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끊임없이 흐르고 과거는 쌓여가네

성인봉과 가마바위가 멀리 보이고 꽃피는 덕곡마을

바람이 맞춤하게 불고 하늘은 해맑다. 오늘은 덕곡 삼거리에서 대왕재까지 총 5.6㎞가 주 코스이다. 시작부터 나무 계단이 이어졌다. 다행히 풍경에 매료되어 힘들다는 생각 없이 산 중턱까지 단숨에 올랐다. 그곳서부터 응해산 허리춤을 잡고 꼬불꼬불 걸었다.

예쁜 송정마을

가다가 잠시 멈춰서 마을풍경을 굽어보았다. 4월의 마을은 예뻤다. 꽃 피고 새 울어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행복하게 했다. 비로봉과 서봉, 가마바위봉이 까마득히 보였고 파계봉 골짜기는 2주 전보다 초록이 훨씬 짙어졌다.

둘레길 5코스 시작점
둘레길 이정표

송정 삼거리 방향 이정목이 보여 산허리에서 내려왔다. 왼편에 재실이 있고 오른쪽 축담을 끼고 돌았다. 마을이 다정다감해서 아드레날린이 마구 솟구쳤다. 녹슨 철대문과 돌담 사이에 낀 잡다한 농기구와 집기류의 어울림이 오묘하다. 그냥 막 쌓아 둔 것 같은데 성질이 전혀 다른 무질서에서 파생된 조합이 꽤 신선하다.

녹슨 철대문과 잡다한 농기구가 하나의 예술품으로

낮은 돌담 너머로 의도치 않게 누군가의 삶을 엿보았고 오래된 슬레이트 지붕에 올라앉은 폐타이어와 눈도 마주쳤다. 굴러다니는 게 생득적 본능인 타이어는 본성을 억누르고 마지막을 슬레이트 지붕 위에서 나름 쓸모 있게 닳아가고 있다. 대문이 없는 집을 본 게 얼마 만인지, 그 집을 지키는 누렁이는 낯선 여행객을 봐도 경계 않고 돌담 위에 발을 올려놓고 친근감 있게 꼬리를 흔든다.

덕곡마을 샘터, 이젠 추억속으로

이제는 옛이야기 속에나 등장하는 우물도 있었다. 노동 현장이자 여인들의 수다 공간이기도 했던 우물은 집집마다 수도가 들어오면서 할 일이 없어졌고 내밀한 속은 위험해서 무거운 콘크리트로 막아버렸다. 사람이 한 생을 살아낸다는 건 번성기와 쇠퇴기를 두루 겪는 일이다. 우물 역시 ‘한때’ 속으로 사라 졌다.

서낭당

마을 어귀로 내려오니 신목(神木)이 듬직하다. 바로 옆에 서낭당이 있다. 둥그렇게 쌓은 돌무더기 중앙에 석신(石神)이 자리하고 백색의 헝겊을 짚으로 묶어놓았다. 원시 신앙이 발달했던 우리나라는 사물에 대한 숭배 정신이 높았다. 부뚜막신, 조왕신은 물론 나무나 바위도 신앙의 모태였다. 선조들은 비가 오지 않아도, 질병으로 가족이 앓아눕거나 타지에 나가 있어도 정화수를 떠 놓고 무언가에 치성을 드렸다.

생각해보면 동네마다 신목은 있었던 것 같다. 서낭당 앞을 지날 땐 돌을 얹거나 침을 세 번 뱉어야 재수가 좋다는 속신이 있다. 아이들도 금기시된 곳의 돌을 집어가거나 함부로 파손하지 않았다. 요즘도 돌탑을 흔히 본다. 큰 돌탑도 있고 작은 돌무더기도 있다. 반듯한 돌멩이를 주워 그 위에 얹은 기억이 최근에도 있다. 쌓는 사람은 봐도 무너뜨리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원시 신앙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 사라졌음에도 금기(禁忌)를 어기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 이면에는 자신의 안위에 해가 될 만한 일을 본능적으로 피하고 싶어 하는 심리가 깔려 있다.

천지공원 분수
천지공원 전망대

파밭과 철쭉이 핀 길목과 건물 구조가 예쁜 어탕국수 집을 지나니 천지공원이 나왔다. 송정마을 이정표는 전망대 위를 향하고 있었다. 분수가 시원하게 물을 뿜었다.

