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회 경북일보 청송객주 문학대전

최승연 작

4호선 환승역에서 내린 봄이 두 눈을 번갈아 비볐다. 눈곱이나 티끌이라도 들어간 듯 눈이 따끔거렸다. 속눈썹 몇 개를 뽑아내도 이물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봄은 눈을 꼭 감았다가 다시 떴다. 울지 않았는데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봄이 다시 눈을 깜빡였다. 플랫폼 기둥을 감싼 지하철 노선도가 환해지고 글자들이 또렷이 보였다. 시력이 한결 좋아진 느낌이었다.

마포역 3번 출구에서 지상으로 올라온 봄은 뿌연 하늘에 낮달이 떠 있는 것을 보았다. 맑은 날에도 잘 볼 수 없는 달을 미세먼지 나쁨 수준인 날에 보다니. 언젠가 엄마가 말해주었다. 죽은 이가 누군가 보고 싶을 때 나오는 게 낮달이라고. 봄은 문득 궁금해졌다. 죽은 사람 중 누가 자신을 보고 싶어 하는 걸까.

거리에 즐비한 간판 속 글자들이 시야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흐릿하게 보였던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도시재생사업 관련 세미나를 알리는 플래카드가 바람에 펄럭였다. 후원하고 주최하는 측은 한때 봄이 근무했던 환경부 산하 청년드림팀이었다. 팀장인 기정은 『힐링시대와 건강한 삶』이라는 책을 발간하고 지난 주말에 북 콘서트까지 끝냈다. 드림팀 멤버들이 행사 사진과 동영상을 앞다투어 올려준 덕분에, 봄은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어도 그날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봄의 폰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봄은 누군가 링크를 걸어놓은 기정의 인터뷰 기사를 읽기 위해 보도에 멈춰 섰다. 성공하려면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제목이 거슬렸지만, 사람을 통해서 삶이 피어나고 역사가 만들어지며 기적이 일어난다는 기정의 주장엔 고개가 끄덕여졌다. 오래전 독서토론에서 다루었던 성공한 사람들의 삶과 사랑 이야기에 기정이 여전히 꽂혀있음을 알 수 있었다. 봄은 기정의 모바일 청첩장을 찾아 다시 한번 시간과 장소를 확인했다. 기정이 결혼식을 올릴 호텔에 여장을 풀 예정이었다.

‘축하! 좋은 일이 이어지네?’

기정의 결혼 소식을 처음 접하고 봄이 축하 문자를 보냈을 때, 기정은 작은 이모티콘 하나로도 응수해주지 않았다. 후배였던 기정과는 한때 깊은 사이였지만, 누나 동생으로 남기로 쿨하게 합의했었기에 투명 인간 취급받아도 그리 서운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기정이 벌써 여자 친구에게 휘둘리고 눈치를 보는 건가 싶어 씁쓸해졌다. 봄은 마스크를 벗고 목구멍에 고인 가래침을 몇 번 보도에 뱉어냈다.

사내 독서 모임을 이끌었던 기정은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장 아프게 한다는 말을 남기고 봄을 떠났다. 봄은 삶에서 누군가 너무 가까이 다가오는 걸 힘들어했고 내치는 습관이 있었다. 가족이 그러했고 기정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만약 그때 기정이 강하게 붙들어주었더라면 봄은 기정을 떠나지 않았을까. 기정이 봄의 본심을 잘 헤아려 해석해주길 바랐는데 기정은 매번 봄의 기대에 못 미쳤다. 속마음과 다르게 행동하는 봄이 기정은 버거웠는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니 봄은 어이없을 만큼 쉽게, 아니 너무 아쉽게 기정과 헤어진 것 같았다. 기정과 멀어진 뒤에야 봄은 기정과 가장 가까웠음을 알아차렸다. 다시는 그 누구도 기정만큼 가까이 지낼 수는 없을 터였다.

“뭐 하러 호텔에서 자? 우리 집으로 와!”

호텔에 머물 거라는 봄의 말에 남동생, 여름이 화를 냈다. 모델 겸 배우로 활동하고 있는 여름과 연락이 닿지 않아 도심 호텔에 예약했고, 막 로비로 들어서려던 참이었다. 봄은 다시 여행용 가방을 끌고 여름이 사는 평창동으로 향했다. 스페인에서 가이드 일을 하던 봄은 기정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먼 하늘을 날아왔다.

북한산 기슭에 지어진 여름의 집은 각각 독립된 남서향의 빌라 중 가장 뒤편에 있었다. 주택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골짜기에 숨은 형국으로 은밀한 별장 같았다. 정원수들이 이전보다 푸르고 무성해져 있었다. 건장하고 잘생긴 경비원이 슈트케이스를 여름의 집 앞까지 옮겨 주었다.

