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회 경북일보 청송객주 문학대전

당신과 인솔자는 섬에 해 질 무렵 도착한다.

흠뻑 젖은 선미 타륜은 거꾸로 회전해 물을 앞으로 밀어낸다. 증기엔진이 뱉어낸 시커먼 연기가 굵직한 굴뚝에서 무럭무럭 솟아 저 먼 어둠을 향해 흩어져간다. 파도 소리는 우렁우렁하다. 뱃고동이 울리고, 마침표처럼 거뭇해진 바닷새들이 타륜이 남긴 잿빛 거품 위를 지그재그로 오간다. 당직병들이 등을 내걸기 시작하고, 커다란 군함의 윤곽은 그제야 어슴푸레 드러난다. 타륜이 철썩이며 물을 때려대고, 배는 해변과 작별하기 시작한다.

이끼가 뒤덮은 부둣가 계단은 미끈거리고, 밀물에 뒤뚱거리는 어선 옆구리엔 따개비가 가득하다. 마부와 마차는 모래사장 너머에 서 있다. 인솔자를 따라 당신도 그리로 간다. 네모난 사인승 마차 귀퉁이엔 유리로 만든 등불이 걸려 있다. 오렌지빛 불꽃이 그 안에서 일렁이는 중이다. 말들에게 각설탕을 먹이던 마부가 손을 턴다. 성미 거친 말들의 뻣뻣한 목을 두드리던 그가 당신에게 애매한 미소를 보인다.

시커먼 방수 천으로 지붕을 두른 사인승 마차는 쇠테 두른 바퀴가 가늘고 날렵해보인다. 당신은 마부를 등지는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인솔자는 당신 맞은편에 앉아 두 손을 마주 비빈다. 서늘한 밤이다. 운전석에 앉은 마부가 외투를 단단히 여민다. 격자창을 돌아본 당신은 마부의 구부러진 어깨를 본다. 채찍이 허공을 때리자, 퍼뜩 놀란 말들이 화들짝 발굽을 뗀다. 피로한 표정으로 얼굴을 비비던 인솔자는 구두를 벗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린다. 당신은 계급장 없는 군모를 벗어 무릎 위에 올려두기만 한다. 머리는 까슬까슬하다. 이송 직전, 헌병들은 당신의 머리를 바짝 깎았다. 그러고는 어깨와 가슴에 붙은 계급장을 비틀어 뜯어냈다. 가슴 부위에는 아무 것도 새겨지지 않은 흰색 명찰은 새로 기워져야 했다.

죄수에게는 이름이 없는 법이다.

슬슬 나아가던 마차는 오르막을 벗어나자 속도를 낸다. 가느다랬던 파도 소리는 가물가물 멀어진다. 파도 소리가 멀어질수록 두려움은 뼈마디 높이로 자라난다. 사방엔 어둠이 가득하고, 단단한 대지를 두들기는 말발굽 소리는 당신의 앞날이 예비된 문을 거듭하여 노크하는 것만 같다. 마차 창을 통해 잠깐 보인 밤과 바다의 경계는 모호해보인다.

당신은 고개를 돌려 마차 옆에 난 작은 창을 바라본다. 별은 없다. 그것이 보이지 않은 지는 꽤 된다. 사람들은 사라진 별이 전쟁의 결과라고 한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걸 전쟁의 원인이라고 여긴다. 별의 죽음으로 인해 밤이 비로소 온전해졌다고 당신은 생각한다. 이젠 누구도 사라진 별에 신경 쓰지 않는다.

마부가 고삐를 당겨 말의 걸음을 늦춘다. 당신은 마부의 어깨너머로 반짝이는 빛 하나를 본다. 유심히 바라보자 빛 주변을 구르는 고양이 털 같은 어둠이 보인다. 어둠은 빛을 감싸고 있고, 그 때문에 빛 주변엔 희붐한 둥근 테가 만들어진 듯하다. 어둠은 어디론가 격렬히 흐르는 중이다. 무심하고 몽롱한 강처럼, 어둠은 막막한 공간을 온몸으로 밀어내며 밀려가고 있다.

당신은 모든 기억을 훑으며 저 멀리 사라져간다는 죽음의 강을 떠올린다. 강어귀는 갓 죽은 자로 가득하리라. 전쟁이 그친 적이 없기에, 죽음은 흔하디흔했다. 죽은 자들은 죽기 직전의 멀끔함을 유지하고 있을까. 그들이 터져나간 머리와 찢어진 육신으로 강어귀를 어슬렁거린다면, 누가 그들에게 망각의 강물을 떠먹일 것인가. 당신은 죽은 자들이 생전의 파릇파릇한 육신과 싱그러운 낯빛을 지녔으리라고 생각해본다. 죽은 자들은 오므린 손으로 강물을 떠 벌린 입을 향해 기울일 것이다. 연기 같은 망각의 물이 죽은 자의 허망한 공간을 채우면 그들은 잊을 수밖에 없는 여로를 걸어내리라. 허허로워진 속으로 그토록 가벼이.

잊게 만드는 강은 밤을 닮아 검을 것이고 작별을 담아 묵묵할 것이다.

고삐는 시늉에 불과하다. 마부는 말의 감각에 의지했고 말들은 익숙한 길을 가뿐히 달린다. 마차 안은 지독히 덜컥거린다. 마차 안 가죽시트는 잔뜩 짓눌린 게 판자만큼이나 납작하고 딱딱하다. 바퀴가 길 위의 자갈을 짓뭉개는 으적으적 소리가 몸 깊이 느껴진다.

