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수 전 대한소아청소년과학회장·경북대의대 명예교수

1986년 1년 연수 이후에 의학유전학은 차원이 다른 큰 발전이 있었다. 1990년부터 15년 계획으로 시작된 Human genome project 사업은 인간의 염색체(1~22번 상염색체와 X, Y 성염색체)의 염기서열 즉, 유전정보를 완전 해독하기 위해서 미국을 비롯해서 6개국 유전학자들의 공동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각 염색체는 밴드(band)의 부위별로 나눌 수 있으며 부위마다 여러 개의 유전자의 연속으로 구성되어 있고 하나의 유전자는 하나의 효소(one gene, one enzyme 이론)를 만드는 유전정보를 내포하고 있다. 인류역사 이래로 가장 위대한 공동 업적임에 틀림이 없다.

이 계획이 발표되기 전에 이미 많은 대학의 연구소에서는 부분적으로 초보적인 유전자 해독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어서, 필자는 염색체 연구에 더 발전된 유전자 연구를 위해서 1989년 3개월 단기연수를 위해서 UCLA 대학병원에 다녀오기로 하였다. 소아혈액종양과에 근무한 Christopher Denny 교수는 이 분야에 선구자로 활약을 시작하였으며 많은 새로운 연구업적과 막대한 연구비로 첨단을 달리고 있던 터였다. 그 당시 UCLA에는 실험실 장소가 좁아서 겨우 두 사람이 기계 앞에서 앉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세포의 핵으로부터 유전자를 채취한 후 여러 단계의 처리를 한 후 DNA sequencing(배열)이 단계적으로 이루지면서 네 가지 핵 염기인 아데닌(A), 구아닌(G), 티민(T), 시토신(C)이 순서대로 필름에 막대(bar)를 찍으면서 그려져 나오는 것을 보고 너무나 신기하였으며 ‘이것이 바로 첨단 의학이구나’하는 것을 눈으로 목격을 하면서 감탄을 하였다. 그 후에는 또 다른 연구소인 일본 나가사키 대학병원의 Niikawa 교수(소아 유전학 전공) 연구실에도 견학을 다녀왔었다. 이 교수는 대구에도 여러 번 방문한 적이 있으며, 퇴임 후 홋카이도 대학으로 옮겨 후일 총장을 지냈다. 나가사키 대학에서는 염색체의 이상부분을 현미경 시하에서 초미세 정밀 나이프(ultramicro-knife)로 절단을 한 후 이상 부분의 염색체 배열을 찾아내는 첨단 기법을 구사하였다. 지금의 첨단 기술에는 정확도나 속도면에서 훨씬 뒤졌지만 유전자배열 이상을 찾아내는 의학 유전학의 근본 연구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면서 만들었다는 언어를 해독하는 거대한 업적은 당초 계획보다 2년을 앞당겨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검사 기법에서 많은 부분이 향상되었기 때문이다. 미국 주도로 연구가 진행되고 과학 선진국 5개국이 동참을 하였는데 우리나라가 참여하지 못했던 이유는 그 때만 해도 이 분야의 우리의 연구 성과는 미미하였거나 아예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참여국으로는 독일, 영국, 프랑스, 일본 그리고 중국이었다.

1986년 첫 외국여행을 위해서 유일한 국적기(?)인 대한항공을 선택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그 때에는 공무원에게 비행기 요금제로 비즈니스급 클래스인 GTR(government transportation request) 요금제가 있었는데 요금을 할인해 주지 않는 대신에 좌석을 상향해 주는 제도였으나 그 후에 폐지되었다. 필자는 국립대 교수로 공무원 신분이었다. 비행기는 빠른 교통수단이었으나 상대적으로 다른 교통수단에 비해서 몇 배 비쌌다. 그래서 비행기라고는 1972년 대학 졸업여행으로 제주도 갔을 때를 포함해서 서너 번뿐이었다. 졸업여행 시 비행기를 택했던 이유는 심한 뱃멀미를 한다는 것을 1970년 울릉도를 가기 위해서 200톤의 청룡호를 타면서 확인했기 때문으로 다른 친구들처럼 배로 가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비행기 항로는 지금처럼 알래스카를 거쳐 LA로 갔는데 2층 넓은 좌석의 옆 자리에는 가족 4명이 모두 브라질로 이민 가는 중학생 아들이 있었다. 어린 나이였는데도 참으로 늠름하다고 생각되었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자연적으로 친하게 서로를 알아가던 중, 뜻 밖에 ‘기내 환자가 발생했으니 의사가 있으면 승무원에게 연락을 바란다’는 방송이 들렸다. 그렇지 않아도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이 있어서 진정시키고 있었던 터이고, 첫 해외 장거리 비행이고, ‘나 말고 다른 의사가 있겠지’ 라는 바램으로 선뜻 나설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두 번째 안내 방송이 나오는 것을 듣고 ‘소아과 의사라도 기내에는 나 밖에 없구나’라고 판단하고 승무원을 찾았다. 승무원은 비행기 제일 후미에 나를 안내하였다. 비행기는 캄차카 반도를 지나가던 중으로 후미에서의 요동은 심해서 서 있으면 무중력 상태로 머리가 기내 천장으로 올라가 붙었다가 내려오곤 하여 의자를 붙잡고 있지 않으면 균형을 잡기 어려울 정도였다. 환자는 두 명이었다. 남매로 홍콩(그 당시 영국령)인이었으며 홍콩에서 출발해서 김포를 경유해서 LA로 가는 승객으로 이미 김포공항 의무실에서 위장염증상으로 응급치료를 받았던 환자들이었는데 설사, 구토, 복통, 열을 자주 호소하여 아예 좌석을 화장실이 가까운 후미에 옮겼다고 하였다. 그런데 웬 중년의 여자 분이 나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승무원 이야기로는 체코슬로바키아(그 당시 공산권 국가) 출신으로 미국 내에서 간호사로 근무한다는 이야기였으며, 나보다 먼저 현장에 출동하여 기내에 의사가 없으면 간호사의 판단을 참고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으니 그 간호사는 필자의 출현으로 책임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알고 필자를 반갑게 맞이했다. 상황 판단을 위해서 문진을 시작으로 진찰을 한 후, 의사와 간호사의 역할로 나눠서 간호사에게 바이탈체크(vital check; 혈압, 맥박, 호흡 수, 체온)를 부탁하였다. 첫 장거리 해외여행에 특수상황이 발생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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