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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구 근대미술사] 12. 한국 수채화 변화의 바람 일으킨 박기태
[경북·대구 근대미술사] 12. 한국 수채화 변화의 바람 일으킨 박기태
  • 박경숙 큐레이트·화가
  • 승인 2020년 06월 02일 20시 55분
  • 지면게재일 2020년 06월 03일 수요일
  • 13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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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있는 즉흥적 기법 시도…수채화 폭넓은 세계 열어
박기태

서양 미술사에서 초기의 수채화는 독립적인 작품으로써 제작되기 보다는 판화나 유화 등을 제작할 때 채색을 위한 보조적인 기능을 담당하던 화법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도화시간이라 해서 근대기는 물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유치원 및 초·중등학교에서 편리한 준비물로 인해 미술수업에 빠지지 않는 친근한 미술 장르이다. 그러나 광복 후에 유화의 보편화로 수채화가 점차 위축되어 갔고 하위의 미술문화 장르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대세이었다. 이러한 한국화단의 분위기에 독보적인 화법으로 위축되어 가던 한국 수채화를 격상시킨 이가 있는데 바로 수채화가 박기태(울산 출생, 1927~2013)이다. 2000년 서울화단에서 포항으로 낙향해 여생을 마친 박기태는 젊은 시절 대구, 안동, 영주 등에서 중등교사를 하다가 중앙화단으로 진출해 수채화가로 성공을 거두었다. 박기태는 포항미술협회 초대지부장을 역임했던 조희수와 화우이며 경주예술학교 1회 졸업생이다. 초대 교장이던 스승인 손일봉의 영향으로 평생 수채화만 고집하게 된 박기태는 한국수채화 진흥에 많은 역할을 했으며, 경북지역은 물론 우리 지역에도 새로운 수채화 바람도 일게 했다.
 

박기태 젊을때 사진 뒤편 왼쪽 ( 경북 수채화가 이수창, 이수원과 함깨)

1960년대~1980년대의 한국 화단은 추상미술이 대세이었다. 박기태는 이러한 시기에 아카데믹한 수채기법이 만연한 한국화단에서 투명과 불투명의 색채로 카리스마적인 힘과 즉흥적인 기법을 시도해 수채화의 폭넓은 세계를 열어 주었다. 박기태의 작품은 구상화이지만 표현주의적인 추상화를 보는 느낌을 받는다. 그의 작품에서 구상적인 선(線)의 일부 요소만을 걷어낸다면 즉흥성이 감도는 표현주의적인 추상성이 감돌고 있는 느낌이 드는 것도 당시 화단의 분위기에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유채 위주의 추상적인 분위기의 대세 속에서 박기태의 수채화가 생명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표현주의적 화풍의 본질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미완의 그림 같은 의도적인 여백의 남김, 거친 선, 즉흥적이면서 속도감과 힘이 있는 붓 놀림은 박기태만이 가지는 수채화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 보였던 기법이었기에 당시 화단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고 독보적인 수채화가로써 입지를 다져 나갔다. 이러한 일면은 한국화단에서 수채화의 아카데믹한 화풍을 과감히 탈피하고 작가의 행위와 사고를 중요시하는 새로운 수채화풍을 선보이는 계기가 됐고, 점차 독립적인 장르로써 인식 변화와 많은 전문 수채화가들이 등장하는 길을 열어준 셈이다.

조희수(1927년생)가 1980년대 포항에 10여 년간 머물러 있을 때, 수도권에서 수채화 작가로서 유명세를 타던 박기태가 포항에 스케치 여행을 자주 오면서 우리 지역에도 수채화의 변화의 바람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1997년 포항대백갤러리에서 열렸던 박기태 초대전은 당시, 우리 지역 수채화풍이 아카데믹한 수준에 머물고 있었을 때였고, 수채화 전문작가가 전무했던 시기였다. 이러한 지역 화단의 분위기에서 박기태로 인해 새로운 수채화풍을 선보이는 계기와 함께 박용을 비롯한 수채화 전문가 배출과 아마추어 수채화가들이 많이 배출되는 붐이 형성됐다.