거북바위

분수 옆 거북바위는 암컷으로 알을 품은 형상으로 발굴이 되었다고 안내문에 적혀 있다. 거북은 가정의 평화와 부귀영화, 무병장수의 상징이라 동양에서 신성시하는 동물이다. 조선시대 유생들은 과거시험을 보러 가기 전 돌거북을 참배하여 시험합격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공원 전망대에 서니 지나온 덕곡 마을과 응해산이 풍경처럼 펼쳐졌다. 폐차된 자동차를 개조해서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 놓아 아이들에게 인기다. 심천랜드온천을 끼고 큰 도로로 나왔다. 혜월정사 이정표는 대성수퍼 골목을 가리켰다.

송정마을 돌담길
송정동 석불입상 가는 길

송정마을은 특히 돌담이 예쁘다. 과수원길 사이에 공덕사란 글씨가 쓰인 석비와 기우뚱 기운 초라한 간판에 송정동 석불입상이라 쓰였다.

송정동 석불입상
석불입상 임시 거처지

길 따라 들어가면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22호인 석불입상과 만날 수 있다. 얼굴 부위의 손상이 심해 이목구비는 거의 망가졌지만 크고 두툼한 귀는 어깨에 닿을 정도로 길었다. 상투 모양의 육계와 깎은 머리에 얼굴형이 둥글고 뺨이 도톰해 온화한 인상이다. 마모는 심하지만 균형 잡힌 조각 기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추정하며 여래상에 가깝다는 견해다. 오래전 땅속에 묻혔다 홍수가 나면서 발견이 되었고, 들판에 보호막도 없이 풍화되어 가다가 최근에서야, 임시 거처가 마련되어 강한 햇볕과 바람을 피하고 있다.

혜월정사
들판에 걸린 연등

갔던 길을 되돌아 나와 혜월정사를 거쳐 복숭아꽃이 예쁘게 핀 임도를 걸었다. 들판에 사월초파일 등이 걸렸다.

부족한 걸 보완하는 비보석축

당정마을은 가산산성 가는 길목, 골짜기 깊은 곳에 있었다. 비보(裨補) 석축(石築)이 눈에 띄었다. 석축은 마을 중심부를 흐르는 골짜기를 가로질러 작은 성처럼 쌓아 하단에 수구를 만들었다. 비보를 만든 이유는 마을에 시집온 여인들이 진득하게 살지 못하고 마을을 이탈하는 일이 잦자 음기가 빠져나가지 못 하도록 비방 차원에서 한 것이란다. 마을에서 마주 보이는 응봉은 석축을 그릇 삼아 고봉밥을 담아 놓은 형상이라 일명 소쿠리터로 불린다. 그래선지 가난했던 시절에도 이곳 사람들은 배를 곯지 않았다고 한다.

경주 이씨 재싱인 원감재

경주 이씨의 재실인 원감재를 지나 큰 도로까지 나왔다. 오늘 마지막 코스인 대왕재이다. 옛날엔 재였지만 지금은 차들이 쌩쌩 달린다. 도덕산 아래에 위치한 이곳은 대구 덕곡동과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기성리 경계다. 고려 태조가 기병 5,000여 명을 끌고 와 잠시 묵은 곳이라 하여 대왕재라 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왕자가 없던 숙종이 성전암 농암 스님께 기도를 부탁한 후 숙빈 최씨가 회임하였는데 그분이 조선 21대 영조이다. 후에 영조는 파계사로 행차할 때마다 이 길을 이용하였고 왕이 넘어 다닌 길이라 하여 대왕재로 불렸다.

예전엔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의미만 남은 게 어디 재뿐일까. 우린 다만 그 흔적을 매만지며 자취에 숨결을 불어넣을 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과거는 쌓여간다. 거기에 맞게 산줄기와 물길, 사람도 변화되고 사라지고 또 존재한다.

임수진 수필가

 

◇주변에 가 볼만한 곳

특별히 추천하지 않아도 팔공산 자락은 전체가 역사며 맛집과 근사한 찻집으로 넘쳐난다.

조용히 사색하며 풍경과 하나가 되고 싶다면 팔공산 둘레길 5코스가 참 좋다. 욕심도 고민도 내려놓고 오로지 순간에 심취할 수 있다.

△덕곡마을 → 송정마을 → 당정마을

 

배경이 예쁘니까 이정목도 근사하다
여행객을 안심시키는 이정목
평화로운 송정마을
응해산 허리춤 초록길
집 지키는 누렁이 짖지도 않고
혜월정사 가는 과수원길
차가 쌩쌩 달리는 대왕재
천지공원을 지나 심천랜드온천 뒷길로 이어진다
초입부터 오르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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