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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을 걷다] 15. 사월 초파일과 백중 때 산문(山門)을 여는 백흥암
[팔공산을 걷다] 15. 사월 초파일과 백중 때 산문(山門)을 여는 백흥암
  • 글 임수진 수필가·사진 박성규
  • 승인 2020년 08월 13일 18시 19분
  • 지면게재일 2020년 08월 14일 금요일
  • 15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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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호수 위로 물든 푸른 산자락 물가에 앉으면 한 폭의 그림 같아"
나무의 결에 새겨진 세월이 고귀하다
풍경과 하나가 된 신일지

오솔길 입구에 이정목이 섰고 팔공산 둘레길 빨강 리본은 철조망에 걸려 팔랑인다. 오른쪽으로 신원리 캠핑장 계곡이 이어졌다. 좁다란 길은 음영이 확실했고 근처에 양봉을 치는지 벌 몇 마리가 날아다닌다. 길가에 마구잡이로 자란 잡목은 머리채를 잡아당기거나 어깨나 등을 내려치기도 했다.

13구간 시작점(양봉장 우측 계곡은 신원리 캠핑장)
사유지& 입산금지 푯말이 붙었다

곧이어 우둘투둘한 오르막이 이어지더니 과수원이 나왔다. 사유지로 송이 채취 구역이니 입산을 금지한다는 푯말이 있다. 둘레길 조성 시 영천시와 땅 소유자 간에 원활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듯했다. 표식이 없어 헤매다가 겨우 숲으로 들어섰다. 총체적 난관 지점을 통과하자 완만한 길이 이어졌다. 13코스는 그나마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제법 났다. 사람 냄새, 사람 흔적, 누군지 모르지만 그들이 방금 지나갔거나 혹은 오고 있는, 그들이 누구건 길의 선상에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위안이 된다.
 

물길이생긴 산자락
쓰러진 나무, 고단한 생을 정리하고픈 걸까

내린 비로 초목은 수분을 잔뜩 흡수하였고 남은 물은 골짜기를 타고 흘렀다. 산자락 군데군데에 물길이 생겼다. 땅은 질척거렸지만, 수피는 촉촉했고 이파리는 생기 있었다. 군데군데 야자 매트가 깔려 있어 다행이다. 바람에 부러진 나무가 길을 가로막았다. 삶을 마감하는 것들은 대부분 대지에 몸을 눕혀 고단한 생을 위로받는 것 같다.
 

국가 지점번호와 이정목
‘황순원소나기‘를 생각하며 건넌 징검다리

이번 코스는 이정목과 표식이 잘 되어 길 찾는 데 어려움이 없다. 위급 시 현 위치를 알려 줄 국가 지점번호도 친절하게 서 있다. 이제 징검다리 하나만 건너면 신작로다. 왼쪽으로 올라가면 운부암이고 오른쪽 길은 은해사 방향이다. 무심히 지나쳤다가 황순원 소설 ‘소나기’를 생각하며 다시 징검다리를 건너 본다.
 

마음속 기원을 담은 돌탑
흙이 무너져 실핏줄처럼 드러난 뿌리

이제부터 은해사까지 2.5㎞는 차로다. 자칫 따분할 수 있지만 산세가 수려해서 걷는 맛이 있다. 무엇보다 누가 언제 무슨 연유로 쌓았는지 모를 돌탑이 재미를 더한다. 올해 장마는 지루할 만큼 길다. 국지성 폭우로 전국 곳곳이 큰 피해를 입었다. 이곳 역시 지반이 약해져 흙더미가 쓸린 곳이 보인다. 잡목의 뿌리가 실핏줄처럼 드러났다.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가 더는 없기를 바라며 돌멩이 하나를 주워 돌탑 위에 올렸다.
 

신일지 삼거리
사람을 기다리며 유영하는 물고기

길은 이어지고 삶도 이어진다. 풍화된 암석과 길쭉길쭉한 소나무 군락지를 지나니 하늘과 산을 담은 신일지가 나왔다. 호수는 맑았고 반영된 산자락은 푸른빛을 더했다. 물가 그루터기에 풍경과 하나 되어 앉아본다. 물고기가 떼를 지어 유영한다. 희한한 건 녀석들이 사람 소리에 반응한다는 거다. 여행객이 던져준 간식의 맛을 알고 있는 것처럼. 문득 파블로프의 개가 생각났다. 먹이를 줄 때마다 종을 치는 실험을 한 후 일정 시간이 지난 뒤 먹이는 주지 않고 종만 쳤을 뿐인데도 개의 침샘은 먹이를 먹을 때처럼 분비되었다. 물고기가 사람 소리에 조건반사적으로 반응하는 것 또한 소리와 먹이의 연관성 때문일지 모르겠다.
 