인솔자는 잠이 들어 있다. 그가 내뱉는 깊은숨에서는 엷은 담배 냄새와 구취가 흘러나온다. 당신은 저 먼 어둠에 희끄무레한 뭔가가 섞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납에서 뽑은 실처럼 뻑뻑한 안개는 소용돌이치는 밤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다. 마차 등불을 휘감은 안개는 갓 뜯어낸 목화솜처럼 보인다. 유리벽 안에 갇힌 불꽃이 어둠 속에서 꽃잎처럼 펄럭인다.

마차를 덮은 시커먼 포장에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진다. 그 소리에 인솔자가 깬다. 빗방울은 굵고 세차다. 창문 밖 저 너머를 보며 인솔자가 웅얼거린다.

“지옥처럼 새카맣군.”

당신은 정말 그렇다고 생각한다. 좁디좁아 칼날처럼 가늘어지는 당신의 길은 칠흑에 휩싸여져 있다. 당신은 떡갈나무 숲으로 빽빽이 덮인 이 섬에서 탄을 캐고 목재를 다듬으며 교화될 예정이다. 생산량 초과 달성으로 복무 연한을 줄여내기 위해 당신은 땀을 쥐어짤 것이고 피를 흘릴 터다.

질척해진 땅에서 바퀴는 간혹 헛돈다. 말이 신경질을 내고 마부가 욕지거리를 내뱉는다.

“더는 못 가요!”

몸을 일으킨 인솔자가 당신 뒤 마차 벽면을 탁탁 쳐 알아들었다는 시늉을 한다. 배낭를 가까이 당긴 당신이 허겁지겁 우의를 꺼내 입는다. 그리고는 인솔자를 따라 마차에서 뛰어내린다. 당신은 여분의 양말과 속옷을 떠올린다. 그러나 이제 당신은 군인이 아니고 군에겐 당신을 입히고 먹일 의무가 없다. 모자 끝을 붙잡은 당신은 몸을 오그린 채 빗속을 내달린다. 개흙처럼 무른 땅바닥에, 당신은 거의 넘어질 뻔한다.

빛이 거기에, 시멘트로 지은 커다란 건물 입구에 마련되어 있었다. 불을 가둔 유리벽이 어찌나 큰지 두께가 손가락 한 마디는 되는 듯하고, 불꽃은 사람 머리통만큼이나 크다. 어둠에 둘러싸인 건물이 얼마나 높고 큰지는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마부가 말을 독려하는 소리가 저 뒤에서 가늘게 들렸다. 돌아보니 마차 등불은 어둠에 이미 까맣게 먹힌 뒤였다.

우의에서는 물줄기가 줄줄 흘러내린다. 인솔자가 발을 굴러 군화에 묻은 진흙을 떨어낸다. 느릅나무로 만든 두터운 문에 달린 사자머리 문고리는 차디차다. 당신이 신을 믿지 않은 지는 무척 오래되었다. 하지만 이 순간 당신은 누구에게든 간절히 매달리고 싶어한다. 이 자리로부터 달아날 수만 있다면.

음습한 복도에는 푸른 페인트가 칠해져 있는데 그 때문에 한결 서늘한 느낌을 준다. 맞은편에 계단이 있고 오른쪽으로 긴 통로가 보인다. 통로 끝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말끔히 빈 복도에서는 긴 바람이 불어온다.

군함에서와 달리 인솔자는 당신에게 수갑도 족쇄도 채우지 않는다. 달아날 곳은 없다. 여기가 세상의 끝이었다. 느릅나무 문을 닫으며 당신은 바깥을 바라본다. 길은 묽게 젖어 있고 찬비에 젖은 나뭇가지는 오들거리는 듯하다.

천장에는 사슬이 박혀 있었고 거기 고정된 거무튀튀한 쇠 접시엔 촛농이 엉겨 있다. 이곳 또한 보급품이 부족한 듯하다. 전쟁은 수십 년간 이어지고 있었고, 물품이 풍족한 곳은 전국 어디에도 없었다. 비는 그칠 기미가 없다. 당신은 세계가 깊은 물에 잠기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복도 벽에는 녹색 부직포로 만든 커다란 알림판이 붙어 있다. 거기엔 규정과 지시와 현황과 보고가 빼곡하다. 문틈으로 바람이 새어들고 알림판 종이들이 순차적으로 퍼덕인다. 당신이 물 묻은 손으로 종이를 누른다. 그때 문이 열린다. 들어온 사람들의 우의에서 빗물이 줄줄 흐른다.

“그쪽도 한 명인가?”

인솔자가 턱짓을 하며 묻는다.

“둘입니다.”

앞에 선 사내는 키가 무척 크다. 그가 우의를 벌려 바지춤에 끼운 서류봉투를 꺼내려 한다.

“우리 인솔자는 선착장에 내리지도 않았어요. 직접 하라더군요.”

당신의 인솔자가 손을 내젓는다. 인솔자는 직접 하라는 의미로 검지를 뻗어 위를 가리킨다. 두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단 위로 성큼 올라간다. 키 큰 사내 뒤를 따라가는 땅딸막한 사내가 당신에게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인다.

“잠깐 살펴보고 가자고.”

인솔자가 복도 촛불 아래로 가 가방을 연다. 기름종이에 겹겹이 싸인 서류봉투에는 보안이라는 붉은 글씨가 도장 찍혀 있다. 인솔자가 제출할 서류를 차분히 점검한다. 종이를 넘기며 그가 묻는다.

“아직도 화가 나 있나?”