박기태 작 ‘여인’

1980년대, 필자가 박기태를 우리 지역에서 처음 뵙게 됐다. 베르모 모자를 쓰고 날렵한 체구와 예리한 눈빛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가 남달랐고, 까다로우셨으며 카리스마가 넘쳐흐르는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1980년대 포항에 조희수와 함께 야외 스케치를 자주 오셨는데, 송림과 조선소 부근 풍경을 많이 제작했다. 당시, 송림 숲은 사람이 잘 다니지 않았었고 자연스러운 맛이 그대로 느껴지는 숲이었다. 박기태가 작품 제작을 하는 날이면 스케치 현장의 지역민들은 구경거리가 난 것처럼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수채화를 이상하게 그린다. 낙서를 잔뜩 그린 듯 하면서 대충 그린다”는 둥 그러면서 “시원하다” 등의 말들을 하곤 했다. 밑그림 없이 현장에서 붓으로 바로 스케치를 하면서 채색하는 기법은 특이하고 신기해하기도 했으며, 처음에는 낙서하는 듯 한 화지를 지켜보면서 점차 완성작을 그려 갈 때 쯤이면 모두가 감탄사가 나오곤 했다. 그리고 야외스케치에 동참한 몇 몇의 지역 수채화 후학들은 중등학교에서 쓰던 물감과 종이 재료만 접하다가 박기태 선생이 사용하던 전문 수채 재료를 보고 물어 보기도 하고 만져 보기도 하는 등 전문지식을 터득하는 되는 계기가 됐다. 이러한 체험이 서서히 우리 지역에 취미 수준의 수채화가에서 점차 전문 수채화가가 배출하는데 간접적으로 일조하게 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여인 K

20대 초반, 필자도 박기태와 야외스케치를 몇 번 따라 간 적이 있었다. 박기태가 즉석에서 나를 모델로 펜 인물화 한 점을 그려 주었다. 스케치의 빠르고 강렬한 선은 펜이 한번 시작점으로 그리기 시작하면 펜을 떼는 경우가 거의 없을 정도로 단숨에 인물을 그려낸다. 인물의 특성을 파악하는데 정확하고 날카로운 순간적 관찰이 박기태 선생의 크로키가 가지는 특징에 놀라웠다. 박기태는 여인, 누드, 풍경, 꽃을 대상으로 수채화를 많이 남겼다. 여성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곡선과 아름다움은 건강한 에너지 넘치게 하고, 모델의 동적인 모습에서 출렁이고 생명이 느껴지는 곡선으로 탈바꿈 시킨다. 또한 모델마다 입은 패션에서 오는 색채와 특유의 문양의 분위기도 그림의 또 다른 변화와 활기를 자아내어 수채의 색상을 풍부함과 단조로움을 부셔 버리는 역할을 더해 준다.

2000년, 박기태는 포항 장기면에 살고 있던 아들 곁으로 정착하게 된다. 화려했던 전성기를 지나 옛날 같지 않은 작품 판매와 활동, 그리고 건강이 허락지 않은 상태이었지만, 장기면 인근 풍경을 스케치와 수채화 작품을 남겼다. 또한 2009년 12월 포항시립미술관 개관전에 출품과 더불어 개막식에도 참석해 포항시립미술관의 발전을 기원하기도 했다. 그리고 2013년 우리 지역 포항의료원에서 생을 마쳤다. 비록, 박기태 선생이 우리 지역에 남긴 업적은 1회의 개인전(1997년 대백갤러리)밖에 없고, 딱히 중요하지 않는 소소한 포항과의 인연이었지만, 박기태가 간접적으로 포항 수채 회화사에서 기여를 했음을 우리는 소중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박경숙 큐레이터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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