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에 이른다. 대체로 옛날 성인은 예악으로써 나라를 일으키고 인(仁)으로써 가르침을 베푸는데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하지 않았다. 제왕이 장차 일어나려고 할 때는 하늘의 명과 예언서를 받게 되니 반드시 남과는 다름이 있다. 그런 후에야 능히 큰 변화를 타서 제왕의 지위를 차지하여 큰일을 이룰 수가 있었다. 황하에서 등에 팔괘가 그려진 용마가 나왔고 낙수로부터 낙수에서는 등에 글이 새겨진 신비로운 거북이 나와서 성인이 일어났다. 무지개가 신모를 둘러싸 복희를 낳았고 용이 여등에게 감응하여 신농씨를 낳았다. 황아가 궁상의 들에서 놀
석탈해는 바다에서 왔다. 다른 성씨의 시조들이 대개 하늘에서 탄강한 것과는 달리 그는 거친 물결을 헤치고 서라벌의 아진포 하서지촌에 들어왔다. 이에 앞서 그는 왕이 되려는 포부를 안고 가락국에 들어갔다가 수로왕에게 쫓겨났다. 서라벌의 궁벽한 어촌 마을로 흘러 들어온 ‘바다의 왕자’가 처음 만난 사람은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는 혁거세의 해척 할미였다. 해척은 고기잡이하던 신량역천(身良役賤, 신분은 양인이지만 천민들의 일을 하는 사람)으로 아진의선은 왕에게 바칠 고기를 잡는 사람이었다.하루는 아진의선이 바다에 나갔다가 놀라운 광경을 본
혜공왕이 숙부 김양상과 김경신의 손에 죽고 난 뒤 신무왕이 왕좌에 오를 때까지 74년 동안 10명의 왕이 바뀌었다. 숙부가 조카를, 조카가 당숙을 죽이는 골육상쟁 끝에 새로운 왕이 탄생했다. 왕좌는 ‘피를 먹는 하마’였다. 진골이라면 누구든지 칼부림 끝에 왕이 됐고 먼저 자리를 차지한 왕은 뒤좇는 이의 칼을 맞고 무덤 속으로 들어갔다.신무왕대에 들어서야 왕의 자리가 안정됐다. 신무왕 이후 5대째 평화적 정권 이양이 이뤄지고 있었다. 태자에게 이어지거나 왕의 유조에 따라 계승됐다. 헌강왕대에는 태평성대가 펼쳐지는 듯 했다. “서울에서
경주 동남산 자락에 있는 삼릉은 천년 왕국 신라의 패망을 증언하는 기록이다. 삼릉의 주인은 제8대 아달라왕, 제53대 신덕왕. 제54대 경명왕이다. 삼릉 남쪽에 1기의 왕릉이 더 있는데 55대 경애왕릉이다. 4기의 왕릉은 모두 박씨릉이다. 신덕왕은 아달라왕의 먼 후손이고 경명왕과 경애왕은 신덕왕의 아들들이다. 이 왕릉의 주인을 놓고 논란이 많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언급된 왕릉 위치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왕릉 주인의 진위와 관계없이 삼릉이 전해주는 메시지는 선명하다. 이들은 모두 박씨왕이며 아달라왕이 죽은 뒤 728년 만
668년, 나당 연합군이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신라가 그렇게 소망했던 한반도 삼국통일이 눈 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이제 당태종이 무열왕에게 약속했던 ‘평양 이남 땅 신라 귀속’을 이행하는 일만 남았다. 그러나 당태종도 무열왕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밀약을 했던 아버지들은 죽고 자식들이 대를 이어 전쟁을 마무리했다. 당고종 이치와 문무왕 김법민이 그들이다. 고구려가 문을 닫자 당고종 이치는 신라를 포함한 삼국을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속내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미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를 비롯한 5개 도독부를 설치하고 신라를 계림