당연히, 당신은 여전히 저 서류뭉치를 증오하고 있다. 거기 반듯하게 적힌 글자가 가리키는 사실 전체를 선득하게 증오하는 것이다. 수사를 마치며 군수사부는 당신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거기엔 사건 전체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펜을 든 채 당신은 서류를 찬찬히 검토했다. 거기 반듯하게 적힌 문장들은 온전한 사실들이었다. 그러나 거기엔 진실이 없었다. 빼곡한 사실 사이에 진실이 누락될 수 있다는 걸, 당신은 그때에 처음 알았다. 직인을 찍을 서류를 검토하는 밤과 낮 동안, 당신은 쿵쿵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건 나무를 찍는 도끼 소리가 같기도 했고 못을 박는 망치 소리 같기도 했다. 어쩌면 그건 누군가의 난폭한 노크소리일지도 몰랐다.

고개를 든 당신은 인솔자의 의문 섞인 시선을 마주한다. 멀고 먹먹한 빗소리가 복도에 가득하다. 기름종이로 서류를 다시 꼼꼼히 감싼 인솔자가 계단 쪽으로 턱짓한다.

텅 빈 복도에 두 사람의 걸음 소리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크게 울린다. 드문드문 걸린 거무튀튀한 초 접시에 붙은 불꽃은 납작하다. 늘어선 촛불에 여러 겹 지어진 그림자가 벽을 훑으며 멀어지다가 재빨리 발밑으로 움츠러든다. 당신은 누군가가 큰 건물에서 길을 잃는 오래된 이야기를 떠올린다. 이야기 속 복도는 거대한 괴물의 내장처럼 복도는 길고 습하고 침침했는데, 이곳 또한 그러하다.

“찾을 때마다 헛갈리는군.”

인솔자가 초조한 기색을 비친다. 수염이 덥수룩한 뺨, 축 늘어진 목의 얇은 피부, 안경알 너머의 음울한 눈동자까지. 당신은 누군가의 아버지일 인솔자가 사근사근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실은 당신을 혐오한다는 걸 안다. 쏴아아아. 빗소리는 줄지 않았고 유리창을 돌아본 당신은 어둠과 비를 구분 짓지 못한다.

인솔자가 당직실을 찾은 건 우연에 가깝다. 누런 불빛이 새어나오는 나무문을 잡아당기자 삐걱거리는 소리가 난다. 너덜너덜한 벽지로 내부는 한층 우중충해 보인다. L자 모양으로 붙인 두 개의 책상 위엔 정리되지 않은 서류 더미가 무더기 져 있다. 몸피나 행동거지가 중학생으로 보이는 당직사병이 쪼그려 앉아 서류를 땔감 삼아 녹슨 난로를 달구려는 중이다. 연통은 바깥 창문 위에 뚫은 구멍에 연결되어 있는데 그리로 빗물이 비척비척 흘러내린다.

“어제 전보가 왔었지.”

당신을 빤히 쳐다보던 인계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필요한 조치는 모두 취해져 있다. 서류 몇 장을 뒤적여 수결을 두는 걸로 인솔자는 임무를 마친다. 인계자는 인솔자를 위한 숙소가 아래층에 마련되었다고 일러준다. 당신과 잠깐 눈이 마주친 인솔자는 악수를 건네야 할지 어쩔지 잠깐 쭈뼛대다가 그냥 돌아선다. 닫히는 문을 당신은 힐끗거린다.

“아주 잘 왔네.”

책상 위에 발을 올려놓은 인계자는 목소리가 굵고 낮아 알아듣기가 쉽지 않다. 항아리 같은 배를 지닌 그는 급한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손수건을 꺼낸 인계자가 가슴에서 떼어낸 훈장을 입김을 불어가며 정성스레 닦는다. 뒤쪽에서 서류뭉치를 뜯어내는 소리가 드문드문 들린다. 손을 부드럽게 휘저어 인계자는 당신을 난로 쪽으로 보낸다.

불은 막 지펴진 듯하다. 장작에 옮겨붙기 시작한 불에서는 잿빛 연기와 독한 그을음이 노파의 귀밑머리처럼 굽이치고 있다. 난로 앞에 있던 두 사람이 옆걸음 쳐 공간을 내주자 당신은 그들과 나란히 선다. 아까 복도에서 마주쳤던 사내들이었다. 온기는 미약하고 불로 뻗은 손은 파리하다.

서랍을 여닫으며 책상을 정리한 인계자가 당신과 사내 둘을 부른다. 불가와 마주한 허벅지는 미지근했지만 반대편은 차갑고 축축하다. 자기 옆머리를 톡톡 치는 인계자의 손가락은 명절에 나오는 소시지만큼이나 두껍다.

“퇴역한 지 삼 년쯤 되었네. 허벅지에 박격포 쪼가리가 박혀서 말이야. 편히 지내세. 트고 지내자 이 말이야.”

심드렁하니 창밖을 보던 인계자가 말을 잇는다.

“웃기는 꼬라지야. 전시상황이잖아. 그런데 뭐? 군 인권? 장병복지? 개수작 떨고 있네.”

인계자가 구부린 손가락마디로 책상을 딱딱 두들긴다.

“이게 다 군복 입은 머저리들 때문이야. 적이 골칫거리였나? 아니! 저 뒤에서 어정거리던 멍청이들이 더 큰 문제였지. 이보게들. 난 자네들을 영웅이라고 생각해. 기생충을 솎아낸 것 뿐이지.”

인계자가, 이제 인솔자가 된 그가 한 사람씩 눈을 맞추며 일일이 고개를 끄덕여준다.

“가슴 펴게. 다들 나랑 생각이 같아. 여의치 않으니 입 닫은 것뿐이야.”

맨 끝에 선 당신은 인솔자의 말에 화답하는 나지막한 웃음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그게 곁에 선 둘 중 누구의 것인지는 분명치 않았다. 인솔자가 창문 밖을 가리킨다.

