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추상 조각 예술 선각자

김종영 조각가.

초·중등학교 시절, 용흥동 탑산은 학교에서 개최하는 미술대회도 참여하고 친구들과 자주 놀러 다녔던 추억이 깃든 곳이다. 포스코와 포항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탑산은 공원다운 장소가 없었던 1960년대~80년대 포항역과 오거리가 가까워서 시민들이 자주 찾는 공원 역할을 하기도 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세월 동안 큐레이터 업무를 수행하면서, 나름대로 우리 지역 미술사에 대하여 많은 정보와 지식을 습득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탑산에 있는 ‘전몰학도충혼탑’을 제작했던 작가가 김종영이라는 것을 외부지역에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이러한 정보는 2012년 포항시립미술관에서 주최하는 ‘스틸라이프’ 전시를 추진하다 서울 김종영미술관을 방문하면서 알게 되었던 것이다. 많이 부끄럽다는 생각과 함께 기쁨이 교차 되었다. ‘전몰학도충혼탑’이 한국 추상 조각에 선구자인 김종영의 작품이었다니… 놀라웠고 보물을 발견했다는 기분이었다.

우리 동네 앞산처럼 편안하게 느껴졌던 탑산에 대한 귀한 내용들을 아무런 정보와 교육을 받지 못한 채 학창시절을 보냈다는 아쉬움에 그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6·25전쟁 후의 사회적 환경은 반공 교육이 거세었던 시절이었고, 숭고하게 목숨을 바친 학도병들의 애국정신과 희생정신이 부각되어야 되는 시대적인 분위기에 가려져 탑에 대한 미의식은 간과되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지금까지도 탑 주변에는 작가명과 탑에 대한 작품이해를 돕는 정보가 어디에도 발견할 수 없었다. 탑이 세워진 의의와 반공정신을 함양하기 위한 설명 문구만이 변함없이 강인하게 자리하고 있을 뿐… 그래서 문화예술은 어릴 적부터 교육과 함께 생활 속에 접할 수 있는 환경이 중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지는 계기가 김종영의 ‘전몰학도충혼탑’을 보고 알게 되었다.

전몰학도충혼탑 제작 모습

김종영은 1915년 경남 창원의 유서 깊은 사대부 집안에 태어나 동경미술학교에서 조각을 전공했다. 휘문고보 시절 미술교사인 장발(서양화 1세대)을 만나면서 조각가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한국 추상 조각 예술의 선각자로 활동했다. 1948년부터 서울대학 미술대 조소과 교수로 재직하며, 인위적인 흔적을 가능한 한 지워냄으로써 그 존재감을 드러내는 ‘불각의 美’를 추구했다.

1950년 중반~1960년대에 많은 조각가들이 영리적 수순에 얽힌 기념 조상에 급급한 시절에 김종영은 한국근대사를 상징하는 ‘3·1독립선언기념탑’과 ‘전몰학도충혼탑’을 제작했다. 6·25동란은 3년간 국군과 UN군 그리고 남한 민간인 사망자 수가 100만 명을 넘긴 처참한 전쟁이었다. 그래서 정부와 전몰자 유관단체는 다양한 추모기념물 제작을 많이 계획했는데, 세속에 관심 없던 김종영이 이를 수락한 점은 의외의 일이다. ‘전몰학도충혼탑’은 1950년 8월 11일 포항여중에 있던 71명의 학생들 중 48명이 사망하고 13명은 포로가 되었으며 6명 중상, 4명이 행방 불명된 이날의 전투는 한국전쟁사에서 가장 많은 학생들이 희생된 사건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탑이다.

1957년 전몰학도충혼탑 설치작업 사진.