여름의 집 현관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봄은 곧장 집 안으로 들어갔다. 여름과 여름보다 잘나가는 동료 배우인 올케는 보이지 않았다. 거실은 서빙하는 도우미들과 낯선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연회가 막 끝났는지 파티복을 입은 사람들이 소파에서 러그에서 제멋대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와인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다. 봄은 처음 보는 그들을 일별하며 거실을 가로질러 이 층으로 향했다.

층계참에서 키스하는 어린 커플과 몸이 부딪쳤지만, 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볼이 붉은 어린 아이돌 같은 아이들이 이층 소파에 엉기어 쓰러져 있었다. 흐느적거리는 몸짓과 게슴츠레한 표정으로 보아 마리화나라도 피운 것 같았다. 봄은 이전에 한 번 묵은 적 있는 손님방으로 들어갔다. 방 한가운데에 높고 넓은 침대가 놓여있었다. 봄은 매트리스 위에 몸을 던져 드러누웠다가 이불 속에 낯선 아이가 잠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손님이 데리고 온 아이인 듯했다.

아이가 깨지 않게 조심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바로 옆에 갓난아기 한 명이 더 누워있는 게 보였다. 봄의 기척에 놀란 아기가 뒤척이며 눈을 떴다. 아기는 잠투정하며 보채기 시작했다. 갓난아기를 재워야겠다고 생각한 봄은 어릴 적 엄마가 동생에게 했던 것처럼 아기의 가슴을 토닥거려주었다. 그러나 아기는 잠들지 않고 뻗대며 칭얼댔다. 작고 연약한 아기는 토닥이며 달랠수록 더 작아지고 몸피가 줄어들었다. 당황한 봄이 수습하려 했지만, 봄의 손이 닿으면 닿을수록 아기의 몸통은 점점 더 작아지는 것이었다. 마치 아기의 몸이 닳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한 줌으로 졸아든 아기의 몸은 그만 사라지고 말았다. 머리만 남은 아기의 모습은 기괴했다.

얼이 빠진 봄이 이불과 침대 주변을 정신없이 뒤적이고 있는데, 옆에서 자고 있던 큰아이가 일어났다. 서너 살쯤으로 보이는 아이는 봄에게 관심이 없었다. 제 동생을 찾지도 않았다. 아이는 눈을 비비고 하품하며 구석에 있던 제 장난감만 집어 들었다. 아이가 동생을 찾기 전에 아기의 몸통을 찾아 제 자리에 붙여놓아야겠다고 생각한 봄은 몸을 바짝 엎드려 침대 밑바닥을 살펴보았다. 침대 밑은 거뭇한 먼지가 묻어날 뿐 아기의 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언제 일어났어?”

“울지도 않고, 기특해라!”

아이들의 엄마인 듯 친척인 듯, 여자 둘이 수다를 떨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봄은 얼른 이불자락을 끌어당겨 갓난아기가 자는 것처럼 꾸며놓았다. 숨을 죽이고 벽 쪽으로 비켜선 봄은 어떤 고백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그들은 갓난아기를 찾을 듯 찾을 듯하면서도 장난감을 든 큰아이만 챙겼다. 아기가 누워있는 지점은 들춰보지도 않았다. 그들 중 누구도 아기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처음부터 갓난아기의 존재가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벽에 붙어서서 떨고 있는 봄을 못 본 것인지 못 본 척하는 것인지, 봄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들이 큰아이만 데리고 방을 나갔다. 봄은 침대로 다가가 이불을 들추어 보았다.

내내 보채던, 머리만 남은 아기가 보이지 않았다. 여독이 풀리지 않아 헛것을 본 걸까. 하지만 헛것이라기엔 너무 생생했다. 다시 살펴보았지만, 아기는 없었다. 아기가 누워있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봄에게 잠시 보였던 아기는, 그 섬약한 아기는, 닳아버린 듯 달아난 아기의 몸통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봄은 무섭고도 어지러워 침대에 몸을 묻었다. 머리만 남아있던 아기의 기괴한 모습이 내내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오래전, 기정의 아이를 지웠던 경험이 있는 봄은 몸서리를 쳤다. 그 기억은 불쑥 한 번씩 떠올라 뒤통수를 치곤 했다. 너무 고단해서,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거라고, 머리를 감싸 쥔 채 웅크린 봄은 그 자세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얼마나 잤을까. 봄이 스스로 깰 때까지 동생이나 올케는 봄을 깨우지 않았다. 가사도우미도 봄을 방해하지 않았다. 단잠이었다. 며칠을 내리 잔 것 같았다. 봄은 폰의 날짜와 시각을 확인해보았다. 기정의 결혼식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북 콘서트에 참석하지 못한 것처럼 기정의 결혼식에도 결국 참석하지 못했다. 성의나 마음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오롯이 몸 탓이었다. 유럽의 끝, 포르투갈 로까 곶까지 가는 투어를 세 타임이나 연속으로 뛰고 곧바로 서울행 비행기를 탔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지금쯤 기정은 괌에서 신혼여행을 즐기고 있으리라.