“자네들과 비슷한 일을 겪은 자들이 더 도착할 거야. 그런데 꽤나 늦는군.”

“지독한 비니까요.”

당신은 이제 그게 누구였는지 안다. 우의를 벌려 서류를 보였던 키가 큰 남자.

“그나저나 저희는 매우 나쁜 상황에 놓였습니다. 그렇지요?”

인솔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개입할 여지는 적어. 감역관이 섬의 관할권을 지녔으니. 난 행정관에 불과해.”

당신과 다른 사내들은 풍성한 빗소리 속에서 괴롭게 침묵한다.

“간혹 저렇게 퍼붓곤 하지.” 책상 끝에 떨어진 물방울을 닦아내는 인계자의 미간에 주름이 깊다. “하지만 그친다네. 곧 그치고 말지.”

인솔자는 당신과 두 사내에게 이 섬에 대한 사실 몇 가지를 들려준다. 게잡이와 해산물 채취로 살아가던 십여 명의 주민은 지난달에 다른 섬으로 이주되었다. 당신을 비롯한 죄수들을 조류가 거센 이 섬에 가두기 위해 소개된 것이다. 인솔자는 모든 물자를 아끼고 아껴야 할 거라고 충고한다. 감역관의 눈을 피해 내가 제공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네. 난 고작 행정관일 뿐이지.

“가게. 숙소로 가서 바다를 건넌 몸을 쉬게 하게. 건물 뒤쪽에 새로 지은 건물이 보일 걸세. 저 애가 아까 거기에 불을 밝혀두었었지.”

인계자가 덧붙이며 엄지로 숙직실 구석에 앉은 어린애를 가리킨다.

엄청나게 많은 계단과 복잡한 복도를 지나서야 당신과 두 사내는 인계자가 말한 뒤쪽 현관을 발견한다. 쏴아, 빗소리가 열린 문으로 우두두 들어선다. 뒤쪽 현관에도 유리관을 씌운 커다란 등불이 있다. 아까 보았던 빛은 이것이었을까? 아니면 반대편 현관에 설치된 등불이었을까. 어둠 저편으로 어숨프레 보이는 시커먼 숙소는 오십 걸음 정도 떨어져 있다.

“단층 건물 같지요?”

아까 미소 지었던 둥근 얼굴의 사내가 묻는다. 갸웃거리며 당신은 잘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숙소 윤곽은 빗속에서 스산해 보인다. 우의를 목까지 잠근 당신을 두 사내가 붙든다.

“잠시 비 좀 그읍시다.”

얼굴이 둥근 사내는 붙임성이 좋아 보인다. 그가 내민 손바닥엔 담배가 들려 있다. 당신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끊은 지 얼마 안 됐나 보네?”

어떻게 알았는지를 궁금해하기도 전에 담배를 권한 남자가 히죽 웃으며 덧붙인다.

“벽난로에 내민 누런 손가락을 보고 알았소. 말할 때 드러난 당신의 이 색깔로도.”

얼굴이 둥근 사내는 자신을 척이라고 소개한다.

“아는 척, 모르는 척, 잊어버린 척……. 그냥 그리 부르시오.”

당신에게 권해졌던 담배는 옆에 선 키 큰 사내의 입에 물린다. 손이 빈 척은 군용배낭에서 성서를 찢어 담배 한 대를 재빨리 만다.

“도마서나 에키보서가 맛있지만 바돌로매서도 나쁘지 않지.”

척의 농담에 아무도 웃지 않는다. 자신이 속했던 부대와 계급을 말한 척이 뒤의 키 큰 남자를 가리킨다.

“오해말아요. 우리도 초면이니까. 배 안에서 처음 만났지.”

키 큰 사내가 우의 붙든 손을 길게 뻗어 그리로 머리를 집어넣는다. 치익 타오른 성냥불이 담배 끝을 문지른다. 키 큰 사내가 담배를 뻑뻑 빤다. 그 모습을 본 당신은 부리로 날개 밑을 뒤적이는 새를 떠올린다. 담배를 다 만 척이 다가가자 사내가 담배 끝을 내민다. 척이 볼이 홀쭉해지도록 담배 끝을 빨자 불이 옮겨 붙는다. 키 큰 사내가 다가와 당신에게 손을 쑥 내민다. 손을 맞잡은 당신은 키 큰 사내를 조라고 부르기로 마음먹는다. 사내의 길쭉한 목과 앙상한 어깨와 둥근 눈동자와 각진 얼굴에서 새를 연상시키는 건 어렵지 않다. 조의 손은 축축하고 차갑다. 조처럼, 당신도 자신의 이름과 관등과 복무했던 부대 이름을 댄다.

아주 약한 바람에도 빗방울은 꽤 많이 날아든다. 우의를 여미며 바람을 등진 당신과 두 사내가 몸을 부르르 떤다.

“어디선가 들어보았는데.”

갸웃거리던 척이 당신을 돌아본다.

“징집 전 서점에서 일했거든. 파본을 상자에 넣고 테이프 둘러 반송시켰어. 당신 이름, 거기서 본 듯한데.”

절반의 자긍심과 나머지의 부끄러움으로, 당신은 그 까닭을 일러준다. 당신이 몇 해 전 출간한 시집을 거론하자, 척이 야단스레 아는 척을 한다.

“그래, 맞아. 꽤 두툼한 시집이었지. 파란색 표지였고 꽤 잘 팔렸어. 평이 좋았는데.”

당신은 노란 표지를 지닌 자신의 얇은 시집이 거의 팔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는다. 가벼운 경탄과 낯간지러운 추켜세움이 당신을 지나가지만, 당신은 비켜서지 않는다. 대화의 숨이 죽어지자, 사내들은 다시 비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여린 불빛에 반사된 반짝이는 빗방울들이 수없는 파문으로 물웅덩이를 두들긴다. 떨어진 빗방울이 검게 젖은 돌바닥에 깨져 나가고 물러진 땅은 물길 아래 잠겨 있다.

