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색 구조물이 파도치는 파란 바다 가운데 떠서 흔들렸다. 다연이 톡에 올린 사진이었다. 다연이 그녀의 남편인 영석이 근무하는 섬으로 이사 간 지 석 달 만이었다. 물기 가득한 눈으로 웃던 다연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다연은 아들을 가슴에 제대로 묻지도 못해 억장을 떠안은 엄마였다. 아들을 잃고 잘 버티나 싶었다. 섬에 있는 항로표지관리소에서 근무하는 영석은 열흘에 한 번씩 집에 왔다. 남편이 없는 동안 다연은 오롯이 혼자 견뎠다. 영석이 섬으로 이사하자고 했지만 다연은 아들의 방을 떠날 수 없었다. 돌아오지 않는 아들 시우의
넉넉한 햇살을 함뿍 받은 앵두가 보석처럼 빛을 발한다. 새빨간 앵두는 주위에 색들을 모두 흡수해 버릴 기세로 찬연하다. 앵두에 살이 오르고 단맛이 절정에 이르면 유월은 우리 곁에서 조곤조곤 옛이야기를 들려준다.양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소녀가 까치발을 하고 앵두나무 아래 서 있다. 깜냥껏 열매를 따보려고 손을 뻗친다. 하지만 이내 뒤뚱거리다가 고꾸라지고 만다. 담벼락에 세워두었던 빗자루가 쓰러지고 소녀는 비명을 지른다. 이내 방문이 열리고 아버지의 놀란 얼굴이 나타난다. 소녀를 일으켜 세운 아버지는 긴 팔을 뻗어 앵두를 한 줌 딴다.
삼월 삼짇날이 지나자 제비가 왔다. 지난여름 내내 처마 밑에 보금자리를 틀고 새끼를 키우며 가정을 이루더니 머나먼 강남 길을 떠났다. 해가 바뀌면서 다시 돌아온 녀석들은 겨우내 텅 비었던 집을 부산하게 드나들며 수리한다. 문전 숙객이 머무는 동안은 시끄러운 소리와 배설물 세례를 감수 할 수밖에 없다. 집세 한 푼 내지 않고 멋대로 어질러가며 살았으니 박씨 하나 쯤 물어 줄지 모른다. 은근히 기다리며 철새를 보내고 맞는다.명절 대목장이 서면 각설이가 난전을 편다. 신명을 얹은 가위가 철컹철컹 소리 지르자 엿판이 하얗게 모습을 드러낸다
아흔 넷 엄마의 대추 깍두기아들아 언제 오냐?바람은 더위를 밀고 구름마저도 밀어 하늘이 높구나. 아들아하늘이 깊고도 높으니 너에 대한 그리움 또한 깊어간다.아들아 언제 오냐?가을바람에 뒤뜰 대추가 익어간다.가을의 한 볕 태양에 연푸른 볼은 빨간 연지 곤지 칠하고속에는 단맛으로 채어간다.아들아 언제 오냐?한 낮의 뜨거운 볕에 볼이 붉어진 대추를 땄다. 한 바구니 따다가 예쁘게 목욕시키고반을 잘라 꼭꼭 숨은 씨 도려내고 껍질 곱게 깎아 깍두기 담았다. 아들아 언제 오냐?가을 볕 품은 대추 따다 깍두기 담았다.아흔 넷 네 엄마가 텃밭에
손톱 모서리에 생긴 거스러미를무심코 송곳니로 당겼다끓는 냄비를 만진 것도 아닌데펄펄 7월이 또 뜨거워졌다긁어서 만든 부스럼이 부끄럽다고징그럽게 울어대던 매미소리도단말마 비명을 남긴 채 하늘로 솟구친다밀어내도 자라는 기억 잘라낼 것처럼속아보고도 또 속는 부끄러움은설거지 소리마냥 시끄러워졌다거스러미, 그냥 둘걸 그랬나저 혼자 앓다 얌전히 사그라지도록괜시리 팽팽하게 고무줄 당기던 나뿌리째 뽑으려고 덤빈 건 끝을 보자는 것이었으니도돌이표로 돌아온 통증쓰리고 아린 자리 호호 불어줄환풍의 계절이 문득 그리워지고