신라 왕경의 남쪽에 왕궁인 반월성이 있고 반월성 앞을 흐르는 강이 남천이다. 강을 끼고 벌지지 요석궁 천관사지 오릉이 이어진다. 남천은 신라인의 삶과 사랑이야기를 고스란히 전해주는 뮤지컬극장이다.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흘간의 사랑, 사지를 향해 떠나는 남편을 그리며 피눈물을 흘린 여인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김춘추가 김유신의 동생 문희와 짝을 지은 곳도 이곳이고 김유신과 천관녀의 비극적인 사랑도 남천을 가운데 두고 전개됐다. 남천은 신라인들의 애절한 사랑의 기록이다. 경주 남천은 경주시 구정동 산지에서 발원해 불국사와 남산, 박
8월 경주 남산 동록의 칠불암길은 삼국유사 속 설화(說話)를 풀어내는 꽃길이다. 남산동 칠불암길은 신라시대의 ‘피리촌(避里村)’이다. ‘세상을 피해 숨어 사는 마을’이다. 길의 시작은 서출지를 옆구리에 붙이고 있는 통일전이며 길의 끝에는 산 능선 아래 칠불암이 있다. 서출지는 소지왕과 선혜왕비, 궁궐 분수승이 벌이는 ‘사랑과 전쟁’ 이야기의 무대다. 이 못에서 왕비의 부정을 고발하는 투서가 나왔다. ‘거문고갑을 쏘라’는 글이 왕에게 전달됐고 왕은 갑을 쐈다. 갑 안에서 ‘선혜와 묘심’이 죽어 나왔다. 선혜와 묘심의 이루어지지 못한
표훈대덕은 의상대사의 10대 제자 중 한 사람이다. 그중에서도 진정 상원 양원과 함께 네 손가락 안에 드는 상족(上足)제자였다. 흥륜사 법당 10성에 이름이 오를 정도로 신라 불교에서 위대한 인물로 꼽힌다. 그러나 그에 대한 각종 기록이 문무왕대에서 경덕왕대까지 거의 100년에 걸쳐 흩어져 있어 의상의 직제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낳고 있기도 하다.표훈의 말년은 조금 괴로웠을 것으로 보인다. 경문왕 때문이다. 경문왕은 아들에 대한 열망이 집요했다. 삼국유사 기록에 옥경의 길이가 8치(약 24㎝)나 되는데도 아이가 생기지 않자
대나무는 겨울을 상징하는 사군자(四君子)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푸름을 잃지 않는 상록의 가치가 눈 내리는 한겨울에 더욱 돋보이기 때문이다. 곧게 자라고 휘어질망정 부러지지 않으며 속이 비어 넉넉하고 어떠한 시련에도 꼿꼿한 강직함이 군자의 모습을 닮았다. 눈이 쌓이면 설죽, 바람에 몸이 휘어지면 풍죽, 서리를 맞으면 상죽, 비를 맞아 잎이 처진 대나무를 우죽이라 불렀다. 고난이 더해질 때마다 고난을 이겨내는 빛나는 푸름과 곧음의 가치를 높이 샀다.대나무의 가치를 평가하는 이름은 사군자 말고도 많다. 한겨울에 더욱 빛나는 품성을 지
779년(혜공왕 15) 4월 초여름, 송화산 김유신 장군릉에서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었다. 바람 속에 김유신 장군이 얼핏 보였다. 준마에 오른 장군과 무장한 군사 40명이 회오리바람을 타고 어디론가 날아갔다. 바람은 대낮에 오늘날의 충효동 김유신장군릉에서 서천을 건너 곧장 시가지에 진입했다. 황리단길을 가로질러 대릉원에 있는 죽현릉(미추왕릉) 안으로 들어갔다. 김유신이 죽은 지 106년 되는 해의 일이다. 왕릉 안은 소란스러웠다. 땅을 울리며 통곡하는 것 같기도 했고 간혹 흐느끼는 소리도 들렸다. 하소연하는 소리가 나는 것 같기도
