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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구 근대미술사] 17. 조각가 백문기
[경북·대구 근대미술사] 17. 조각가 백문기
  • 박경숙 큐레이터·작가
  • 승인 2020년 08월 11일 18시 13분
  • 지면게재일 2020년 08월 12일 수요일
  • 13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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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매한 예술정신으로 생전 작품 영원성 간직
백문기 선생

포항 탑산은 한국조각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두 조각가의 작품이 있다. 김종영 선생(이하 김종영)의 ‘전몰학도충혼탑’과 백문기 선생(이하 백문기)의 ‘포항지구전적비’다.

김종영은 한국 추상조각의 선구자이고, 백문기는 한국 사실주의 구상조각가로 유명한 작가이다. 두 사람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교 스승과 제자 사이이며, 6·25 전쟁으로 인해 2점의 기념비가 탑산에 세워지게 됐다. 이들은 각자 추구하는 예술관이 다르다.

하지만, 탑산에서 가까운 거리에 두 작품이 나란히 건립됐다는 사실은 의아스럽다. 그러나 여기에는 보이지 않는 사연이 있다. 그냥 지나치기 쉬운 숨은 얘기이지만 백문기가 예술가로서 타인의 작품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있었기에 문화유산적 작품을 보호하게 됐다는 인문학적 스토리다.

1979년 당시, 군부대에서는 1957년에 건립된 김종영의 ‘전몰학도충혼탑’이 건립됐으나 전쟁에 대한 기념비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일반인들이 쉽게 숙지할 수 있는 기념비를 다시 세우자는 계획이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6·25 전쟁의 의미를 전달하기에는 김종영의 추상작품이 효과가 미비하다는 의견이 많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즉 ‘전몰학도충혼탑’을 없애고 다시 건립하자는 의견이 분분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1970~1980년대 당시, 군부대에서는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고 구상조각가로서 인정받은 백문기에게 ‘포항지구전적비’를 의뢰했다. 백문기는 작품 제작을 수락했지만 존경했던 스승의 작품을 해체할 수 없었던 입장에서 여러 상의 끝에 용흥산의 중턱에 부지를 조성해 새 모뉴먼트를 건립하게 됐던 것이다. 당시, 반공교육이 거세었던 시기에 군부대의 완고한 결정을 쉽게 꺾지 못했을 것으로 판단되는 상황에서 두 작품이 적당한 거리에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은 백문기의 스승에 대한 존경심과 예술가로서의 윤리적인 배려가 빛을 발했기 때문이다. 이리해 문화유산적 가치를 지닌 ‘전몰학도충혼탑’이 해체되지 않고 두 거장의 작품을 우리 지역에서 보유할 수 있게 됐다.

포항지구전적비(측면)

1970년대는 호국관광의 일환으로 전국에 전적지사업이 이뤄졌다. 이 사업은 전국의 전쟁 유적지를 국민 관광과 연계시키기 위해 교통부와 관광공사가 함께 추진하는 사업이었다. 1970-80년대 전국에 총 15개의 전적비가 건립됐고, 그중에 다섯 개는 왜관·포항·영산·영천·다부동과 같은 낙동강 전선 인근에 건립됐다. 백문기는 포항과 영천에 전적비를 남겼다. 1980년에 제작된 ‘영천지구전적비’는 오른쪽 허리춤에 총을 받치는 경계 자세를 취하고 늠름하게 서 있는 국군이 쓰러져가는 국군을 무릎에 기대주고 있는 형상이다. 당시, 1960년대 이후의 전쟁 기념물은 남북한이 대치하는 잠재적인 전시 상태라는 특수성 때문에 적진으로 파고드는 분노에 찬 군인상의 조형물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포항지구전적비’ ‘영천지구전적비’는 관람자들에게 인간적인 울림을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백문기의 예술성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 제작됐다.
 