봄은 밴드에 들어가 청년드림 멤버들이 올린 결혼식 사진과 동영상을 클릭해보았다. 기정은 내내 싱글벙글했고 띠동갑 어린 신부의 얼굴은 화사하기만 했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낯익은 얼굴들도 손 하트를 날리며 활짝 웃고 있었다. 축가는 벚꽃엔딩, 기정이 직접 불렀다. 노래를 곧잘 하던 기정이 부르는 노래를 직접 듣고 싶었는데. 봄은 기정의 모습이 담긴 컷을 확대해서 보고 또 보았다. 기정의 노래는 몇 번이고 들었다. 사진과 동영상은 총무와 회계 이외에도 회원들이 올린 것이 더 있었다. 봄은 그것들을 하나씩 클릭해보면서 아쉬움을 달랬다. 그런데 기정은 왜 밴드 프로필 사진을 바꾸지 않는 걸까. 기정은 몬세라트 수도원의 맑고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한 공중 부양 사진을 몇 년째 그대로 올려두고 있었다. 언젠가 기정과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났을 때 봄이 찍어준 것이었다.



‘하니, 언제 돌아와?’

왓츠앱에 담긴 레오의 질문에 봄은 대답 대신 화려한 촛대가 돋보이는 기정의 웨딩 사진 몇 장을 전송해주었다. 산티아고 순례길 초입에 있는 알베르게에서 그림을 그리며 봄을 기다리고 있을 레오. 아마 레오는 봄이 보낸 사진을 보고 그림 그리기를 시도할 것이다. 야곱의 길에서 처음 만났고 몇 번 더 마주치면서 사랑하게 된 레오. 도플갱어가 아닐까 싶을 만큼 레오는 기정과 닮았다. 힐링센터 건립이라는 꿈을 가진 레오는 세상의 끝, 피니스테라 완주 말미에 말에서 떨어졌다. 척추를 다쳐 하반신이 마비된 레오는 그림 그리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하니, 목적을 가지고 사는 게 아니라 살다 보면 목적이 생기는 거야. 의미를 가지고 인생을 사는 게 아니라 살다 보면 의미가 생기는 것처럼. 내 그림도 그래. 주제 의식이나 목적을 가지고 그리는 게 아니라 무언가 그리다 보면 거기서 의미를 찾아낼 수가 있거든.’

레오의 확신과 열정에 봄은 레오 곁에 오래 머물렀다. 어쩌면 봄은 레오와 결혼을 하게 될지도 몰랐다. 스페인의 맑고 쾌청한 하늘 아래에서 레오와 함께 산 지는 꽤 되었지만, 아직 혼인신고나 예식은 올리지 않았다. 레오에게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 아내가 있었고, 일곱 살짜리 아들, 아드리안도 있었다. 아드리안은 세상에 둘도 없을 개구쟁이에다 말썽꾸러기였는데, 천사 같은 리타 이모가 어릴 때부터 보살펴주었다. 덕분에 봄은 가이드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

‘어디가?’

봄이 아무 말 없이 짐을 꾸렸을 때 레오보다 놀란 사람은 리타 이모였다. 순례자들의 식사를 준비하고 청소와 빨래를 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포도밭과 와이너리를 관리하며 척척 일을 해내는 억척스런 리타 이모가, 한국으로 떠나는 봄에게 꼭 다시 돌아오라며 손을 잡아주었다. 리타 이모의 큰 손에 한참을 붙들린 봄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무엇 때문인지 스페인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봄이 오면 하얗게 핀 꽃 들녘으로 당신과 나 단둘이 봄 맞으러 가야지, 바구니엔 앵두와 풀꽃 가득 담아 하얗고 붉은 향기 가득 봄 맞으러 가야지…….

봄은 오래 목욕을 하고 와인을 마시며 자우림의 노래를 들었다. 동생이나 올케가 방문을 두드릴 때까지 일 층으로 내려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기정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인지 동생이나 올케의 얼굴도 그다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곧장 스페인으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여름의 집에서 죽은 듯 고요히 지내고 싶었다.

음악이 멈추자 방안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란 봄이 공처럼 튀어 올랐다. 침대 밑을 살펴본 봄은 은밀한 공간에서 무언가가 적막의 끄트머리를 잡은 채 숨죽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봄은 누군가에게 제 알몸이라도 들킨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문득 생각난 듯 봄이 전신 거울 앞에 서서 제 모습을 비춰 보았다. 봄의 얼굴이나 몸은 보이지 않고 거울 속에 비친 문을 열고 삼십 대 초반의 건강하고 상큼한 미인이 봄 앞으로 걸어 나왔다. 올케였다. 올케는 봄에게 바짝 다가와 팔짱을 꼈다.

“형님, 그만 식사하러 내려가셔야죠.”

일 층 다이닝룸엔 여름이 식탁에 앉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꽃장식과 함께 한식과 양식이 어우러진 식탁 가운데에 이단 케이크가 눈에 띄었다.

“오늘 누구 생일이야?”

“형님 생일이시잖아요?”

“누나, 정말 몰랐어?”

