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수 전 대한소아청소년과학회장·경북대의대 명예교수

환자 진료는 교수의 세 가지 업무 중 하나에 해당한다.

진료 이외의 업무는 강의와 연구이다. 이 세 가지 중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영역이다. 지금도 강의 도중에 응급상황이 발생하면 병실로 달려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최악의 상태에서 하나를 소홀히 또는 포기해야 한다면 연구 영역일 것이다. 매년 국내외 학회에 참석해서 그동안 진행해 온 연구 결과를 발표함으로써 자기의 연구업적을 증진시키고 대학의 위상을 높이는 귀중한 영역이며, 교수진급에 필수적인 사항이다. 해를 거듭할수록 이 분야는 어려워져서 스트레스가 보통이 아니다. 장기적으로 보면 연구 분야가 세 가지 업무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소아청소년과 교수들이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외국의 예로 보면 연구 전담 교수가 따로 있어서 진료와 구분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시행하는 곳도 있으나 보편화되어 있지는 않다.

지금도 수련병원에서는 진료 대체 의사를 모집 중인데 채용이 쉽지가 않다. 대부분의 의사는 취직을 했든지 개원을 했든지 해서 단기 일자리로 옮겨 삶의 환경을 바꾸기를 꺼린다. 그리고 대학병원 측에서 보면 보수 문제가 아니라 업무 수행 능력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노력만 한다고 갖춰지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학문을 받아들이고 자기 개발에 노력을 아끼지 않는 경쟁의식이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새로운 치료법을 익혀야 하기 때문이다. 수련병원에서의 소아청소년과 진료가 무너지면 그다음 수순은 1차 진료를 담당하는 개원가 즉, 자녀를 키우는 국민이다. 더 이상 전문의 배출이 안 되므로 기존의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를 찾아다닐 수밖에 없다. 의료계의 큰 파동이 아닐 수 없다. 한번 무너진 의료체계는 복원하는데 최소한 5년 이상이 소요된다.

필자가 재직할 때 이야기이다. 1999년부터 시작된 의약분업(진료는 의사, 약은 약사) 파동으로 전국 의사들의 분노가 하늘로 치 닫았다. 개원의, 의대 교수, 전공의 모두가 의사직을 걸고 반대한 상태였다. 특히 의대생은 의사국가고시도 거부 한 채 배수진을 쳤다. 필자도 과천 등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을 여러 번 갔었다. 연일 집회에서 이 법안의 잘못됨을 주장했지만 칼자루를 쥐고 있던 정부는 변화의 조짐이 없었다. 급기야 전국적인 전공의 파업으로 이뤄졌고 강 대 강 대치가 우리 대학병원에도 현실로 다가왔다. 전공의 전원이 병원을 떠나면 교수들도 동참하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응급치료를 필요로 하는 환자들의 치료는 외면할 수 없었다. 특히 필자의 전공이 소아 혈액 및 암 질환인데, 암 치료는 인체 내 암세포와의 전쟁을 의미한다. 치료는 계획적인 투약과 방사선 조사 등으로 지속하지 않으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신생아 중환자실도 퇴원이 불가하였다. 이런 비상 상황에서 교수들의 업무는 세 가지였다. 응급실 환아 진료와 신생아 중환자실과 일반 병실 그리고 주 2회 암 환아들의 외래 진료였는데. 필자는 파업이 종료되는 40일 내내 집에 가지 못했을 뿐 아니라 병원 내에서도 잠다운 잠을 이룬 날이 하루도 없었다. 명색이 과를 책임지는 과장이었고, 절대 다수가 암 환아 들이었으며, 이 분야의 진료도 나밖에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공의가 없는 병실에는 그동안 필자와의 ‘소아암 지지요법’에 대한 컨퍼런스로 중무장(?)된 유능한 간호사들이 큰 힘이 되었다. 아침이면 ‘교수님이 쓰러지면 안 되니 체력을 유지하라’라는 위로와 함께, 라면을 삶아 준 간호사분들께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래도 그때는 파업이 해결되면 일시에 돌아올 전공의들이 있었다. 지금의 상황과는 비교될 수 없다. 전공의가 없는 대학병원 진료는 바닷가 해변에 쌓아 올린 모래성과 다를 바 없다. 결국, 의약분업 파동은 항생제 등 특수 처방은 의사의 처방 권으로 인정해서 약의 오남용을 막고 약 조제는 약사가 맡는 것으로 일단락되어 현재까지 시행되고 있지만, 국민들의 불편은 가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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