‘전몰학도충혼탑’은 산의 정상에 8.8m의 높이로 세워졌는데, 3m의 기단위로 5.5m의 탑신이 올려진 형태이다. 탑신에는 ‘전몰학도충혼탑’이라는 탑명이 화강석에 새겨졌고, 전면 기단 위에는 가로 116㎝, 세로 40㎝ 크기의 청동 부조를 덧붙였다. 하부의 기단을 바탕으로 점차 좁아 드는 탑신(塔身)의 형상은 솟아오르려 하는 듯한 유연한 강건한 미를 보여 주고 있다. 탑의 전면은 청동 부조 이외에 다른 시각적인 장식물은 더하지 않았고, 두 층의 돌을 쌓고 좌우에는 기하학적인 구조를 더해서 안정감을 주었다.

김종영 조각가.

탑은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마련한 묘석이나 다리 장식으로 인하여 전통 한국식 묘지 조각물을 연상시킨다. 김종영은 청동 부조를 고구려 벽화의 기린도로 장식했다. 기린도는 사후세계로의 인도자이며, 하늘과 땅을 매개하고, 사후세계를 지켜주는 수호자로서 실질적인 기린의 모습이 아니라 상상 속의 동물이다. 머리에 난 뿔은 생략했지만 앞 두발을 들고, 뒷발이 포개진 모습이나 꼬리가 채찍처럼 탄력 있게 휘어지는 모습과 목덜미의 갈기와 등에 길게 뻗쳐 올라가는 날개는 기린이 천계를 오가는 동물임을 강조하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작가는 기린도를 통해 학도병들의 넋을 좀 더 높은 곳으로 보내려는 간절한 심리적 마음을 은유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김종영이 ‘전몰학도충혼탑’을 제작하기로 마음먹게 된 계기가 아마도, 꽃다운 나이에 생을 마감한 학도병들에 대한 절절한 인간애가 그의 마음을 크게 움직였으리라 짐작된다. 그래서 혼신(魂神)의 힘을 다해 열정을 쏟았을 김종영은 이들을 추모하고자 하는 간절함이 제의적인 마음으로 학생들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단순하고 심플한 형태에서 정신성과 숭고함에 대한 영원성을 조형적인 아름다움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이러한 면은 당시, 과장되고 동적인 형상의 구상적 표현 위주로 제작된 수많은 모뉴먼트의 작품보다 정신성을 사로잡히게 만드는 추상적 울림이 특별함과 차별성을 획득하고 있다.

전몰학도충혼탑

탑산은 옛날에는 봉황산, 주마산, 죽림산, 영흥산 등으로 불렸다가 1957년 ‘전몰학도충혼탑’이 세워지면서 탑산이라 불려지고 있다. 조선시대 이름난 풍수학자 이성지는 탑산 지역을 일컬어 구봉연실지국(九峰蓮實之局)이라 하여 천하의 명산이라 했다. 이러한 역사성과 6·25 전쟁의 교훈성, 그리고 문화예술적인 측면을 인문학적으로 재해석하여 풀어낸다면, 방문객이 없어 퇴색되어 가고 있는 탑산의 명성을 다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최근 탑산을 방문했을 때에는 찾는 이가 없어 설렁한 분위기를 느꼈고, 충혼탑 주변에는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잡초가 자라고 있었다. 또한 2002년 9월에 건립된 전승기념관에 가려져 아예 보이지 않는다.

21세기는 다양성을 표방하는 문화예술의 시대다. 우리지역이 6·25 전쟁에서 격렬한 전투 지역이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는데 있어, 이제는 방법적인 차원에서 달리 시도해야 한다. 우선은 탑이 세워진 지 7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전몰학도충혼탑’에 대한 작가명과 미의식에 대해서 이해를 돕는 정보를 알릴 수 있는 기본적인 설치물이 필요하다. 그리고 6월 호국의 날이 되면 단골로 게재되는 ‘전몰학도충혼탑’의 홍보물에 문화예술적 인 면을 덧입혀 홍보한다면 그 효과는 클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문화예술을 통한 교육은 머리에만 각인되지 않고 마음과 온몸으로 기억하기에 그 효과는 영원성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우리지역이 대내외적으로 특별한 문화적 자원을 간직하고 있는 문화도시로서의 자긍심을 심어 주는데 많은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박경숙 큐레이터,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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