봄은 감동하여 말문이 막혔다. 요즘 세상에 어떤 올케가 시누이 생일을 챙겨주는가. 올케도 보통 올케가 아닌, 제 몸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시간이 부족한 바쁘디바쁜 여배우가 아닌가. 그만한 마음 씀씀이라면 제 남편도 잘 케어해 줄 것 같았다. 봄은 예쁜 올케가 한결 사랑스러워 보였다.

“누나, 실은 오늘 엄마 기일이기도 하잖아.”

동생은 설마 몰랐던 건 아니겠지, 하는 표정으로 봄을 빤히 쳐다보았다. 봄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엄마가 돌아가셨어? 언제?”

“누나, 정말 이러기야?”

봄의 기억에 엄마는 잠시 집을 나갔을 뿐이었다. 폐가 좋지 않았던 엄마는 자주 집을 떠나있었지만 언제나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봄은 엄마가 깊은 산골에서 요양 중이거나 고향 집에 돌아와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 누나랑 연락이 안 돼 누나가 바로 못 들어왔었잖아. 나중에 누나 참 많이 울었는데 정말 기억 안 나? 원래 불효자가 많이 우는 거라고 아빠가 산소에서 누나 등을 한참 토닥여주었잖아…….”

여름이 봄에게 소상하게 회상해주었다. 봄은 머리를 감싸 안고 기억의 편린들을 끌어모았다. 사표를 냈고, 기정과 헤어졌고, 그리고 산티아고 드 콤포스텔라 성당에 이르기까지 3개월 남짓 오직 걷기만 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의 기억은 뒤죽박죽에다 폭격을 맞은 듯 파편화되어 있었다. 올케도 있는데 동생이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먹먹해진 봄이 울음을 삼키려 물을 들이켰다.

식사하기 전 여름은 엄마와 봄을 위해 중얼중얼 기도했다. 와인 잔을 부딪치며 건배하고 향도 피웠다. 봄은 동생이 아직 어리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저것 따져가며 상차림을 한 걸 보니 제법 철이 든 것 같아 흐뭇했다. 제 밥벌이도 곧잘 해내고 있는 동생이었다. 어릴 때부터 공을 잘 다루었던 여름은, 유소년 축구선수로 스페인에서도 활약했다. 거듭된 무릎부상 때문에 선수 생활을 그만두었지만, 제대 후 광고지 아르바이트 중 길거리에서 캐스팅되었고 패션모델로 활동하는가 싶더니, 탤런트와 배우로도 영역을 확장했다. 최근에는 몇몇 예능 프로에도 얼굴을 내비치는 중이었다. 약간의 스캔들이 있던 네 살 연상의 올케와는 같은 드라마를 하면서 친해졌고 결혼까지 이르렀다.



봄은 빌라를 나왔다. 실은 여름의 집을 언제 어떻게 나왔는지 기억에 없었다. 동생과 올케가 감독과 미팅이 있어 주차장을 통해 나갈 때 같이 suv 승용차 뒷좌석에 오른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와인을 너무 많이 마신 걸까.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봄이 기억하는 가장 어릴 적 살았던 집 앞 골목에 와있었다. 그동안 한 번쯤 그 옛집을 가보고 싶었지만, 그 집이 어디에 있었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고, 그곳에 갈 시간도 방법도 없었는데 어찌 된 셈인지 아무도 살 것 같지 않은 옛집에 봄이 홀로 서 있었다.

익숙한 골목 맨 안쪽에 익숙한 빨간 대문이 봄을 맞아주었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대문은 생각보다 낡지 않았다. 놋쇠로 된 사자 문양과 둥근 손잡이도 그대로 달려있었다. 봄은 힘껏 대문 속 작은 문을 밀쳐보았다. 쪽문은 쉽게 열렸다. 문은 열렸지만 봄은 선뜻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선머슴 같았던 봄은 언제나 벌컥, 대문을 열어 엄마에게 야단을 맞곤 했다.

봄이 용기 내어 두어 걸음 마당 안으로 발을 내디뎌보았다. 마당에 잡초가 무성할 것이라는 봄의 예상은 빗나갔다. 꽃 따위는 피어있지 않았지만, 잔디가 깔린 마당도 현관 앞 계단도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한눈에 봐도 사람이 사는 집이었다. 황무지나 폐가가 되어있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봄은 몸을 도사렸다. 오래 비워 둔 집이 왜 이리 깨끗한 걸까. 동생이 다녀가기라도 한 걸까.

한창 주가를 올리며 밀려드는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정신없을 동생이 뜬금없이 어릴 적 살던 집을 챙길 리는 없었다. 봄도 텔레비전 드라마나 광고를 통해서 동생을 만나는 게 빠를 정도였다. 그렇다면 누가 이 집을 청소하고 관리하는 것일까. 혹 동생이 누군가에게 시킨 것은 아닐까. 마음만 먹으면 이까짓 것, 일도 아닐 터였다. 그렇지만 동생이 왜? 봄보다 여섯 살 아래인 여름은 이 집의 존재나 위치를 알 턱이 없었다.