다리쉼을 하다가 묵뫼인 걸 알았다숲에 갇혀있는 소복한 슬픔자손의 발길이 끊긴 지 오래인 듯 팽개쳐진무덤을 나무들이 그늘로 다독이고 있다발아래 갈참나무 한 그루를 키우며군데군데 녹태가 끼어있는 무덤은천천히 숲으로 돌아가는 중이다벼슬은커녕 가난의 업적밖에 남긴 것이 없는아버지처럼, 무덤도 범부였을까그 흔한 비석 하나 갖지 못하고제수를 차려 올릴 상석도 없다한도 슬픔도 표식 없이 다 묻어버린 무덤은격식이 없어 차라리 편안하다죽어서도 지킬 것이 많은 탓인지문지기를 세워놓고 맹수를 기르는 무덤에서는사람도 고라니도 쉬어가지 못한다낮아지고 낮아
-양수리 느티나무 앞 벤치서 만남에 대한 단상우리들 만남엔남과 북이 따로 없다금강산서그리고 설악산서,태백산서흘러,흘러온 물은 여기서 만난다두물머리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원대한 물 마당 화합의 장을 이루는 곳강물이 앞서거니뒤서거니 다투지 않음은지혜로이 배워야 할 평화의 교범(敎範)상선약수(上善若水)도덕경 그 고금의 진리를 따라서울의 젖줄 한강에 이르러 바다로 간다해불양수(海不讓水)내가 되어 바다로 가는 이곳에서떠나가는 물결을 하염없는 시선으로400년 느티나무기다림 나룻배와 천년 고인돌진정한 통일의 물길 기다리고 있을거이!고목(古木)의
발신지를 잃어버린 편지처럼 쉽게 버릴 수도, 그렇다고 간직할 수도 없는 난감한 일이 있을까. 너에게서 온 메시지는 여전히 메신저창에서 떠돌고, 나는 네게 아무런 답장도 하지 못한다. 이미 납부되었지만, 테이블 위에 오래도록 방치된 영수증처럼 이제는 기억에서조차 멀어져 완전히 쓸모없어질 날만을 기다릴 뿐이다. 그러나 그런 날은 오지 않겠지.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강줄기처럼 침잠해 있던 생각들이 계속 흘러들어 끝이 나지 않을 테니까.*너에게서 메시지가 온 건 입사 이래로 처음 지각하던 날의 일이었다. 회사 가는 길은 축구장만 한 양
겨우내 잠자던 땅이 부스스 깨어나는 기미가 보인다. 한 노인이 길가의 공터에서 흙을 뒤적이고 있다. 아마 흙을 깨우려는가 보다. 농로를 따라 산책하는 나는 옷깃을 여미는데, 일하는 노인은 겉옷을 벗어부쳤다. 아직은 바람 끝이 차가운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구부리고 있는 노인의 등에서도 봄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도시에 몸을 붙이고 살면서도 작물을 가꾸려면 요맘때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도로 건너편에 아파트 단지가 버티고 있고, 노인이 일하고 있는 이곳 주변에는 제법 넓은 과수원이 자리 잡고 있다. 그 틈
그분은 내게 긍정을 팔러 온다. 한참동안 보이지 않을 때면 자꾸만 궁금하고 아쉬워진다. 예쁘고 젊은 분도 아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나이가 칠십이라 하더니 며칠 전에는 팔십이라 하여 놀라고 말았다. 십년이란 세월이 빠르게도 지나갔던 것이다. 그래도 내 눈에는 여전히 칠순의 나이를 지니셨다.리어카에는 손수 농사지으신 채소를 싣고 오신다. 흔한 푸성귀야말로 시장에 가면 얼마든지 구입하기 쉽지만 반가운 마음이 들어 자연스레 사게 된다. 덤으로 마루에 걸터앉게 하신 후 커피까지 대접하면서 얘기장단을 맞춘다. 나도 모르게 보따리를 풀 듯 쏟