경문왕이 왕위에 오른 때는 정국이 국내외적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을 때였다. 당나라는 17대 황제 당의종 이최(재위 859~873)가 집권 3년 차를 맞고 있었다. 의종은 환관 왕종실과 짜고 아버지 선종의 유지를 조작해 동생 이자 대신 황제에 올랐다. 정적인 동생 이자를 죽이고 주색잡기와 사치에 빠져 민란이 끊이지 않았다. 당나라는 의종 집권기에 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다. 신라라고 형편이 나을 턱이 없다. 혜공왕이 시해당한 이후 경문왕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100년도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1
553년 진흥왕은 혈기방창한 스물한 살의 젊은이였다. 이때는 어머니 왕태후의 섭정에서 벗어나 친정체제로 돌입한 지 3년째다. 이미 연호도 ‘개국(開國)’으로 바꿨다. 연호 ‘개국’에 걸맞은 전기를 마련해야 한다는 의지에 불타올랐다. 그는 희망으로 가는 출구를 인도의 아육왕에게서 찾았다.아육왕(BC 265~238 또는 BC 273~232)은 아소카왕이다. 마우리아 왕조 3대 황제 중 한 명으로 인도 역사상 최고의 군주로 거론되는 인물이다. 불교사회의 이상적인 지배자를 뜻하는 전륜성왕의 모델이기도 하다. 왕위 계승 투쟁의 와중에 이복동
“AD 918년 사천왕사 벽화 속의 개가 짖었다. 3일 동안 불경을 독송한 끝에 개 짖는 소리를 멈추게 했다. 반나절이 지나자 개가 또 짖었다. 920년 봄, 황룡사탑의 그림자가 사지 벼슬을 하는 금모 집 뜰 안에 한 달 동안 거꾸로 서 있었다. 그해 10월에는 사천왕사 오방신의 활줄이 모두 끊어졌으며 벽화 속의 개들이 뜰 한가운데까지 달려 나왔다가 다시 벽 속으로 들어갔다” 『삼국유사』 ‘경명왕’조는 이렇게 81자의 짧은 기사로 처리했지만 기사는 암울하고 공포로 가득 채워져 있다.이때를 『삼국사기』는 “919년 사천왕사의 흙으로
『삼국유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을 꼽으라면 서슴없이 ‘현유가해화엄(賢瑜伽海華嚴)’조를 들겠다. 유가종의 대표선수 대현과 화엄종의 대표선수 법해의 법력 대결을 판타지 소설 쓰듯, 중계방송하듯 기록해 놓은 대목이다. 읽는 이가 상상력의 도움을 조금만 더 받으면 무협소설이나 활극 영화의 박진감 넘치는 장면까지 연출이 가능할 정도다.유가종은 법상종의 다른 이름이다. 대현은 법상종의 비조라 불리는 고승으로 남산 용장사에 거주했다. 해발 300m 금오봉 8부 능선에 있는 용장사지는 아직까지 탑과 미륵보살 좌대가 남아 있다. 이 절에는 돌
효자 손순(孫順)이 경주시 현곡면 소현(小見)마을에 정착한 때는 대략 1400년 전쯤이다. 흥덕왕(재위 826~836)이 손순의 효행에 감동해 소현리에 집을 마련해줬다. 마을 입구에 있는 ‘신라효자문효공손순유허비’ 비각이 있는 자리가 그 집터다. 소현마을의 옛이름은 ‘순우정(順友亭)’이다. 마을에 손순의 이름을 딴 정자가 있었는데 그대로 마을 이름이 됐다. 뒤에 도성인 경주에서 보니 이 마을이 자그마하게 보인다고 해서 소현이라 이름을 고쳐 불렀고 오늘날에 이르렀다. -‘경주풍물지리지, 김기문’마을은 작고 아담하다. 4·50여 호 정