봄은 베란다 창을 통해 집안을 들여다보았다. 거실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할머니, 아니 엄마였다. 무슨 죄가 그리 많아 맨 날 아파 골골하는지, 할머니의 모진 소리를 듣고도 엄마가 집으로 돌아온 것일까? 가만, 엄마는 세상을 떠났다고 하지 않았나? 봄은 헷갈렸다. 깊은 산골로, 병원으로 자주 요양을 떠났던 엄마가 병이 나아 집으로 돌아온 걸까. 젊은 날 툭하면 집을 비웠던 엄마라서 시점이 더 헷갈렸다. 아무려나, 엄마가 돌아와 집 안에 있었다. 말도 되지 않는 풍경이었다. 봄은 흥분을 가라앉히며 얼굴을 유리창에 바짝 갖다 댔다. 이중창을 통해 본 엄마는 봄이 마지막으로 본 모습보다 훨씬 젊고 건강해 보였다.

빛이 반사되어 거실 안 상황이 또렷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엄마 앞에는 보행기가 놓여있고, 한 살이나 되었을까, 성별을 가늠할 수 없는 아기가 타고 있었다. 아기는 엄마가 숟가락으로 떠먹여 주는 이유식 같은 것을 아기새처럼 받아먹었다. 저 아기는 누구일까.

엄마가 거실 유리창 너머 봄이 있는 쪽을 흘깃 쳐다보았다. 봄은 깜짝 놀라 얼굴을 유리에서 떼어냈다. 그리고는 몸을 벽 쪽으로 숨겼다. 엄마가 현관문을 밀치고 밖으로 나왔다. 봄은 현관문 뒤에 몸을 붙인 채 숨을 죽였다. 엄마는 마당을 한 번 휘둘러보더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픔도 슬픔도 걱정도 기쁨도 깃들어있지 않은 밋밋한 표정을 한 엄마의 얼굴은 친근하면서도 낯설었다. 엄마가 허공에 손바닥을 내밀었다. 하늘에 구름이 몇 점 떠 있긴 해도 비가 올 것 같지는 않았다. 엄마는 봄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지갯빛 소매가 달린 개량 한복을 입고 있었다. 치맛단의 먼지를 툭툭, 털어낸 엄마가 현관 열쇠를 아기 머리통만 한 소라고둥 깊숙이 집어넣었다. 열쇠를 고둥에 넣고 그 고둥을 화분 사이에 엎어놓는 엄마의 외출 습관은 봄과 똑같았다.

엄마가 대문을 나선 뒤, 봄은 다시 거실 유리창으로 다가가 아기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한참을 관찰해도 아기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봄은 궁금해서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화려한 꽃무늬 담요를 덮은 아기가 거실 소파에 누워있었다. 아기는 그새 잠이 든 모양이었다. 엄마와 잘 먹고 잘 놀았던지 곤히 잠든 아기는 쉽게 깰 것 같지 않았다. 이 아기는 누굴까. 혹 엄마의 숨겨둔 아이라도 되는 걸까. 봄은 아기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어딘지 낯이 익은 아기는 엄마를 닮은 것도 봄을 닮은 것도, 아니, 기정을 닮은 것도 같았다.

잠든 아기 옆에 오도카니 서 있던 봄은 방안을 둘러보았다. 벽 한쪽에 울긋불긋한 물고기들이 뛰어놀던 커다란 어항이 보이지 않았다. 아빠가 관리하던 물고기 관련 용품이 놓였던 자리도 비어있었다. 집안의 가구는 이전에 쓰던 것들이었다. 장식장 속은 좀 단출해졌는데 못난이 인형과 효자손 같은 오래된 장식 소품들은 그대로 들어있었다. 바닥도 그런대로 깨끗했다. 봄이 아는 엄마는 집 안을 정리 정돈하거나 아이를 챙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엄마가 아기를 돌보고 살림을 하다니. 인기척이 나고 엄마가 돌아왔다. 봄은 엄마를 피해 베란다의 벤자민 고무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엄마는 어디에 다녀오는 걸까.



-저희 아버지를 살려주세요!

기정의 북 콘서트와 결혼 이벤트가 끝나고 한동안 잠잠하던 밴드에서는 청년 드림 멤버들이 특정 정당 해산 국민청원을 주도하고 인원을 동원하느라 연일 야단법석이었다. 한 회원은 자신의 아버지가 전 재산을 투자해 지은 시골 창고에 임차인이 엄청난 양의 쓰레기를 몰래 유기하고 달아났다며 커뮤니티에 해법을 구하고 있었다. 서른 남짓한 멤버들은 매일같이 이런저런 일로 흥분하고 들끓었는데, 봄은 그 모든 일에 아무런 느낌도 감흥도 일지 않았다. 곧 진행될 기후변화 세미나도 엇비슷한 맥락으로 흘러갈 것이고, 무언가 조금씩 삐걱거리는 드림팀도 머지않아 사라질 것 같은 수순을 밟고 있었다.