포항지구전적비(정면)

‘포항지구전적비’는 제3사단을 기념하는 금속 조형물이 추상으로 표현돼 졌고, 전면에는 군인이 학생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청동상이 세워졌다. ‘포항지구전적비’는 학생이 총을 거꾸로 세워 무장해제의 상태로 묘사됐는데, 이는 군인과 학도병이 마침내 ‘평화’를 지켜내었다는 분위기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3단계의 둥근 계단식 위에 솟아오른 수직형 화강암은 앞면에 두 인물들을 함께 구성함으로써 전체적으로 굳건하고 안정감을 느끼게 해 준다. 만약 백문기 작가가 역동적이고 과장된 전투 장면을 조각했다면 적당하게 거리를 둔 김종영의 ‘전몰학도충혼탑’과 조화롭지 못했을 것이다. 이 점은 스승인 김종영 선생에 대한 존경의 마음과 배려가 있었다는 작가의 심리를 엿볼 수 있다. 학도병과 군인이 어깨를 나란히 감싸고 정면을 바라보는 자세는 격렬한 전투에서 평화를 지켜내었다는 두 인물상의 자세를 통해 보는 이들에게 조국애를 깃들 수 있도록 했다. 이것은 고요한 정신성을 표현하고 있는 ‘전몰학도충혼탑’의 분위기를 깨뜨리지 않으면서도 백문기의 ‘포항지구전적비’는 전통적이면서 모더니티의 균형 잡힌 기법을 기초로 해서 평화와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상을 은근히 드러내게 함으로써. 두 작품이 서로 견제하는 듯 조화로운 분위기를 보여 주고 있다.

1949년 서울대 조각과 실기실(김종영(왼쪽)l과 백문기(오른쪽)

백문기는 1946년 서울대학교 예술학부가 최초로 생기면서 조소과 1기 입학생이자 졸업생이다. 그는 해방 1세대 작가로서 일본교육의 잔재가 남은 조각을 탈피하고 자생적인 한국의 조각에 대한 정체성에 천착했다. 당시 구상조각보다 추상조각이 우세했던 분위기에서 사실주의에 기초한 조각을 제작했고 이화여자대학교 조소과 교수(1958~1967)로 재직하며 구상 조각 교육에 힘썼다. 그의 작품 중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얼굴 조각이다. 그는 모델을 두고 얼굴이나 인체를 제작하지 않았다. 특정 대상에게서 받은 인상을 작가의 내면에 보편적이고 순수한 원형의 상태로 초기화시켜 정작, 작품을 만드는 시간에는 무념무상의 상태를 일관하며 숙련된 손놀림으로 무의식 안에서 형상을 표면화시켰다.

백문기

백문기는 교육자로서의 본분에 충실해 작품이 거래되는 화랑 전시를 지양했고, 작품에는 사인이 없다. 게다가 평생 단 한 번의 개인전도 원치 않았을 정도로 조각가로서의 사명감과 교육자로서의 청렴한 태도를 지닌 삶을 살아왔다. 그래서 구순을 2년 앞둔 백문기는 첫 작품이자 마지막 개인전을 열었다. 또한 제자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협작을 작가 개인의 사인으로 인해 공공연하게 인준화 시킨다는 것이 부당하다고 여겨 그는 평생 제자를 두지 않았으며, 전적비를 만들 때도 거의 혼자서 감당했다.
 

포항지구전적비

용흥동 탑산에 김종영과 백문기의 두 작품이 나란히 건립됐다는 점에서 우리 지역으로서는 소중한 인문학적인 스토리를 갖게 되는 행운을 갖게 됐다. 그동안 김종영의 ‘전몰학도충혼탑’에 가려져 백문기의 ‘포항지구전적비’는 다소 묻혀진 느낌이 든다. 그러나 백문기의 깊이 있는 예술정신으로 인해 ‘전몰학도충혼탑’이 더욱 빛을 더하게 됨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고, 그의 고매한 예술정신으로 인해 두 기념비의 작품들이 영원성을 간직하게 됐다. 예술작품은 초시간적인 어떤 진리를 매개해 주는 역할을 한다. 백문기가 평생 인물 조각에 천착하면서 조각상에 신비한 힘이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인간의 맑은 정신성을 발견하고 길어 올리려는 무한한 노력이 있어서 가능하지 않았을까?
 

박경숙 큐레이터·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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