처음 보는 광경이다. 산중턱에서 시작한 거대한 바위의 물결이 해발 670m 정상 아래 절터까지 역류하듯 이어졌다. 계곡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돌무더기가 산 아래로 흘러내려 쌓일 것은 쌓이고 멈출 것은 멈추고 깨질 것은 깨지고 다듬어질 것은 다듬어져 바위의 바다를 이뤘다. 그 모습이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떼 지어 정상으로 오르는 모습 같았다. 바위들은 합체해 돌의 계곡 전체가 커다란 한 마리 고래로 변신해 산을 향해 올라 가고 있었다. 스페인 몬세라트의 푸니쿨라 산악기차가 연상됐다. 하늘에서 촬영한 사진을 보면 신비롭기 그지
봄이 일찍 왔다. 2월 하순인데, 입춘 지나자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서둘러 왔다. 산하에 2021년 신상 봄이 자글자글하다. 화신풍(花信風)이 불었고 소식을 들은 매화가 몸을 먼저 열었다. 바람은 또 산수유 노란꽃을 데려왔다. 여기저기 매화 소식이 들리는가 하더니 뜨락에 산수화가 폈고 직박구리 떼 지어 답청 나와 산수유나무를 점령했다. 재잘거리는 새소리가 계곡에 봄 물 풀리는 소리 같다.운제산 오어지의 이른 봄 풍경은 괴질이 점령한 지구촌 풍경의 압축판인 듯 스산하다. 저수지 물이 바짝 말랐다. 계곡 상류에서부터 오어사 지나 원
용장계곡은 50여 개나 되는 경주 남산에서 가장 큰 골짜기다. 길이가 무려 3㎞나 돼 남산에서 가장 길고 수량도 풍부한 데다 계곡 전체가 암반으로 이뤄져 경관이 뛰어나다. 게다가 남산의 양대 봉우리인 금오봉(468m)과 고위봉(494m)을 가르는 경계선이어서 남산대표계곡이라는 말에 이견이 없다. 계곡물은 형산강의 상류인 기린내에서 울주에서 내려오는 큰물과 합류한다. 강은 북쪽으로 흐르면서 서악동에서 장매, 고속버스터미널 앞에서 서천, 동국대 앞에서 예기소 등으로 이름을 바꾸다가 포항 영일만에서 강으로서의 생명을 다한다.2월인데 벌써
신라제 25대 진지왕(眞智王)의 무덤은 선도산 자락에 있다. 경주 선도산은 고대 신라의 영웅들이 잠든 신후지지(身後之地)이며 산신에게 국가제사를 지내는 신라 왕경오악중 하나이다. 서악이라고 불렀고 서산이라고도 했다. 삼국통일의 초석을 다진 무열왕과 무열왕의 둘째 아들이며 당시 최고의 외교관인 김인문, 민애왕을 죽이고 신무왕을 즉위시킨 김양, 정복군주 진흥왕의 무덤이 불교를 국교로 공인한 법흥왕의 무덤도 선도산 자락에 있다. 헌안왕, 문성왕, 진지왕릉도 이곳에 들어서 있다.선도산 등산로의 시작점에 삼층석탑이 우뚝하다. 이 석탑은 모전
굴불사지(掘佛寺址)는 경주 금강산 서쪽 자락에 있다. 7번 국도 포항- 울산간 노선을 타고 가다 경주시청으로 꺾어지는 삼거리에서 백률사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기면 100m 정도 거리에 있다. 처음 이곳을 찾는 이라면 굴불사가 백률사를 지키는 곳쯤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청량한 소나무 떡갈나무 숲길 끝에 백률사로 가는 돌계단 앞에 자리 잡고 있으니 말이다. 한걸음이면 건널 수 있는 골짜기에 돌다리가 놓여 있고 돌다리를 넘어서면 사면석불이 서쪽을 향해 서 있다. 앞에는 삼존여래가 서 있고 삼존여래 뒤에 자리 잡은 사각형 자연석 네 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