봄은 특유의 무심함과 냉정함에 자신을 내버려 두었다. 스페인에서 머물 때는 기정의 일거수일투족이 다 궁금했었는데, 막상 그를 만날 수 있는 지척에 와서는 모든 것이 다 시큰둥해져 버렸다. 기정이 결혼이라는 의식을 통과해서인지 그에 대한 미련이나 집착이 신기하리만치 싹 사라져버린 것이다. 꿈에도 그리던 기정의 모습은 언제든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실컷 볼 수 있었다. 그것들을 보고 또 보면서 기정에게 질려버린 것일까.

이제 봄의 관심은 오로지 그 옛집에 가 있었다. 봄은 날마다 그 옛집을 방문했다. 봄은 오직 그 일을 위해 스페인으로 돌아가는 일정까지 미루었다. 남동생 부부는 여전히 바빴고, 봄은 호텔보다 안락한 여름의 집에서 기약 없이 기거하고 있었다.



엄마의 일상은 단순하고 지겨우리만큼 단조로웠다. 처음 보았을 때처럼 여전히 아기에게 무언가를 먹였고 외출했다. 외출할 때 아기가 잠이 드는 것인지, 아기가 잠들고 나면 엄마가 외출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엄마는 자주 혼자 어디론가 다녀왔다. 가끔 엄마의 손에 바나나나 우유가 들려져 있기도 했다. 엄마와 아기가 먹는 양식인 것 같았다. 엄마는 기계처럼 똑같은 일상을 반복했다. 아기를 돌보고 외출하고, 또 아기를 돌보거나 외출했다.

봄은 엄마가 어디에 다녀오는지 궁금했다. 집을 나선 엄마는 줄곧 앞만 보고 걸었다. 버스나 지하철 같은 차량을 이용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체력이 약한 엄마는 멀미를 심하게 하는 편이었다. 언젠가 아빠와 함께 상가에 문상을 가느라 어쩔 수 없이 차를 타야 했을 때, 엄마는 귀밑에 멀미약을 붙이며 파르르 떨었다. 엄마에게는 걷는 게 보약이라던 아빠의 말도 생각났다. 봄은 인도를 따라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발을 내딛는 엄마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엄마를 미행했다.

엄마가 삼거리에서 산복도로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모퉁이 베이커리에 들러 케이크를 하나 사 들고 나온 엄마가 언덕배기에 자리 잡은 작은 교회로 들어갔다. 아빠가 목회하는 교회였다. 엄마는 본당으로 들어가지 않고 유리 칸막이가 쳐진 유아실로 들어갔다.

유아실에는 유아들이 하나도 없었다. 대신 이목구비가 크고 뚜렷한 청년이 몸이 불편한 듯 가로누워있었다. 엄마는 케이크를 좌탁에 내려놓고 청년을 안아 일으켰다. 퀭한 눈에 장발인 청년은 야위었고 기력이 없어 보였는데 기정을 닮은 듯했다. 엄마가 케이크에 초를 꽂아 불을 켰다. 큰 초와 작은 초 각각 3개씩이었다. 청년은 벽에 기댄 채 엄마가 하는 양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엄마는 봄과 여름의 생일에 케이크를 챙겨준 적이 없었다. 미역국이나 팥밥은커녕 봄과 여름의 생일날 집에 없을 때가 더 많았다. 엄마가 가만가만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엄마의 목소리는 가늘고 끊어질 듯 아련했다. 처음 들어보는 엄마의 노랫소리였다. 엄마가 케이크 한 조각을 잘라 청년에게 먹여주었다. 청년의 입술에 크림이 묻자 엄마는 제 입술로 그것을 닦아주었다. 생소하기만 한 엄마의 모습이었다. 엄마의 애틋한 행위로 보아 청년은 엄마의 연인이거나 첫사랑쯤 되는 것 같았다.

엄마는 청년을 품에 끌어안은 채 유리 칸막이 앞에서 예배를 드렸다. 이 세상 험하고 나 비록 약하나……, 피와 같이 붉은 죄 눈같이 희겠네, 찬송가를 부르는 사람들이 유리 밖 본당에 빼곡히 앉아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도 있었지만, 기정의 부모, 재미있고 의리 있는 청년 드림 멤버들, 오래 만나지 못했던 어릴 적 친구들, 그리고 투어 중에 만났던 별난 손님들까지, 봄이 살아오면서 만난 거의 모든 얼굴들이 거기에 모여 있었다. 꼭 있어야 할 것 같은 봄의 가족만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직 한 사람, 엄마가 유리를 사이에 두고 그곳에 가족 대표로 참석해있었다. 가족이 될뻔한, 반쯤은 가족인 기정과 함께.