하늘로 이르는 길은 직선에만 있지 않고 곡선에도 있음을, 휘어지고 뒤틀리지 않으면 서로에게 기댈 수 없다는 것을 맹종죽림의 나무들은 알고 있다. 올려다본 하늘이 댓잎으로 물들어 있다. 대숲에 한 줄기 바람이 일면 소리가 먼저 번진다. 대숲에는 대나무가 밀어 올린 시간이 있다. 자로 잰 듯 정교한 눈금들, 마디와 마디에는 한 줌 햇빛과 달빛, 한 모금의 이슬을 나누고 저마다의 별을 바라본 기억들이 남아있으리라.무한 직립의 대나무들 사이 거대한 소나무 한 그루가 온 힘을 다해 대나무를 끌어안고 있다. 댓잎 우는 소리가 소나무의 귀를 간
동네 어귀에 둥그런 바위 하나가 놓였다. 바위는 고임돌조차 사라진 고인돌이다. 고인돌은 죽은 사람의 무덤이지만 이제와 그리 여기는 이는 드물다. 다만 등에 뚜렷이 새겨진 성혈로 여느 바위와는 다름을 짐작할 뿐이다.사람은 누구나 한 권의 인생 책을 쓴다. 얇거나 두껍거나 두께는 각자의 몫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마침표가 찍힌다. 마침표가 찍히기까지 책은 수만 가지 이야기를 품는다. 때로는 따옴표로 강조를 하거나 반복을 하여도 넘침이 없다. 울고 웃고 가슴을 파며 살아도 다르지 않다. 한 번에 찍거나 미진하여 망설여도 마찬가지다. 어느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순간, 무언가 핑그르르 날아올랐다. 나방이었다. 기옥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나방은 그 사이 거실을 가로질러 빛 속으로 빨려가듯 텔레비전 화면 위에 내려앉았다. 그녀는 현관 벽장에서 에프킬라를 꺼내왔다. 나방을 향해 버튼을 힘껏 눌렀지만, 소리만 요란할 뿐 분사되는 가스는 얼마 되지 않았다. 되살아난 나방은 천장 높이 날아올라 사라졌다. 그녀는 눈먼 사람처럼 팔을 내둘렀다. 깨금발로 뛰며 휘젓던 손끝에 형광등 갓이 스치면서 나방이 드러났다. 나방은 긴 포물선을 그리며 부엌으로 날아가 냉장고에 앉았다. 마치
어제 일 같다. 생각해 보면 까마득한데 기억은 갓 잡은 생선처럼 팔팔하다. 20년 전, 주인은 우유 아줌마에게 단돈 6만 원에 나를 샀다. 우유를 먹는다는 조건이었다. 값이 싸긴 해도 명색이 ‘삼천리자전거’ 라는 족보를 가진, 자전거 계에서는 꽤 알아주는 족속이다. 주인은 나에게 ‘청룡靑龍’ 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싱싱한 푸른 몸을 칭찬해 주면서 승천하는 청룡처럼 멋지게 살라고 했다. 그날은 죽어도 잊지 못한다.나는 늘 문밖에서 대기한다. 주인은 집을 드나들 때마다 내 이름을 불러준다. “청룡아, 안녕! 잘 있었어.”하며 안부
시골장터에서 기다란 나무 밀대를 본적이 있다. 앞치마를 정갈하게 두른 중년 아낙이 뭉쳐진 반죽을 밀대로 넓게 펴고 있었다. 밀대와 반죽 사이가 들러붙지 않게 밀가루를 솔솔 뿌려가며 미는 모습이 참 반가웠다. 아낙의 두 팔에 힘이 실리자 넓게 펼쳐진 반죽은 밀대에 말려 겹겹이 포개졌고, 그 행위는 몇 번 더 되풀이됐다. 밀대에 말렸다 펴길 반복한 반대기는 만두피처럼 엷어져갔다. 뭔가에 홀린 듯 그 광경을 지켜보던 우리는 임시로 마련된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섰다. 테이블은 이미 손님들로 채워져 북적였다. 호객을 위한 장사치들의 고함소리와
