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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오디세이] 8. 금곡사지 원광법사부도탑
[삼국유사 오디세이] 8. 금곡사지 원광법사부도탑
  • 김동완 역사기행작가
  • 승인 2020년 06월 24일 21시 07분
  • 지면게재일 2020년 06월 25일 목요일
  • 15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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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통일 정신적 지주 원광법사, 세속오계 초석을 다지다
원광법사가 청년기에 수행했던 금곡사 전경.

672년 신라는 석전전투에서 당나라와 말갈 연합군을 맞아 대패했다. 신라 장군 효천과 의문이 전사했다. 이 전투에 비장으로 참전했던 김원술은 겨우 살아서 돌아왔다. 죽으려 했으나 그의 부관 담릉이 일단 살아남았다가 후일을 도모하자고 원술을 설득했던 것이다. 원술은 김유신의 둘째 아들이다. 무열왕 김춘추의 딸인 지소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났으니 문무왕에게는 조카였다.

김유신은 길길이 뛰었다. 왕명을 어기고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며 목을 베어달라고 요청했다. 문무왕은 “유독 원술에게만 무거운 형벌을 내릴 수 없다”며 뜯어말렸다. 왕명을 어긴 죄는 용서 받았으나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죄에 대해서는 혹독한 죗값을 치렀다. 김유신은 죽을 때까지 원술을 만나지 않았다. 지소부인도 원술이 자식의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며 만나주지 않았다. 원술은 3년 뒤 설인귀가 이끄는 당나라 말갈 연합군과 매소천성 전투에나가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어머니 지소부인은 여전히 냉담했다. 원술은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일생을 마쳤다. 평생토록 원술을 괴롭힌 화두는 세속오계(世俗五戒)의 ‘임전무퇴(臨戰無退)’였다. ‘전투에 나가서 물러서지 마라’는 계율이다. 그는 전쟁에 지고 살아서 돌아왔다는 이유만으로 왕명을 어기고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불충과 패륜의 시범 케이스가 됐다.

원술에게 평생 씻지 못한 치욕을 안긴 세속오계는 원광법사가 만들었다. 『삼국유사』 ‘원광서학’ 편은 세속오계가 만들어진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원광법사가 수나라에서 돌아와 청도의 가슬갑(가실사라고도 한다)에 있을 때 귀산과 추항이라는 선비가 찾아왔다. 그들은 평생 삶의 지표로 삼을 계율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다. 원광법사는 “지금 세속에 다섯 가지 계율이 있으니 첫 번째는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기는 것이고(사군이충 事君以忠), 두 번째는 효로써 부모님을 섬기는 것이며(사친이효 事親以孝), 세 번째는 벗을 사귀는데 신의가 있어야 한다(교우이신 交友以信)는 것. 네 번째는 전쟁에 나서서는 물러서지 않아야 하고(임전무퇴 臨戰無退), 다섯 번째는 살아있는 것을 죽일 때는 가려야 한다(살생유택 殺生有擇)는 것이다. 그대들은 이것을 실행함에 소홀히 하지 말라”라고 가르침을 내렸다.

2년 뒤인 602년(진평왕 19년) 가을에 백제군이 신라진영인 아막성(지금의 남원)을 포위했다. 귀산은 아버지 무은, 친구 추항과 함께 아막성 전투에 참전한다. 처음에는 전투가 유리하게 펼쳐졌다. 백제군이 패해 천산으로 물러나 잠복하고 있었다. 신라군이 공격을 펼치다가 형세가 여의치 않아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무은의 군사가 후미에 쳐졌다. 뒤쫓아온 백제군 복병이 갈고리로 무은을 걸어 말에서 끌어내렸다. 이를 본 귀산이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나섰다. “내가 일찍이 스승에게 듣기를 ‘무사는 군인이 되어 물러섬이 없어야 한다’고 했으니 어찌 감히 달아나겠는가”하고 적군을 닥치는 대로 해치웠다. 무은을 탈출시키고 자신은 추항과 함께 적군을 맞아 싸우니 시체가 들판을 메우고 말 한 필도 수레 한 대도 돌아가지 못했다고 한다. 전투를 승리로 이끈 귀산과 추항은 온몸이 칼과 창에 찔려 돌아오는 길에 죽었다. 왕이 신하들과 함께 들판에서 시체를 맞이하고 통곡한 뒤 예를 갖춰 장사를 지내고 귀산에게는 나마의 관위를, 추항에게는 대사의 관위를 추증했다. 귀산은 이 전투에서 보여준 결기로 『삼국사기』 ‘열전’에 이름을 올린다.

귀산이 아막성 전투에서 외친 ‘스승의 말씀’이 원광법사가 가슬갑에서 귀산과 추항에게 내려준 세속오계의 임전무퇴 계율이다. 귀산과 추항의 죽음으로 세속오계는 화랑오계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화랑의 행동강령으로 성문화됐다.