피아노 반주를 하는 중년여성을 보면서 봄은 아빠가 재혼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봄은 아빠와는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는 것처럼 아빠와의 추억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사라진 기억은 처음부터 없는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나날들이었다. 소중한 것들을 놓쳐버렸다는 낭패감만 오롯이 떠올랐다. 봄은 아빠가 목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아빠의 교회에 간 것은 처음이었다. 여름의 경우는 어떠할까.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의 순례자이자 나그네입니다. 나그네의 삶은 찰나이며 지나갑니다. 우리의 시간도 우리가 만나는 사람도 지나갑니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갑니다. 지나간다고 고단한 인생을 그저 가만히 견디기만 하면 안 됩니다. 애를 낳듯 용을 써야 합니다. 메뚜기도 한철이라고 애를 써야 똥이 나오든지 미주바리가 빠지든지 합니다. …… 무슨 일이든 때가 있고 할 수 있을 때 해야 합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원할 뿐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사는 게 힘드십니까? 사는 게 힘들다고 떨 것도 쫄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다만 이 세상을 지나가는 중입니다. 그러니 지금 옆에 있는 이들에게 잘하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야겠습니다. 게으른 것도 죄입니다. 있을 때 잘하고 할 수 있을 때 사랑합시다! 죄인인 우리에게 오직 사랑만이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부운!…….”

아빠는 주먹을 불끈 쥐어가며 웅변하듯 열변을 토해냈다. 아빠의 말투는 상스럽고 조금 이상한 부분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유머러스했다. 청중들이 웃음을 터트렸고, 엄마도 가끔 소리 내어 웃었다. 어쨌거나 엄마가 웃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봄은 이왕이면 아빠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길 바랐다. 축도가 끝나기 전, 엄마는 청년을 다시 뉘어놓고 누구보다 먼저 교회를 빠져나갔다.

엄마가 도착한 곳은 엄마의 고향, 봄이 방학이면 가곤 했던 시골 외갓집이었다. 그런데 엄마는 마을 한가운데 위치한 외갓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마을 뒤편에 있는 저수지로 향했다. 거대한 저수지의 풍광이 이전과는 많이 달라진 듯했다. 풀숲이었던 방죽은 크고 반듯한 대리석으로, 저수지를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는 오솔길은 목재 데크가 깔린 둘레길로 단장되어있었다.

저수지는 호수처럼 맑고 잔잔했다. 비단결 같은 수면 위로 윤슬이 반짝이고 가장자리엔 청둥오리 몇 마리가 해찰을 부리며 놀고 있었다. 미세먼지 지수에 예민한 몇몇 사람들은 희거나 검은 방진 마스크를 낀 채 지나갔다. 인사를 나눈 적 없는 낯익은 얼굴도 몇 보였다. 봄은 사람들로 붐비는 외갓집 주변 풍경이 유명 관광지의 일부 같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기정의 손을 잡고 그 길을 걸어가 본 적이 있는 것도 같았다. 훤칠한 키에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렌즈를 들여다보며 셔터를 누르는 사진작가는 기정과 몸집이나 자세가 몹시 닮아 보였다. 가까이서 보니 기정이었다. 봄은 반가운 마음에 인사라도 건넬까 해서 기정에게 바짝 다가갔다. 눈앞의 봄이 보이지 않는지 기정의 시선은 내내 봄의 어깨너머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기정의 폰이 울렸다.

“나 지금 회의 들어가야 하는데, 네 꾸중 나중에 들으면 안 될까?”

기정의 부드럽고 온화한 목소리에 봄의 사지가 멈칫했다. 기정이 통화를 하는 동안 기정의 여자 친구가 기정에게 다가왔다. 이제는 기정의 아내가 된 그녀 역시 카메라를 목에 걸고 있었다.

“무슨 전화에요?”

“잘못 걸려 온 거야. 대출받으래.”

기정의 버릇은 여전했다. 지겹고도 익숙한 기정의 모습이었다. 신혼일 텐데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기정의 곁을 맴도는 그의 아내는 기정에게서 폰을 건네받아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행인들 속에서 그들은 갇힌 적 없지만 풀려나길 바라는 여느 커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봄은 그들에게 스쳐 지나가는 사람 중 한 사람일 뿐이었다.

저만큼 앞선 엄마는 그 길을 가는 것이 처음이 아닌 듯 일정한 보폭으로 사뿟사뿟 가볍게 걸었다. 둘레길과 인근 산의 접점에서 엄마는 데크를 벗어나 산길로 빠졌다. 소나무 몇 그루가 무덤 한 기를 지키고 서 있는 둔덕을 지나 저수지의 시원일 성싶은 골짜기에 이른 엄마가 걸음을 멈추었다. 두 손을 모은 엄마가 저수지를 바라보았다. 고즈넉한 저수지 위로 오리들이 날아올랐다. 단번에 하늘을 수놓은 물오리들의 군무가 장관을 이루었다. 엄마가 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아, 엄마가 폰으로 사진도 찍을 줄 아는구나, 봄은 그런 엄마가 기특하고 반가웠다. 엄마와 문자나 카톡으로 대화하고 싶었는데, 이제 사진도 주고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날로그식 엄마는 폰을 들여다보며 공부했을 것이다. 누군지 몰라도, 엄마에게 신문물을 가르쳐 준 선생에게 고마운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엄마는 어떻게 핸드폰을 지니게 되었을까. 엄마의 성정이나 형편으로 보아 엄마가 직접 구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봄은 엄마에게 핸드폰을 사준 적이 없었다. 엄마에게 핸드폰을 사준 이는 역시 동생일까.

