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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을 걷다] 9. 자연지형 이용 건축기법으로 축조 성곽길 가산바위에 앉으면 산천이 말을 걸어와
[팔공산을 걷다] 9. 자연지형 이용 건축기법으로 축조 성곽길 가산바위에 앉으면 산천이 말을 걸어와
  • 임수진 수필가
  • 승인 2020년 05월 21일 19시 59분
  • 지면게재일 2020년 05월 22일 금요일
  • 15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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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골짜기로 굽어치는 숲길, 치열했던 전장은 흔적만
무구한 시간이 지나도 역사는 이어지고

어제는 반가운 비가 종일 내렸다. 메말랐던 땅은 촉촉해져 갓 구운 빵처럼 말랑했고 초목은 파릇파릇 생기 있어졌다. 길가 곳곳에 자그마한 물웅덩이가 생겼다. 여행객보다 먼저 도착한 구름이 어느새 그 안에 들어앉았다. 진남문을 통과해 성안으로 들어섰다. 오밀조밀한 숲길이 양옆으로 펼쳐졌다. 길의 끄트머리가 해원정사다.

해원정사

정성껏 가꾼 티가 나는 정원에 금강역사 두 분이 익살스러운 모습으로 서 있다. 이곳에 가산산성 외성을 축조한 이세재 관찰사 비각이 있다. 사찰을 지나 왼쪽으로 돌면 공원관리 초소이다.

널찍한 돌이 깔린 숲길

오늘은 진남문에서 중문, 북문을 거쳐 윗산당 마을까지 8.7㎞가 주 코스이다. 널찍한 돌이 깔린 길을 지나 숲길로 들어섰다, 길은 골짜기를 따라 여러 번 굽이쳤다. 비에 젖은 나무는 색이 선명했고 초록은 눈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었다.

복수초 군락지

그 어디쯤에 복수초 군락지가 있지만 꽃은 볼 수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서성대며 나무 팻말에 쓰인 글을 읽었다. ‘그저 바라만 보세요. 저는 만지면 죽어요. 이곳을 떠나도 죽어요. 저를 보호해 주세요.’ 진정한 사랑이 뭔지 생각하게 하는 글이다. 정말로 사랑하는 건 소유가 아니라 지켜주는 일 같다.

수문터 고지도
동문 성곽길
무너진 수문터

출발지에서 4.6㎞ 걸어서 도착한 곳은 동문이다. 수문터가 먼저 보였다. 2014년에 발굴 작업을 하여 유량과 유속 조절부, 바닥 세굴 방지 시설 등을 확인하였다는 글과 사진이 있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회색구름이 돌연 물안개로 변해서 하늘과 산, 땅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동포루로 향했다.

십자가로 착각한 둘레길 이정표 &동포루로 연결된 성곽

성곽 능선에 십자가 같은 게 보였다. 무엇에 홀린 듯 그곳으로 갔다. 하지만 가까이서 본 것은 십자가가 아니라 둘레길 이정목이었다. 이정목이 어째서 십자가로 보인 걸까.

포곡식과 태뫼식을 혼합하여 축성한 가산산성
가산산성 지도

가산산성은 내·중·외성 구조로 만들어졌다. 축성 시기는 각기 다르다. 1640년 인조(18년)에 내성을 축성하여 1700년 숙종(26) 때 외성, 중성은 1741년 영조(17년) 때 완공하였다. 축성에서 완공까지 100여 년이 걸린 셈이다. 100년에 걸쳐 산성을 만든 이유는 단 한 가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국방의 중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민간인들이 주로 거주하던 산성마을터

‘포곡식’과 ‘테뫼식’ 축성법을 혼합해서 만든 산성은 순환할 수 있는 구조이다. 지리적으로 요새인데다 가팔라 성을 쌓을 때 인근 고을의 15세 이상 남자들 대부분이 징벌되었다. 특히 내성은 짧은 기간에 스파르타식 공사로 막대한 자금뿐 아니라 가혹한 노동에 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었다. 그 일로 민심은 들끓었고 여러 차례 탄핵을 받던 경상도 관찰사 이명웅은 결국 자리를 내놓았다.

동포루 가는 길

동포루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동서남북 다른 그림이다. 십자가로 착각한 이정목을 한참 바라보고 섰다. 성을 쌓을 때 희생된 이름 없는 민초들의 마음이 이곳 어딘가에 모여 있어 여행객을 부른 건 아닐까. 사실 성을 쌓을 때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때 이 부근은 치열한 전투지였다. 저 아래 산줄기 따라 다부동 유학산과 왜관에서도 수많은 장병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들의 숨결이 골짜기 곳곳에 고여 아름다운 산천을 우리에게 선물해 주고 있는지 모른다.