원광법사는 신라인으로서는 빠른 시기에 중국 유학을 떠난 선각자다. 『속고승전』은 원광법사의 성이 박씨이며 25살 때 뱃길로 진나라 금릉(지금의 남경)에 갔다가 진나라가 수나라에 먹히자 수나라 장안에 들어가 설법을 했다고 전한다. 공부가 깊었던 원광의 설법은 장안을 떠들썩하게 할 정도로 인기를 모았다. 귀국한 뒤에는 왕과 귀족으로부터 엄청난 신뢰를 받았다. 가슬사에 머물다가 황룡사에 주석하면서 외교문서를 맡았다. 그때 쓴 대표적인 외교문서가 ‘걸사표(乞師表)’다. 고구려를 치기 위해 수나라 병사를 출병해달라며 수양제에게 보낸 글이다. 걸사표를 받은 수양제는 이듬해 113만 대군을 일으켜 고구려를 공격했다. 고구려 을지문덕이 살수에서 이들을 맞아 30만 대군을 몰살시켰다. 이른바 살수대첩이다. 이 전쟁으로 수나라는 몰락의 길로 치달았다. 농민 반란이 일어났고 618년 장군 사마덕감과 우문화급이 쿠테타를 일으켜 양제를 목 졸라 죽였다. 이로써 수나라는 27년간의 짧은 역사를 마감했다. 수나라를 멸망은 원광법사의 걸사표에서 비롯됐다. ‘원광법사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다.

금곡사로 들어가는 길목의 화산곡지.

삼기산은 경주 안강읍 두류리, 검단리와 현곡면 내태리, 무과리에 걸쳐 있는 해발 524m의 산이다. 늙은 여우 귀신이 원광법사에게 자신의 팔뚝을 보여줬다고 해서 비장산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금곡사가 있는 산이라고 해서 금곡산라고 부른다. 원광법사의 족적은 삼기산 금곡사지에 뚜렷하다. 금곡사는 심산유곡에 자리 잡았다. 경주에서 이런 험한 길을 만나게 될 줄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첩첩산중 첩첩산중해도 이런 산골짜기는 처음이다. ‘첩첩첩첩산산중’이라고 해야 적절하겠다. 국도와 지방도로를 갈아타고 시멘트 포장 농로를 만났다. 산길로 향하는 농로는 위태위태했다. 차 한 대 겨우 지나다니는 길이다. 도로의 가장자리 시멘트는 땅과 벌어져 떠 있었다. 밟으면 시멘트가 떨어져 나가고 차가 낭떠러지로 곤두박질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이 떨렸다. 시멘트 도로가 끝나는 곳에 절이 있겠지 했다. 일반적으로 문화재가 있는 사찰은 포장도로의 끝에 있기 마련이다. 기대를 저버리고 급기야 좁은 비포장도로가 펼쳐지고 산길은 더 험악했다. 몸이 공중에 떠 있는 기분이다. 이 숫제 곡예비행이다. 울퉁불퉁하고 좁은 산길을 오르내리며 롤러코스트 타듯 운전하는 데 고라니가 차 앞을 획 지나간다. 깜짝 놀랐다. 원광법사가 홀로 수행하던 중 만났던 늙은 여우 귀신은 아닌가 했다.

금곡사 용왕전 뒤에 있는 용왕상.

금곡사는 작고 아담한 사찰이다. 약사여래를 모신 약사전이 가운데 있고 왼쪽에는 용왕전 오른쪽 언덕위에 삼성각이 있다.

원광법사 부도탑.

약사전 앞마당에 원광법사부도탑이 있다. 부도는 신라시대의 삼층석탑 형태로 갖추고 있다. 부도를 탑을 만든 경우는 희귀하다. 부도는 부서진 채 일부만 남아있던 것을 최근에 복원했다. 널따란 바닥돌을 깔고 높은 1층 기단에 3층의 탑신을 올려놓았다. 1층 몸돌과 3층 지붕돌만 원래의 것이고 나머지는 짜 맞췄다. 탑신의 1층 몸돌은 네 면마다 문 모양의 무늬를 새기고 그 안을 파내어 불상을 도드라지게 새겨 두었다. 통일신라 이전에 세운 것이다.

원광법사 부도탑감실에 새겨진 석가모니부처.

『수이전』은 원광법사가 30세에 삼기산에 들어와 홀로 수행했다고 전한다. 수행을 하던 중 늙은 여우 귀신을 만났는데 귀신의 권유로 중국 유학을 다녀왔으며 중국을 다녀온 이후 왕과 신하들의 인정을 받아 스승 대접을 받았다. 걸사표를 쓴 시기도 이때라고 전한다. 원광법사는 만년에 황룡사에 주석하면서 백좌도량을 열어 강설하기도 했다.

원광법사가 주석했던 황룡사지.

황룡사에서 입적했다. 안강의 서남쪽 골짜기 삼기산 금곡사에 부도를 세웠다. 처음 출가한 삼기산에서 홀로 수행한 뒤 죽어서 삼기산 금곡사에서 묻혔으니 수구초심이다. 삼기산 금곡사에 원광법사의 부도탑이 있는 까닭이다.

글·사진=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글·사진=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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