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수 전 대한소아청소년과학회장·경북대의대 명예교수

애리조나 주립대학 암센터의 염색체검사실은 규모면에서나 장비 면에서 필자가 운영하고 있던 검사실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검사 건수는 훨씬 적었으나 검사실의 검사실 전문 인력은 7명이 근무하였으며 염색체 검사와 함께 유전자 배열 탐색 기능까지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에 필자가 운영하던 염색체 검사는 현미경 하나로 10년가량 혼자 하다가 업무가 넘쳐서 병원장의 특별 배려(?)로 검사원 한 명을 배정받았다. 염색체의 밴드(band)를 만드는 방법은 같았으며 대부분의 샘플이 암환자의 혈액이나 골수, 그리고 암 조직 세포였다. 그리고 자동 인식 프로그램으로 1차 염색체 배열 기능을 갖춘 현대화시스템이 되어 있었다. 그 후1989년Wichita시의 캔자스 의과대학 소아과 의학유전학교실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곳 역시 검사 건수는 우리의 1/5 수준이었지만 검사실 인원은 5명이나 되었다. 그 당시에도 우리나라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의학유전학에 대한 연구는 활발하지 않았던 때여서 대학병원마다 염색체검사가 가능하지 않았으므로 주변의 많은 병원들로 부터 검사샘플을 항공으로 배달을 받아 검사하고 결과지를 우편으로 보내는 과정이었다. 물론 그 후로는 전자 우편으로 결과를 전송하고 있다. 캔자스 의과대학 소아과 의학유전학교실의 책임자는 한국인 조세진 교수였다. 그 후로 소아과학 교실 주임교수까지 역임한 몇 안 되는 실력자였다. 온화한 성품에 모든 이에게 자상하였으며 국제적으로 이 분야의 대가였다.

필자와의 인연은 아주 우연하게 이뤄졌다. 1981년 염색체 검사를 시작한 후 가장 많았던 염색체 이상 질환이 다운증후군 환자로 부터 생화학적 검사를 병행하였다. 그 당시 교과서에 딱 한 줄의 내용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즉, 다운증후군 환자는 정상인에 비해서 혈중 SOD(super oxide dismutase; 염색체 21번에 유전인자가 내재) 치가 정상인에 비해서 1.5배이다. 이 환자는 인종은 달라도 비슷한 얼굴을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건강인에 비해서 감염에 취약하다고 알려져 있으며 그 이유로 21번 염색체가 삼체성이라서 SOD치가 50% 증가되어 있으므로 백혈구의 탐식능력이 상대적으로 낮은 데서 기인한다고 알려져 있다. 염색체이상 질환의 진단은 이미 완성단계에 있으니 내부적인 병리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통계를 구하기 위해서는 몇 명만 검사하고 결과를 도출할 수는 없었다. 정상인과 비교해서 결론을 얻으려면 25명 이상의 샘플이 필요하였다. 방법으로 주변 장애인 특수학교를 방문하였다. 어린이들의 건강을 살펴 주면서 진단과 치료를 겸할 목적이었다. 그 당시에 어린이들의 빈혈은 건강과 성장을 저해하는 기본 질환이었으므로 빈혈 정밀 검사를 무료로 하였고 진단이 붙으면 치료도 무료로 진행하였다. 염색체 검사와 SOD검사도 무료로 진행하였으며 방문 때 마다 과자와 빵 그리고 음료수 등 선물 보따리 등도 챙겼다. SOD검사는 의과대학 내 생화학 손건영 교수가 맡아 주기로 하였다. 4년간의 노력으로 필자가 원했던 통계적으로 유의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으며 1985년 가을 대한소아과학회에 구연 발표할 수 있었다. 그 당시로는 국제적인 수준의 내용이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연자가 발표에 앞서서 늘 긴장하는 것은 ‘내 발표에 문제점이 없나?’ 이었다. 그러나 이 연구는 첨단 연구이므로 당연하게 질문이 있을 수 없다고 예상했었다. 시간 내 발표를 마치자마자 후미에서 질문이 들어왔다. ‘아니 이런 앞선 연구에 누가 질문을 할 수 있지?’라는 순간적 판단이었다. 그 당시 질문자는 조세진 교수로 서울의대 졸업 후 미국으로 연수 가서 하버드의과대학 병원에서 소아과학을 전공하였고, 당시에는 Wichita의대 소아과 의학유전학분과 교수로 재직 중이었으며 우리나라에 초정연자로 귀국한 상태였다. 학년으로는 필자보다 2년 위였다. 질의한 내용은 ‘한국에 초청 강의하러 온 입장에서 우리나라에서도 이렇게 훌륭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으며, 앞으로 우리나라의 의료계 발전에 큰 기대를 갖는다’ 라는 간결하고도 명확한 메시지였다. 그 당시로는 염색체검사도 첨단 의학이었는데 그런 검사를 바탕으로 환자들의 생화학적 데이터까지 생각할 수 있었다는 연구였으니까 당연 최신 발표였다. 저녁 만찬장에서 만난 자리에서 미국에 올 일이 있으면 꼭 자기 대학에 들려 달라는 이야기와 함께 명함을 건너 받았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미국 중부에 위치한 Wichita의대병원을 지금까지 3회 방문하여 미국의 수준을 파악하고 많은 것을 배울 기회를 가졌다. 물론 대구에도 초청하여 강의도 부탁하였다. 한번은 Wichita에서 저녁을 사겠다고 따라 나간 식당의 중국인 주인이 대구 대명동에서 중식당을 오랫동안 운영했던 적이 있었다고 하며 물론 한국어도 유창해서 한참 동안 고향 동네 이야기로 향수에 젖기도 하였다. 또 Wichita병원의 여직원 아들이 군에 입대해서 한국에 파견근무를 자원하여 대구의 미군부대인 Camp Walker에 근무한다고 연락이 왔었다. 아주 애 띈 미국청년으로 시간 날 때 마다 같이 만나서 Wichita 이야기도 하였다. 사람의 인연은 아주 우연한 데서 시작이 되어 진심으로 대소사에 서로 연락하며 평생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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