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수 전 대한소아청소년과학회장·경북대의대 명예교수

필자가 의과대학 4년 동안 다닐 때 수업 시간은 주 44시간이었다. 시간당 학점으로 환산하면 일반 대학의 2배를 훨씬 넘는다. 방대한 의학을 주어진 시간 내에 가르치다 보면 이렇게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학문도 마찬가지지만 가르친다고 다 아는 것은 아니다. 시험을 거치면서 복습하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오래 기억할 수 있게 된다. 심지어 5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당시 시험 문제를 기억하는 부분도 있을 정도이다. 이렇게 4년이 지나면 입학 때 동료들의 30% 정도는 선배들로 바뀌게 된다. 다른 학과처럼 과목별 재수강이 가능하지 않아서 1년씩 유급하기 때문이다. 전국 수능 상위 3,000명이 의과대학에 입학했어도 조금만 방심하면 진급하지 못한다.

60년 전에는 암 진단을 받으면 대부분 생을 포기하였으나 지금은 다양한 치료방법을 통해서 소아암일 경우 85% 이상이 완치가 되는 세상을 맞이하게 되었다. 뇌질환이나 심장질환도 조기 발견과 적절한 치료를 하면 완치되는 기쁨도 함께할 수 있는 세상이다. 눈부신 현대의학의 발전과 이를 수행할 인재 즉, 각과의 전문의를 키운 덕분에 이루어진 결과이다. 이렇게 질병을 치료함에 있어서 더 나은 결과를 얻기 위해 전문의, 더 나아가서 전임의(전문의 다음 단계인 2년 과정의 세부 분과 전문의) 제도가 만들어졌다. 앞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단 한 가지만의 질병만을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의사가 필요할 지도 모른다. 전문의와 전임의 역시 국가자격시험을 통과해야만 자격증을 획득할 수 있다. 각과 전문의는 치료를 할 수 있는 질환이 구분되어 있어서 전문 분야별로 최상의 진료를 제공할 수 있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직업이 이래야만 신뢰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질병별로 각 전문의에 의한 진료가 적절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렇지 못한 진료는 적절하지 않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소아청소년과 같이 생명에 필수적인 과의 전문의 과정 4년은 그야말로 인생사 중에 최고로 노력한 기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전문의에 의한 진료는 사라지고 의사면허증만 있으면 모든 질환을 치료할 수 있는 60년 전 상황으로 후퇴하고 있다. 일반의와 각 과 전문의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차선을 이탈해서 남의 차선으로 주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소아청소년 영역의 질환의 진료 침범은 도를 지나칠 정도이다. 그러나 이것을 바로잡을 국가는 수수방관하고 있다. 아니 질서를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다. 이것을 바로잡지 않으면 소아청소년의 건강은 소아청소년과 전문의에게 맡겨지지 못하고 비전문의에 의해 방치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금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지원이 급감하게 된 주된 원인으로, 오래전부터 국가의 정책이 잘못된 것을 방치해서 발생된 것으로 파악하고, 시정하지 않으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가 없다.

인간의 생명은 난자와 정자가 결합하여 배합체가 만들어지면서 시작되며, 세포분열이란 정교한 과정을 100회 하고 나면 출생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15%는 여러 가지 원인으로 임신 3개월 이내에 자연유산이 된다. 그래서 출생은 모두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출생 후에도 생명에 지장을 주는 각종 유전 질환(염색체 이상 0.6% 등)과 신체의 선천적 결함이 상존하여 생명을 위협한다. 현대의학은 암도 완치시키고 모르던 DNA 유전자 질환도 찾아내는 시대이지만 우리는 아직도 인체의 아주 작은 부분 만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정상 수명을 산 사람일지라도 부검해 보면 생각보다 선천성 기형이 꽤 많이 발견된다고 한다. 다만 은혜로 생명을 잃을 정도까지 심화되지 않아서 오래 살았을 뿐이다. 그러나 나이가 어릴수록(1세 미만) 선천성기형에 의한 사망의 빈도는 높아 전체 사망의 2위를 차지한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정상적인 신체 구조 외에도 수 없이 많은 방어 기전이 존재한다. 한 예로 ‘무과립구증’이 있다. 세균과 싸워야 될 혈액 내 과립 백혈구(무장 군인의 역할) 수가 아주 적어서 패혈증으로 조기 사망할 수 있는 병이다.

이러한 결함들은 출생하자마자 지금까지 개발된 모든 진단 방법을 동원한다고 해도 다 밝혀낼 수가 없다. 어느 정도는 알 수 있겠지만 비용, 신체에 미치는 악영향 등을 고려하면 득보다 실이 많아서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성장하면서 각 질환별로 증상이 나타나면 이에 해당되는 검사로서 진단을 붙이게 된다. 그래서 소아는 나이가 어릴수록 원인이 밝혀지지 않아 치료가 난항에 빠질 확률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치료 후 사망하였다 하더라도 사인을 지금까지의 의료기술로 밝힐 수 없는 질환들이 많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료와 관련해서 사망한 경우에 구속 수사를 고집한다. 치료 중 사망까지 응급처치를 위해서 혼비백산 최선을 다하다 보면 의사의 방어 수단인 의무기록도 제대로 기록하지 못한 채 유가족과 수사기관에 의해서 증거물로 압수되기 일 수이다. 환자 살리기에 최선을 다한 의사에게 적어도 진료 기록 완성을 위한 최소한의 시간은 주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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