“그쪽 부대는 어땠지? 역시 적색 구호가 문제였나?”

척이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은 입을 떼지 못한다.

적색 구호는 군의 전통이고, 개인주의자가 연대(連帶)를 배우는 가장 보편적인 관문이다. 퍼져나가는 담배 연기가 빗줄기에 슬금슬금 얽힌다. 빗줄기는 가늘어질 기미가 없다.

“이만 가지.”

조가 뭉툭한 꽁초를 내던진다. 당신과 두 사내는 함께 빗속을 달린다. 쉰 걸음 남짓한 거리였건만, 흠뻑 젖고 만다.

나무판자와 합판으로 짓고 쇠못으로 고정한 숙소 공기는 매캐해 목구멍을 따끔거리게 만든다. 출입구 옆엔 상자가 놓여 있다. 비품은 대강 갖춰진 듯싶지만 초와 등잔이 없다.

“해 떨어지면 자라는 얘기군.”

상자를 뒤적이던 척이 툴툴거린다. 곱은 손가락에 온기를 불어넣으려 당신은 손을 마주 비빈다. 공중에서 내리꽂는 빗줄기에 땅은 흠씬 두들겨 맞는 중이다. 문을 닫자 비가 천장 합판을 우글우글 두들기는 소리가 들린다. 당신은 숙소를 돌아본다. 남은 입영 기간은 일 년이다. 그 기간에 선고된 십육 년을 더한 십칠 년 동안 당신은 이곳에서 노동교화형을 받아야 한다. 칠 년을 살아야 할 곳을 보는 당신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다. 돌아보지 않아도, 다른 둘의 얼굴 또한 비슷하리라는 걸 당신은 안다.

마루는 양쪽에 무릎 높이로 깔려 있고 마루 끝 벽에는 주석으로 만든 보관함이 놓여 있다. 좁고 긴 통로 중간에 놓인 녹슨 갈색 난로를 척이 들여다본다. 그리고 쿵쿵 울리는 소리가, 다시 당신 귓전을 두들긴다.

그게 군사 법정의 나무망치 소리였다는 걸 당신은 이제 안다. 적색 구호를 명령한 당신과 수행한 소대원 전부의 유죄를 확정하는 망치질 소리. 적색 구호는 소대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결행되는 법이었고, 대상자는 동료들이 행하는 린치를 밤새 받아내야 했다. 보통은 모포를 씌우고 발로 밟았지만, 욕조 물에 처박고 누르는 소대도 있었다. 당신들은 몰라. 그건 어쩔 수 없는 조처였다고. 사회에서 쏟아지는 인간들의 꼴을 봐. 그 각양각색의 몰골들을 싸그리 녹여 충성스러운 군인으로 만들어내야 한단 말이야. 적색 구호는 불가피한 거야. 당신들이 내리는 선고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지 알기나 해?

벌레가 그의 소대로 들어오면서 상황은 뒤틀려갔다. 총통 앞에서의 열병식이 벌레의 자살로 중단된 직후, 장군은 시뻘게진 얼굴로 경련을 일으켰다. 두터운 가슴팍을 채운 훈장들이 노여움으로 부들거렸다. 관련자 모두 집어넣어!

“재판을 받았나?”

당신이 고개를 든다. 딱, 하고 엄지손톱에 성냥이 그어지자 둘둘 만 담배 끝에 다시 불이 얹힌다. 발그레했던 조의 얼굴은 성냥불이 꺼지자 거무튀튀해 보인다.

“그랬지.” 당신이 입을 연다.

“항소하지 않았군.” 조가 당신을 물끄러미 본다.

점호를 마치면 무릎 꿇린 벌레는 바닥에서 뒷짐진 채 밥을 먹어야 했고 훈련과 근무에 열외를 받을 수 없었다. 총통이 지켜보는 열병식이 한 달도 남지 않아 모두의 신경은 몹시 날카로웠다. 모든 군인에게 진급과 휴가가 간절했지만, 열 달을 전방에서 보낸 당신의 소대에겐 특히 그러했다.

하지만 동작이 굼뜬 벌레는 대형을 자꾸 어그러뜨렸다.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었다. 그는 긴장하면 자기 자신을 어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군대였고, 적응을 돕는다는 개념 자체가 사치였다. 둥근 구멍에 들어가기 위해 네모난 자신을 깎아내는 건 각자의 몫이었다.

당신이 증오 때문에 적색 구호를 명령했던 건 아니었다. 당신은 벌레가 돌출시킨 부위를 매끈하게 다듬고 싶을 뿐이었다.

그가 화장실에서 목을 매던가, 수류탄 핀을 뽑았다면 상황은 사뭇 달랐을 것이었다. 하지만 벌레는 총통이 보는 가운데 땅에 처박혀 죽고자 했다. 당신과 소대원들은 구속될 수밖에 없었다. 총통을 수행한 선전단을 통해 열병식이 전국에 생방송으로 중계되었기 때문이었다. 화면 한가운데로 투신하는 장병의 검은 몸이 보였고, 실태조사가 시행되자 육군성으로 투서가 쏟아졌다. 수백 마리의 벌레와 수천 명의 가해 병사가 햇볕 아래 드러났다. 군대 내 적폐인 적색 구호를 엄금한다. 카메라를 노려보는 총통의 표정은 단호했다. 관행을 방조해온 장군들은 뒷짐을 진 채 뒤로 물러났다.