동문

동문을 지나 마주한 건 민간인들이 주로 거주하던 산성 마을 터이다. 1950년대 한국전쟁과 홍수를 차례로 겪으면서 민가 수는 줄었고 1970년대부터 강제 철거하여 지금은 터만 남았다.

성을 쌓고 민가를 허물 때 나온 유물
관아터

성을 쌓고 민가를 허물 때 나온 기와와 식기, 숫돌 등 유물을 쌓아둔 돌무더기가 그들의 한때를 말해주고 있다. 곧이어 만난 관아터는 전망이 좋은 곳에 있었다. 경상도 관찰사 이명웅이 대구시 북구 읍내동 일원에 있던 팔거현을 인조 18년인 1640년에 가산산성으로 옮겼다. 이후 순조 19년 읍치가 팔거현으로 돌아간 180년 동안 이곳이 칠곡도호부의 중심지였다.

활엽수와 까치박달나무가 관아 터를 에워쌌다. 이곳서 중문으로 이어진 길은 사색의 길이다. 깊고 고요하고 푸르다. 중문은 대홍수 때 유실되어 1, 2차 복원을 하여 지금의 모습이다. 보수공사 중인 성곽을 걸어 가산바위로 향했다. 기암은 멀리서 봐도 위엄이 느껴졌다. 나무든 바위든 오래되고 큰 것에서는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에너지가 있다. 기암의 상면에 큰 구멍이 있었는데 전설에 의하면 신라시대 도선스님이 지기를 누르기 위해 그곳에 쇠로 만든 소와 말 형상을 묻었다고 한다.

가산정상에서 내려다 본 풍경
가산바위에서 내려다 보면 멀리 구미 금오산과 유학산과 황학

멀리 구미 금오산과 유학산이며 황학산을 굽어본다. 산천이 말을 걸어오는 것 같다, 마음 같아서는 해가 저물 때까지 앉아 있고 싶지만 일정이 빠듯해 일어섰다. 원래 코스는 서문이지만 용바위와 유선대로 향했다. 901미터 정상에 장대터와 가산, 한티재 표지석이 있다. 그곳에서 내려다 본 세상은 한 마디로 경이로움이다. 살아있다는 게 행복한 순간이다. 낮은 곳에서 볼 수 없던 것을 다 볼 수 있다. 오밀조밀한 능선과 골짜기. 그 사이사이 옴폭 들어간 곳마다 마을이 들어앉았다. 자연이 인간을 품고 있다.

가산정상& 하양과 영천 의성과 군위가 보인다

꼭대기에 서면 여유가 생긴다. 자유, 관망, 비움 등의 단어가 마구 떠오른다. 복작대며 경쟁하고 비교하며 사는 일이 부질없어지면서 잠시나마 비움의 상태가 된다. 거북이 등 같은 봉우리를 내려다보다가 유선대에서 성곽을 타고 내려갔다. 표식이 없어 얼마를 가야하며 어디쯤에 북문이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북문에 닿을 것이었다.

가산정상에서 북문으로 이어진 성곽길

무너진 성곽길을 30여 분 걸어 북문에 도착했다. 이곳은 문명의 이기에서 벗어난 형국이다. 남문, 동문, 중문에 비해 훼손이 심했고 이끼와 잡풀도 많았다. 가공되지 않은 무구함에서 모진 세월이 할퀴고 간 세월이 읽혔다.

북포루
무가한 세월이 느껴지는 북문
북문에서 윗산당마을 오는 숲길

오늘 마지막 코스인 윗산당 마을을 가기 위해 북문을 통과했다. 이제 성밖으로 나온 것이다. 오른쪽에 계곡을 낀 숲길을 2.4㎞ 걸었다. 계곡물 소리가 시원하다.

윗산당마을(북창저수지)
북창저수지 둑에 설치된 포토존

토끼바위와 너리청석, 개를 닮은 개상웅덩이 바위를 지나 북창저수지에 도착했다. 먹구름과 산안개가 말끔히 걷힌 하늘은 눈부시게 푸르렀다. 저수지 둑에 만들어 둔 포토존에서 사진을 찍었다. 지나온 길도 함께 찍혔다. 역광이라 사람은 검었다. 그럼 어떤가. 때로는 실루엣이 더 많은 걸 말해주지 않던가. 임수진 수필가

임수진 소설가
임수진 수필가

◇여행 스케치

△위치 : 경북 칠곡군 가산면 가산리= 1974년 사적 제216호로 지정. 행주산성이나 남한산성 등 대부분의 산성이 그러하듯 요새에다 가파르다. 산줄기를 이용하여 쌓은 석성이며 성안에 객사, 인화관, 관아, 군관청이 있었고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한 건축기법으로 지어졌다. 가산바위에 앉아 무념무상으로 있어보면 산천이 말을 걸어오는 느낌.

 

가산바위 가는 길
비상시 이용하는 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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