M이 말했다.인류의 미래는 두 가지 방향으로 갈 거라고. 다중행성 종이 되거나, 한 행성에 국한된 채로 남아 있다가 결국 멸종하거나.그리고 또 말했다.자기가 죽기 전에 인류가 화성에 착륙하지 않는다면 매우 실망할 거라고.어느 하루 잠잠할 날이 없는 M의 행적이 나의 평화를 깬다. 재수 없는 인간 같으니라고. 이런 말을 마구 지껄이는 M의 나이는 52세. 내 나이의 딱 두 배다. M에 대한 짜증은 잠시 접어둔 채 핸들에 부착된 휴대폰으로 다음 배달 장소를 검색한다. 점심시간이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달리고 또 달려야 하는 나는
사계절 철 따라 변해가는 산(山) 하(河) 들(野)의 형형색색, 갖가지 자태는 천지조화에 의해 긴 세월 자연이 만들어 준 아름다운 풍광은 신비롭고 희귀하여 보면 볼수록 볼 때마다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나라 유일무이한 자연박물관이 청송이다.청송군 전체(846㎡)가 24개 지역 명소이며 청송국가지질공원(2014년, 환경부)인 유네스코세계지질공원(2017년, UN)을 비롯하여 주왕산국립공원, 국제슬로시티, 아이스클라이밍성지, 산소카페 브랜드도시로 명품 사과의 고장답게 청송은 생태관광지로 볼거리 먹거리가 풍성한 농촌 자연관광지로 주목
어릴 때는 춤에 대한 생각이 단순했다. 그저 리듬감 있게 움직이는 것들은 모두 춤이었다. 가만히, 아무 생각 없이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속으로 빨려들 것 갗은 작은 동작들, 떨림들, 웅숭깊은 울림들, 반복되는 움직임이나 생각들도 그에 속했다. 가령, 뒤집혀진 매미나 거북의 버둥질이라든가, 바람이 불면 찰랑대며 흔들리는 포플러나무 이파리들의 손짓, 홍수 난 강의 흙탕물이 보여주는 덩실거림 같은.비가 오면 지렁이들이 어둔 흙에서 기어 나와 바깥나들이를 했다. 질퍽한 흙에는 지렁이들이 기어간 자국들이 이리저리 긴 금으로 이어져 있
내 자리에서 의자를 돌려 앉으면히말라야시다 침엽 사이로빗금처럼 쏟아지는 햇살그 햇살에 묻어온상념의 꼭대기에 걸터앉은 여린 기억들저녁연기처럼 피어 오른다밥 짓는 내음 곁에서장독대 닦던 어머니가 반들반들 보고 싶다풋 냄새 아련한 그 머슴애첫사랑의 기억에 달라붙은 달콤함이여태 객지를 떠돈다끝나는 지점에서 다시 엉키는덤불 같은 세월에다 호미질 하다나는 어느덧 여기쯤에 있다잊고 지냈던 배롱나무 간지럼 같은추억을 데리고세월의 이랑 사이를 걷고 있다자꾸 뒤돌아 본다
옷장을 열면햇살을 입고 싶은 깃들손 끝에 달려드는 외출들살갗 찢어진 불안한 하반신은공간의 틈을 멋으로 메우고젖고 구겨진 낡은 어깨도툭툭 털어 햇빛에 깃을 세우며저 만의 풍경을 갖는다동그란 하루를 내려놓는 저녁이면하나씩 버려지는 깃털들오늘을 벗어 넣은검정 비닐봉지를 툭, 던졌다터져버린 피로수거함에 들지 못한 깃털 하나가축 늘어진 하반신을 뚫고 나와날개를 잃고 허공을 부유한다수거함을 열면웅크린 깃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올 것 같은절룩거리는 밤,어두운 벽에 창을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