열병식이 거행되자 벌레는 모습을 감췄다. 당신은 열병식을 망치느니 그게 더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열병식이 시작되기 직전에야 당신은 벌레를 발견했다. 대대 본부건물 옥상에 올라 증오하는 모든 대상을 발아래 둔 벌레의 얼굴은, 텅 비어 있었다. 그를 보자마자 당신은 우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대형이 어그러졌고 지휘관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멈춰 선채 당신은 손을 흔들었다. 그만둬! 그만둬! 그러나 벌레는 언제나처럼 일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추락한 벌레가 땅을 찧으며 난 쿵 소리는 군판사가 나무망치를 내리친 소리와 똑같았다. 벌레가 누운 관 뚜껑에 나무못이 박히는 소리와, 당신의 심장이 심연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소리와도. 적색 구호 관련자에게 실형을 선고한 군판사들은 가해자들을 섬으로, 깊은 산 버려진 광구로, 캄캄한 오지 숲으로 던져 넣었다. 그리고 징집기간의 세 배에 달하는 강제노역을 내렸다. 사실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가혹 행위를 당했던 자들을 감역관으로 불러 그들을 다스리게 만들라는 총통의 결정에 비하면, 그건.

“왜 항소하지 않았지?”

조는 아직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그의 발목에서 떨어진 빗물이 바닥에 작은 웅덩이를 이루고 있다.

“후회했으니까.”

“적색 구호 내린 걸?”

“그를 교정하려 했던 방식을.”

“교정 자체를 후회하진 않고?”

당신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한다. “한 인간을 뜯어고치지 않고 어떻게 조직을 꾸리지?”

조가 길게 담배 연기를 뿜었다.

“그냥…… 난 당신이 다른 대답이 가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조가 빨아들이자 담뱃불이 입술을 향해 빠르게 달음질친다. 후회하고 있다고 덧붙이며, 조는 눈을 찡긋거린다.

“들키지 않게 좀 더 교묘히 처리할 걸 그랬어.”

감역관이 우리 하나하나에게 모포를 씌울까. 우리를 물에 처넣고 뒤로 결박한 손목을 들어 올리게 할까. 깊게 판 구덩이에 어깨까지 묻을지도 모른다. 이 섬에 감역관으로 올 적색 구호 대상자가 당신이 알던 벌레는 아닐 것이다. 그는 이미 죽었으니까. 그러나 당신은 감역관이 벌레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노예가 되었어, 우리는.” 조의 목소리가 부글부글 끓는다. “팔 년 복무 끝나고 만기제대가 코앞인데. 시민권을 발급받고 학자금을 대출받고 결혼도 할 수 있었는데.”

“어쩌면 금방 끝날 수도 있어.”

척은 아직 사면에 대해 미련을 둔 모양이다. 그건 끊이지 않던 감방 괴담이자 당신이 끝내 죽일 수 없던 희망이었다. 그리고 자술서에 사인하길 권유하며 군검사가 지절대던 미끼이기도 했다.

“빌어먹을 감역관이 문제야. 그 자식이 우릴 죽일 거야.” 눈을 가늘게 뜬 척을 조가 빙글빙글 웃으며 돌아보았다.

“섬을 통치할 권한을 받았다 해도, 감역관은 문제가 안 돼. 적색 구호를 받을 정도로 한심한 인간들이 우리 머리를 밟는다고?”

조가 척에게 다가간다.

“조직적일 필요가 있어.” 조가 몸을 앞으로 기울인다. “감역관에 대항하려면 조직을 갖춰야 해. 힘은 견고한 위계와 명령의 신속한 집행에서 나오지. 이제 이곳에 우리처럼 선고받은 자들이 속속 도착해. 적색 구호 때문에 실형을 살게 된 자들. 우리 셋은 미리 마음을 합칠 수 있지. 이후에 도착할 놈들을 발아래에 두자고. 우리가 주도하는 거야. 연대해서 조직을 이루고 감역관에 대항하자고. 살아남자 이거야.”

조가 발목을 걷어 군화 안쪽에 찔러 넣은 시커먼 군도를 꺼낸다.

“이거 하고…….” 조가 움킨 주먹을 흔든다. “이걸로.”

당신과 달리 척은 흥미로워한다. 그가 웃는 얼굴로 손을 마주 비빈다. 조가 군도를 군화 안에 집어넣는다.

“우리 셋이 블록을 형성하자. 모두들 무릎 꿇리자고. 칼과 단결로 살아남는 거야.”

죄수 우두머리가 되어 섬을 지배하자는 조의 권유에 당신과 척은 압도된다. 조는 아까 인솔자가 했던 말을 되짚는다.

“군 내부에도 우리를 동정하는 자들이 있다잖아.”

당신은 발아래 열병식을 굽어보았던 벌레를 생각한다. 떠올리려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그 생각에 사로잡힌 것이다. 당신은 무의식의 그 무지막지한 힘이 언젠가 당신을 건물 위로 데려가리라는 걸 알고 있다.

재판정에서, 당신은 등 뒤에 앉아 있을 부모님을 돌아볼 수 없었다. 법정에 들어가고 나오는 길에 스치듯 지나칠 뿐이었다. 살인자가 된 당신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두 늙은이의 그림자는 짙디짙었다. 어머니 그런 게 아니었어요! 나는 내 소대를 정돈해야 했어요. 내 소대를 반짝반짝하게 유지하려던 거였어요!

그러나 얘야, 누구도 얼룩이 되지 않아. 누군가 얼룩이 된다면 다른 누군가도 그리될 수 있지.

내 아들인 너조차도.

