적으로 조선의 구곡이 10리 안팎으로 경영됐다는 점을 감안할 때 도산구곡은 스케일이 장대할 뿐만 아니라 굽이마다 명문가와 명현의 흔적이 남아 있어 의미가 깊다. 1곡은 운암곡(雲巖曲)이다. 운암곡이 있는 군자리는 광산 김씨들이 대대로 살았다. 김부필로 대표되는 ‘오천칠군자’가 살던 곳이다. 안동호가...
삼구정은 안동시 풍산면 소산마을에 있다. 소산마을은 안동김씨 집성촌이다. 안동김씨는 김선평을 시조로 안동에서 1,000년을 세거해 왔는데 김선평의 9세손 비안현감 김삼근(金三近)이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이 마을의 역사가 시작됐다.김삼근은 아들 형제를 두었는데 맏아들은 한성판관을 지낸 김계권이고 둘째 아들은 대사헌을 지낸 보백당 김계행, 길안면에 있는 정자 만휴당의 주인이다. 우리 집에는 보물이 없고 보물이 있다면 청백정신 밖에 없다던 청백리다. 김계권은 다섯 아들을 뒀다. 맏아들이 학조대사다. 학조는 당대의 명승이었으며 웅문거필...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은 병자호란때 청나라와의 굴욕적인 강화를 반대하며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한 척화론자였다. 화의를 청하는 최명길의 국서를 찢었고 굴욕을 견디지 못해 목을 매 자살까지 시도했다. 자살 시도 전 그의 스승이며 맏형인 김상용이 강화도에서 화약고에 불을 질러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삼전도의 굴욕이 끝으로 전쟁이 막을 내린 뒤에도 그는 청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청나라가 조선의 군사 5천명을 징집해 명나라를 친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전쟁이 끝나고 3년 뒤 뒤늦게 이 ...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대과에서 미끄러졌다. 문사였지만 활쏘기와 무예도 뛰어났다. 길을 바꿔 무과에도 응시했지만 낙방의 쓴잔을 마셨다. 집안 대대로 벼슬을 한 명문 사족이었다. 친형인 김연(金緣·1487~1544)은 식년 문과에 급제해 예문관과 사헌부 등 중앙요직을 거쳐 강원관찰사, 경주 부윤 등 지방관을 두루 역임하며 이름을 날렸다. 지독한 콤플렉스에 시달렸을 그는 한순간 벼슬에 대한 집착을 미련 없이 던졌다. 매사 마음먹기에 달렸다. “한번 사는 인생 즐겁게 사는 것이 어떤가. 꼭 세상의 명예를 뒤쫓을 필요가 있을까.”(퇴계선...
조선의 이름난 선비들이 대개 그렇듯이 그의 삶도 굴곡이 많았다. 강직했으므로 곳곳에 적이 널렸고 청렴했으므로 일신의 영달을 누리는 이들을 불편하게 했다. 그리하여 적들은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그들은 끊임없이 그의 명줄을 노리며 소를 올리고 탄핵했다. 파직을 당하고 곤장을 맞았으며 복직됐다가 다시 투옥되기를 반복했다.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1431~1517)의 자취를 찾아 만휴정으로 간다. 만휴정은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 산 중턱에 있다. 묵계서원(黙溪書院)에서 도로를 건너 마을을 끼고 소로를 들어가면 평범한 계곡이 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