엄마가 나뭇가지를 하나 주워 들더니 치마를 올려붙이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파헤쳐진 황토는 붉은색에 가까웠다. 엄마는 이리저리 막대기를 움직이며 영역을 확장해갔다. 엄마가 밟고 있는 땅이 깊고도 길게 패였다. 이윽고 엄마가 찾고자 하는 그 무엇을 발견했는지 막대기를 집어던져 버렸다. 땅바닥에 꿇어앉아 두 손으로 흙을 파내던 엄마의 손에 딸려 나온 건 긴 낚싯대였다. 그곳은 상수원 보호구역이었고, 곳곳에 낚시 금지 팻말이 서 있었다. 엄마는 미끼도 없는 빈 낚싯대를 저수지에 드리웠다.

저수지의 물은 검붉었다. 서쪽 하늘에 노을이 지고 있었다. 잔잔하게 일렁이는 수면은 선연한 핏빛, 진홍빛이었다. 엄마의 낚싯대에 고기가 잡혔다. 한 마리, 두 마리, 엄마는 낚시를 곧잘 했다. 엄마가 잡은 물고기들이 땅 위에서 펄떡거렸다. 핏빛 오수를 먹은 물고기들은 터질 듯이 통통했다. 잉어가 일곱 마리, 붕어가 일흔 마리, 메기가 사백구십 마리, 미끼도 없는데 고기는 끝없이 잡혔다. 잡으면 잡을수록 저수지에 고기가 넘쳐났다.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엄마가 계속 물고기를 낚았다. 엄마는 낚시를 그만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해도 지고 인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야 할 텐데, 엄마는 집에 혼자 남아있는 아기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일까. 낚시질에 빠져버린 엄마는 영영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지도 몰랐다. 참다못한 봄이 다짜고짜 엄마 앞을 막아섰다.

“엄마, 이 더러운 물고기들은 잡아서 다 뭐하게?”

엄마와의 대화가 얼마 만인가. 그런데 봄의 말투엔 짜증이 잔뜩 묻어났다. 고개 숙인 엄마는 대답이 없었다. 엄마는 물고기들에 파묻혀 있었다. 꿈쩍 않는 엄마의 몸이 꼿꼿했다. 봄의 여린 손길에도 엄마의 몸은 옆으로 널브러졌다. 엄마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봄은 좀 더 일찍 나서서 엄마를 말리지 못한 걸 후회했다. 봄의 두 뺨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염없이 흐르는 봄의 눈물에 산더미처럼 쌓인 물고기들의 몸통이 녹아내렸다. 그 많은 물고기가 다 녹아내려 저수지로 스며들었다. 땅에는 물고기의 비늘만 남았다. 땅을 덮은 비늘이 까맸다. 비늘을 집어 든 봄은 그것이 비늘이 아니라 찢어지고 쪼개진 글자들임을 알아차렸다. 그 깨어진 글 조각들은 한 번도 읽어본 적 없는 엄마의 내면이었다. 이제 다시는 엄마와 대화를 나눌 수도 속내를 헤아릴 길도 없어져 버렸다.

봄은 엄마가 파놓은 기다란 구덩이에 엄마의 몸을 뉘었다. 엄마의 얼굴에 차마 흙을 뿌릴 수 없어 낙엽으로 덮었다. 훼손된 글자들을 끌어모아 땅을 메웠다. 엄마의 손에 꼭 쥐어져 있던 낚싯대도 같이 넣어 묻어주었다. 엄마의 노란 이마가 달처럼 땅 위에 비죽 떠 있었다. 봄은 엄마의 얼굴을 한 번 쓰다듬기 위해 엄마의 머리맡에 바짝 다가갔다. 엄마의 얼굴이 생각보다 앳되어 보였다. 엄마의 얼굴은 봄의 얼굴이었다.

흰 마스크를 낀 인부 몇이 삽을 메고 지나갔다. 검은 마스크를 낀 기정이 입마개를 한 커다란 개를 끌고 지나갔다. 폰 진동이 울렸다. 미세먼지 위험이라는 안전 안내 문자가 떴다. 분홍이 반원을 그린 최악의 미세먼지 농도였다. 검은 하늘을 가득 덮은 초미세먼지 때문인지 눈이 따끔거렸다. 봄은 웃옷을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신발을 벗었다. 봄의 몸 옆에 나란히 누운 봄은 집에 홀로 남아있는 아기가 잠시 떠올랐지만, 그냥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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