빗줄기는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당신은 온기가 필요하고 그건 조와 척도 마찬가지다. 녹이 슨 적갈색 난로는 한 번도 뜨거워져 본 적이 없던 것 같다. 척이 난로 안에 놓인 다발로 묶인 길쭉한 갈탄 더미를 들어 보인다. 팔뚝 굵기의 갈탄은 육각형 모양이다. 불쏘시개가 필요했지만 담배를 싸는데 쓰인 척의 성경은 너무 얇고 그나마도 비에 젖어 있다.

“종이 좀 얻어오지 그래.”

조는 당신이 이어온 침묵이 아까부터 불쾌했던 모양이다. 당신은 한 번 더 저 비를 맞다간 지독한 몸살을 앓을 것만 같고, 젖은 우의를 입고 싶지도 않다. 당신이 움직이지 않자 난로 안을 들여다보던 조가 한 번 더 말한다. 종이 말이야.

“몸이 좋지 않아서.” 당신의 말에 조가 싸늘하게 웃는다.

“이런, 낙오자가 생길 모양이군. 또다시 말이야.”

조가 꼿꼿한 몸을 당신에게로 돌린다.

“너 자신을 봐. 굼벵이처럼 몸을 오그린 채 기분이 나쁘고 몸이 안 좋고 움직이고 싶지 않다고 툴툴거리는군. 이전에 적색 구호를 명령했을 네가, 얼간이의 혼을 빼놓고 패배자를 다그쳤을 네가 말이야.”

당신이 손을 뻗어 척을 가리키려 들자 조가 툭 쏘아댄다.

“아니. 난 꼭 네가 다녀왔으면 좋겠는데.”

우의를 집어 든 당신을 향해 초나 등잔도 함께 얻어오라는 척의 당부가 날아든다. 비가 너무나 거셌기에 당신은 바스러진 어둠이 우수수 쏟아져 내리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발목 높이로 차오른 빗물이 어디론가 콰아 흘러간다. 우의 깃을 끌어당겨 쥔 당신이 뛴다. 흘러넘치는 빗물은 어둠 속에서 먹빛으로 보인다. 검은 물은 간혹 물굽이 치고, 거기에선 흰 거품이 부글거리다 가라앉는다.

당신은 자신을 움츠리게 만들었던 조의 고압적 말투를 곰곰이 생각한다. 우의를 입는 당신을 조는 꼼짝 않고 지켜보았었다. 그 눈에는 득의만만한 권위가 어려 있었다. 정말로 조는 자신을 중심으로 질서를 세우려는 걸까. 그 순간 당신은 조가 세우려는 질서의 바닥돌이 당신 자신임을 깨닫는다. 복도에서 당신을 훑던 그 시선과 찌르는 듯한 말끝이 아프게 되살아난다. 문고리를 당기고 건물에 들어선 당신이 몸을 떤다.

당신은 옛날에 읽었던 과학 에세이를 떠올린다. 가운데에 물을 담은 커다란 수조 한쪽에 치즈를 매달아 놓고, 반대편 기슭에 쥐 여섯 마리를 넣어 행동 패턴을 연구하는 실험이었다. 치즈가 매달린 난간이 좁았기에 굶주린 쥐들은 치즈를 떼어내 건너편 기슭으로 헤엄쳐 와야 먹을 수 있었다. 여섯 마리 중 세 마리의 쥐가 물에 뛰어들어 치즈를 물고 헤엄쳐 돌아왔다. 그러자 기슭에서 기다리던 두 마리가 헤엄친 쥐들을 물에 처박고 치즈를 빼앗았다. 헤엄친 세 마리 중 두 마리는 치즈를 빼앗겼고, 한 마리만이 노력의 대가를 지켜냈으며, 마지막 남은 한 마리는 먹이를 구하려 애쓰지도 빼앗지도 못한 채 구석에서 구슬프게 울기만 했다.

다른 쥐로 실험해도 빈도는 같았다. 빼앗는 쥐 두 마리, 빼앗기는 쥐 두 마리, 지켜내는 쥐 한 마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쥐 한 마리. 쥐를 바꿔 실험은 계속되었다. 착취한 쥐 여섯 마리를 모아 실험해도, 먹이를 빼앗기지 않은 독립적인 쥐 여섯 마리를 모아 실험해도, 늘 두 마리의 피착취자와 두 마리의 착취자와 한 마리의 독립자와 한 마리의 천덕꾸러기가 나왔다.

당신은 갑자기 담배 한 모금의 맛이 간절해진다. 당신은 삼킨 연기와 뱉은 연기의 차이를, 몸에 스몄을 연기의 질량과 혀끝을 알알하게 만들 그 미묘한 맛을, 문득 더듬고 싶어진다. 당신은 아까 조의 입술에서 퍼져나갔던 담배 연기에 대해, 담배를 잇대어 불을 붙였던 두 사내의 묘한 눈짓에 대해 떠올린다. 당신이 공기 속으로 사르르 풀려나가는 연기를 열없이 보았을 때 불을 붙이기 위해 옷깃을 들어 올렸던 조는 퍼덕거리는 소리를 내며 우의를 털었다.

그 몸짓은 활대에 앉은 새의 몸짓과 닮아 있었다.

당신은 당직실을 찾을 수 없다. 어쩌다 보니 당신은 반대쪽 현관에 다다르게 된다. 알림판 종이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종이뭉치를 걷어 우의 깊이 넣은 당신은 한참 만에 뒤쪽 현관을 찾는다. 기다란 연필처럼 굵은 빗방울이 땅에 떨어지며 유리알처럼 깨어지고, 소용돌이치던 어둠은 저 너머로 물러서다가 눈 가린 경주마처럼 쇄도한다. 세상이 떠내려가는 게 아닌가. 이렇게 많은 비를 당신은 본 적이 없다. 방주에 서서 차오르던 물을 보던 노아 또한 긴 밤 내내 근심했을까. 퍼덕이며 날아오른 새를 향한 노아의 기대는 지금의 당신처럼 엷고 덧없었을까. 당신은 이마를 찌푸렸다. 노아가 날려 보낸 새가 뭐였지. 당신은 기억하지 못한다. 아무 소득 없이 방주로 되돌아온 그 새를.

