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강엔 임제의 호방하고 로맨틱한 詩情이 흐르고…1520년 귀래정 임붕이 건립

▲ 영모정이 두 볼에 분홍색 볼터치를 한 듯 오르는 계단 양쪽 정원에 핀 진달래꽃이 화사하다.

백호 임제는 조선시대의 돌연변이였다. 시대의 가치를 거스르는 자유로운 영혼이었고 시대와 불화하는 아웃사이더였다. 술과 친구를 좋아했고 사랑 앞에 주저하지 않는 로맨티스트이기도 했다.

그가 남긴 수많은 에피소드 중 압권이 '황진이 묘소 참배 사건'이다. 에피소드를 굳이 '사건'으로 표현한 것은 그의 생애에서 방점을 찍어 기록할 만한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라는 걸 의미한다.

서도병마사에 제수돼 부임하러 가던 길, 송도를 지나며 시담이나 나눌까 황진이를 만나러 갔다가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안타까운 마음에 묘소에 들러 제사를 지내고 시조를 지었다. 중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그 시조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는다
잔 잡아 권할 이 없어 그를 설어 하노라


시는 좋았으나 세상은 발칵 뒤집어졌다. 그는 이 사건으로 부임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파직당했다. 벼슬아치가 기생의 무덤에 절을 하고 시를 올리는 일은 유교적 가치를 최고의 이상으로 여기는 당시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로맨티스트 임제의 성격은 기생 한우(寒雨)와의 러브스토리에 잘 드러난다. 그는 한우가 마음에 쏙 들었던 모양이다. 작업을 걸었다. 작업 도구는 자신의 유일한 무기인 시다. 테마는 모성본능 자극이 테마가 유효한 수단이다.

북창(北窓)이 맑다커늘 우장(雨裝)업시 길을 난이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로다
오늘은 찬 비 마잣시니 얼어 잘까 하노라


▲ 영모정 앞 영산강을 지나는 황포돛배.


딱 신파다. 찬비 맞고 다닌데다 잠까지 추운데서 얼어 자야할 형편이라고 엄살을 떤다. 그냥 엄살만 떠는게 아니다. 속뜻을 살펴보면 늑대가 따로 없다. 작업의 고수다. 기생 한우의 이름을 한글로 풀면 '찬비'다. '얼우어'는 '남녀가 서로 교합하다'라는 뜻의 '얼우다'가 기본형이다.

다시 시를 읽어보니 이건 숫제 '19금'이다. 노골적으로 한우를 어떻게 해보겠다는 속내다. 프로포즈를 받은 기생 한우는 한술 더 뜬다.

어이 얼어자리 무슨 일로 얼어자리
원앙침 비취금 어디 두고 얼어자리
오늘은 찬 비 맞았으니 녹아 잘까 하노라.


얼어 자기는 무슨 당치않은 말씀. 나를 만났으니 원앙 수를 놓은 베개와 푸른 빛 윤이 나는 비단이불을 깔아서 당신을 녹여주겠다고 기다렸다는 듯이 프로포즈를 받아들인다.

이런 적도 있었다. 술에 취해 말을 탔는데 한 짝은 가죽신이고 한 짝은 짚신이다. 말을 모는 종이 신발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길 오른쪽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은 나를 보고 가죽신을 신었다 할 것이고 길 왼쪽을 지나는 사람은 짚신을 신었다 할 것이니 무얼 걱정하겠느냐"고 했다. 그의 호방한 성격을 잘 드러내는 에피소드다.

조선의 로맨티스트 임제의 흔적을 찾아 나주 영산강변을 걷는다. 그의 흔적은 나주시 다사면 회진리 영산강이 내려다 보이는 영모정 일대에 고스란히 있다.

영모정은 본래 1520년(중종 15) 귀래정 임붕이 본래 자신의 호를 따 창건한 귀래정이다. '귀래'는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따 온 이름.

조선의 좀 나간다 하는 선비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벼슬을 떠나 시골에서 조용히 시나 지으며 살고 싶다는 소망을 가졌는데 그 바람을 아호로, 정자의 이름으로 지은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경주, 안동, 순창, 원주, 고성 할 것 없이 전국에 귀래정이란 이름의 정자가 널렸다.

효성이 지극한 임붕의 두 아들 임복과 임진이 아버지를 영원히 추모하겠다며 영모정으로 이름을 바꿔 재건했다.

임제를 만나기 위해 임붕의 정자를 찾은 이유는 임제가 이곳에서 어린 시절 글을 배우고 시를 쓰던 곳이기 때문이다. 임제는 대곡 성운을 만나 속리산으로 들어가기 전인 22살 때까지 여기서 공부를 했다. 그의 호방하고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은 이곳에서 키워지고 다듬어졌던 셈이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지어졌다. 2단 기단 위에 덤벙주춧돌을 놓고 2m 가량 되는 원형 장대석을 세운 다음 두리기둥을 이었다. 그 위에 보를 걸치고 동자기둥을 세워 종보 위에 판대공과 파련대공을 올린 견실한 구조를 갖추었다. 왼쪽 1칸은 온돌방, 오른쪽 2칸은 마루방이다.

정자 옆에는 400여년 된 팽나무가 여러 그루 시립해 있는데다 정자 아래에는 영산강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고 있어 풍광이 아름답다. 때마침 나주시가 관광상품으로 개발한 '영산강 황포돛배'가 물살을 가르고 지나가며 운치를 더해준다.

임제가 영모정에서 바라봤던 황포돛배는 세월이 삼백년전 쯤 지나 동력을 달고 관광객들을 유인하는 관광상품으로 인기를 모으고 있다. 황포돛배에서 바라보는 영모정은 어떤 모습일까? 황포돛배는 영산포선착장에서 이곳 회진까지 10㎞ 구간을 하루 두차례 운항한다.

▲ 임제의 문학작품을 모아 전시하는 백호문학관.


영모정 바로 아래 언덕에는 임제의 족적을 남기기 위한 후세의 노력이 역력하다. 그는 몇 개의 비석과 기념 건물로 뚜렷해졌다. '백호임제선생기념비'와 '물곡사비', '백호기념관'이 있다. 정자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임제의 문집과 글을 모아둔 백호문학관이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물곡사비(勿哭辭碑)'다. 임제의 호방하고 의협심 강한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유적이다. 그는 왜 '내 죽음 앞에 곡을 하지 말라'고 했던 것일까? 설명을 들으면 권위에 비위 맞추며 살아온 내가 부끄러워진다.

"사방 여러 나라 중에 황제를 자칭하지 않는 나라가 없는데 유독 우리나라는 그러하지 못하니 이런 욕된 나라에서 태어나 죽은 들 무엇이 아깝겠는가. 곡을 하지 말라"고 한 그는 중국과의 사대관계를 치욕으로 느꼈다.

▲ 글·사진 김동완 자유기고가

임제는 끊임없이 시대와 불화했다. 체면과 권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천한 신분이라도 자신이 본받을 만하다고 여기면 존경을 표했다.

황진이 묘에서 제사를 지내고 시를 바친 사례가 그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사랑의 표현에 거리낌이 없었으며 중국과 사대관계에 있는 조선의 위상에 속앓이를 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당파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정치권에도 울분을 금치 못했다. 하여 그는 명철보신 대신 거리낌 없는 행보로 파격을 일삼았다.

그는 벼슬을 그만두고 산천을 돌아다니다 39세에 세상을 떠났다. '원생몽유록' 등 3편의 한문소설과 1천편의 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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