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구째는 실투였거든요. 가운데로 몰렸는데 상대 선수가 안 치기에 자신감을 가졌죠"

2008 베이징올림픽 야구 우승 순간에 마운드에 서 있었던 건 정대현(SK)이었다. 1회부터 9회 말 원아웃을 잡아낼 때까지는 류현진(한화)이 마운드를 지켰지만 1사 만루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잠수함 투수' 정대현이 출격 지시를 받았다.

정대현은 앞선 2경기에서 마무리로 활약하느라 사실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김 감독도 마지막까지 웬만하면 류현진에게 완투를 시킬 생각이었다.

3-2로 1점 앞선 가운데 맞이한 9회 말 1사 만루 위기. 앞선 두 타자를 잇따라 볼넷으로 내보낸 심판의 판정 따위를 생각할 여유가 그에겐 없었다. 타석에 들어선 쿠바 6번 타자 율리에스키 구리엘을 무슨 공으로 상대할지만 생각했다.

소속팀 SK에서도 이런 위기 상황은 수십 번도 더 겪어봤기에 마음에 동요는 크게 없었다.

마운드로 걸음을 옮기며 정대현은 `외야 플라이도 안 된다. 한방이면 3루 주자가 홈으로 들어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뭘 던지면 병살을 유도할 수 있을까. 정대현이 그 순간 떠올린 건 남미 선수들이 유독 슬라이더에 약하다는 것이었다. "1구부터 3구까지 모두 슬라이더만 던졌어요"

첫 번째 공으로 스트라이크를 잡아낸 뒤 2구째도 슬라이더를 던졌다. 하지만 이 공은 사실 실투였다. 구석 쪽으로 찔러 넣는다는 게 실수로 가운데로 들어갔다. 하지만 구리엘은 미처 정대현의 2구째를 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투스트라이크를 잡아내고 나니까 자신이 생겼죠. 3구째는 바깥쪽 높은 유인구를 던졌습니다"

구리엘의 방망이에 맞은 공이 자신의 오른쪽으로 굴러가는 걸 본 순간부터 정대현의 머릿속은 하얗게 변해버렸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자신의 역할을 다했으니 그 다음은 한 몸처럼 생각하는 내야수들에게 맡길 뿐.

유격수 박진만이 공을 잡아 2루수 고영민에게 던졌고, 그 공이 다시 1루수 이승엽의 글러브에 정확히 꽂히며 아웃카운트는 순식간에 원아웃에서 스리아웃으로 변했다.

우승이 확정되고서야 정대현의 머릿속에서 무엇인가 떠오르기 시작햇다. 하지만 그 순간에 정대현의 뇌리를 스쳐 지나간 건 구질이나 공을 던질 방향이 아니라 부모님과 가족들의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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