그리고 잠시 비와 당신과 세계가 그렇게 멈춘다.

몸을 일으킨 나를 당신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바람에 펄럭이던 그대로 당신의 우의는 굳어져 있고 굵직한 빗방울들은 공중에 멈춰 서 있다. 나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은 채 당신을 살핀다. 당신을 보는 내 얼굴에는 자신의 두개골을 열고 태어난 아테나를 바라보는 제우스의 경이가 떠올라 있다. 나는 지금껏 내게 얹혀졌던 무게에 대해 생각한다. 수십 년 동안 발작처럼 찾아왔던 그 미련한 고통을.

당신을 보는 나의 눈동자에는 다양한 방식의 억압으로 유지되는 우리 세계가, 세계의 등뼈라 할 만한 질서의 준엄함이, 그리고 거기에 깔린 선택의 으깨진 사체가 떠올라 있다. 나는 당신을, 유리처럼 투명한 백지(白紙) 뒤에 수은을 부어 맺은 나의 상(像)을, 바라본다. 내가 짊어졌었고, 글을 통해 당신에게 부여했던 짐은,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같다.

나는 내가 그 미련한 고통에 생애 내내 짓눌릴 거라는 걸 안다. 당신이 나를 본다면 내 안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으리라. 내 분노의 이유는 당신이 느끼는 불안의 이유와 그리 다르지 않다. 난 물끄러미 당신을 바라본다. 어둠으로 물러서며 나는 몇 방울의 비를 당신 뺨에 떨어지도록 한다. 행간(行間)으로 몸을 숨긴 채, 뺨에 묻은 빗방울을 털어내는 당신을 나는 잠자코 바라본다.

당신이 돌아왔을 때 마주 앉은 그들은 뭔가를 먹고 있다. 통조림에 든 익힌 순무다. 마멋 고기 통조림을 한 캔씩 먹은 그들은 붉은 순무를 손가락으로 집어 먹는 중이다. 당신을 본 그들이 바닥에 놓인 통조림과 통조림 따개를 가리킨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군.”

악의 없는 농담이 당신을 찌른다. 조가 당신에게 손을 뻗는다. 종이뭉치를 꺼낸 당신은 불현듯 그걸 건네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조가 종이를 가져가는 순간, 당신은 종이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을 준다. 당신의 손에 남은 찢어진 종잇조각이 치조 조각처럼 보인다.

척을 돌아본 당신은 방주로 되돌아온 노아의 새가 뭔지 아느냐고 묻는다. 척은 비둘기를 들먹인다. 비둘기는 돌아오지 않은 마지막 새였어. 입을 다문 채 당신은 그렇게 생각한다. 종이에 조심스레 불을 붙인 척이 불을 향해 후후 숨을 불어넣는다.

빗소리는 여전히 거세다. 어쩌면 영원히 그치지 않을지도 몰라. 갑작스레, 당신은 노아의 손에서 날아올랐던 첫 새가 까마귀였음을 깨닫는다. 벌레는 땅에 으깨진 게 아니었구나. 내 첫 울음에 화답한 다른 까마귀들의 발톱과 부리에 찢긴 것이었구나.

척에게 다가간 당신이 담배를 부탁한다.

“안 피운다더니.”

척이 찢은 성경 위로 담배 상자를 기울여 담뱃가루를 덜어낸다. 담배 담긴 종이의 둘둘 말린 통통한 끝을 당신은 축축한 혀로 눌러 붙인다. 조가 불이 붙은 갈탄을 집어 통째로 내민다. 모자챙이 탈까 봐 당신은 아무 문양도 나붙지 않은 군모를 벗어든다. 벌건 불 앞에서 당신의 민낯이 번들거린다. 당신이 말린 종이 끝을 빨았고 위안처럼, 담배 연기가 당신의 속을 채워나간다. 불붙은 갈탄을 도로 난로에 집어넣으며 조가 당신을 쳐다본다. 당신이 마침내 웃음을 보인다. 조심스럽고 은근한 미소를. 그걸 본 조가 고개를 조금 끄덕인다.

바닥에 괴었던 물은 물결을 이루며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다. 이 맹렬한 비에 한 줌 흙더미에 불과한 섬과 이쑤시개 같은 떡갈나무 숲마저 모조리 어둠으로, 물결치는 시커먼 바다로 쓸려 들어갈 것만 같다. 파도의 깊은 부글거림 사이엔 깊은 정적이 있을 거라고 당신은 생각한다. 그리고 약간의 보랏빛 포말이.

당신의 등 뒤에는 조가 피운 불의 온기가 자리하고 앞에는 흥건한 검은 비가 긴 물결을 만들고 있다. 당신은 담배 끼운 손을 입가에서 떼지 않는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깊게 끼운 담배가 조금씩 떨려온다. 조가 갈탄을 들쑤셨고 검은 물길을 향해 불티는 부하게 인다. 입에 손바닥을 바짝 붙인 당신이 담배를 뻑뻑 빨고 연기 더미가 뭉글뭉글 피어오른다. 당신의 눈이 금세 벌게진다. 속이 뒤틀린다. 당신은 구토를 느낀다.

모든 걸 씻어 내리는 비 앞에서 당신은 기침한다. 새카만 비 앞에 선 당신의 기침이 끝날 줄 모르고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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