신일지 앞 이정목
계곡 물소리와 매미소리 우렁차다

팔각정 앞에서 탐방로 안내판을 보았다. 직진하면 은해사, 우측으로 가면 백흥암이다. 그곳이 궁금했다. 1년에 단 두 번, 사월 초파일과 백중 때만 산문을 여는 곳. 그 말이 맞는다면 경내로 들어갈 확률은 거의 제로다. 이상했다. 그런데도 가보고 싶었다. 계곡의 물소리와 매미 소리가 우렁찼다. 땀이 약간 날 정도의 건강걸음으로 30여 분이 걸린다. 이미 몇 시간을 걸어온 터라 종아리가 뻐근했지만 마음이 원하는 일을 할 때는 새로운 에너지가 생긴다.
 

백흥암 극락전

약간 기진한 상태에서 도착한 백흥암. 흘린 땀방울을 보상받는 기분이 들었다. 암자라고 하기는 규모가 꽤 컸다. 무엇보다 고즈넉했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는데도 숨을 죽이고 발뒤꿈치를 들게 된다. 살금살금 걸어 보화루 앞에 섰다. 아름다웠다. 고귀하게 늙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단청 없이 나무의 결을 섬세하게 살렸는데 그 빛이 너무나도 온화했다. 건물 앞에서 마음이 고요해지긴 처음이다. 아니, 착해졌다.
 

물맛 좋기로 소문난 백흥암

신라 경문왕 13년(873), 해철 국사가 지을 당시 이름은 백지사(柏旨寺)였다. 주변에 잣나무가 많아 그리 불렀다고 한다. 이후 중종의 아들인 인종의 태(胎)를 태실봉 동쪽 기슭에 봉안하면서 백지사는 중요한 곳을 지킨다는 의미인 ‘막중수호지소’로 지정되었다. 이곳 지세가 용이 승천하는 것과 같고 운부암에서 일어나는 상서로운 구름이 용의 승천을 돕는 형국이라 이름도 백흥암으로 바꾸었다. 이때부터 백흥암은 왕실 보호를 받는 사찰이 되었다. 무엇보다 인종의 할머니인 정현왕후의 지지가 컸다. 연산군에 이어 왕이 된 중종이 계비인 장경왕후에게서 아들을 얻자 정현왕후는 손자의 앞날이 편안하고 영화롭기를 기원하며 팔공산에 태를 묻었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산문이 열려 있다. 입구에 기도 도량중이나 출입 금지라 되어 있다. 잠깐 갈등하다 경내만 둘러보기로 했다. 마스크 착용도 잊지 않았다. 너무나 고요하여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수백 명이 기거하며 수도할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도량 장소이다. 목조 건물은 품위와 우아함을 겸비했다. 저절로 마음을 낮추게 하는 어떤 힘. 절제의 미속에 숨겨진 고고함, 은은함이 품은 섬세함에 매료되었다.
 

백흥암 진영각 추사 선생의 주련
진영각 기둥에 추사 선생의 여섯 폭의 주련
백흥암 보화루 내부의 편액 ‘산해숭심’ 추사 선생의 글씨

무엇보다 극락전 팔작지붕은 격이 달랐다. 뜯고 중수하고 다시 만든 흔적이 적어 예스러운 멋이 더했다. 범접할 수 없는 품위, 이런 걸 격조 높다고 하는 걸까. 거기다 진영각 기둥에 걸린 추사 선생의 글씨인 여섯 폭의 주련(柱聯)이 품격을 더했다. 보화루 내부의 ‘산해숭심’ 모각본 편액 역시 추사 선생 작품이다. 원본은 은해사 성보박물관에 보관 중 이란다.
 

은해사 극락보전
연리지(사랑나무)

오늘 마지막 코스인 은해사로 향했다. 사찰 앞 계곡 풍경에 매료되어 나무 의자에 앉아 무념무상으로 있어 본다. 나뭇잎이 흔들리고 물살이 일렁이는 게 꼭 숨을 쉬는 것 같다. 오랜만에 마주한 햇살이 반갑다. 은해사 극락보전 앞에서 잠시 머물다 길 따라 계곡 따라 내려간다. 수종이 다른 두 나무가 합쳐진 사랑나무 앞에서 잠시 멈춘다. 100여 년생 참나무와 느티나무 가지가 서로 껴안듯 붙어 자란다. 6 천겁의 인연이어야 하룻밤 함께 할 수 있다는데 종(種)이 다른 두 나무의 연은 어디까지라 연리지(連理枝)로 맺어졌을까. 인연의 소중함을 생각하며 금포정 숲길을 지나 일주문을 나선다.
 

은해사 일주문

 

 

 

글 임수진 수필가

 

◇ 근처 가볼만 한 곳

△운부암(경북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銀海寺)가 거느린 여덟 개의 절집 중 하나이다. 창건 시기는 711년(성덕왕 10)에 의상(義湘)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원통전 안에는 신라 말에 혜철국사(惠哲國師)가 인도에서 해금강으로 들어오는 배 안에서 모셔왔다는 전설이 깃든 청동보살좌상이 있다.

운부암이라 함은 상서로운 구름이 떠서 붙인 이름이다. 한국 불교계의 거장인 경허(鏡虛), 성철(性徹) 스님뿐 아니라 많은 선사가 이곳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그 기운을 받기 위해 일반인도 많이 찾는다고.

 

 

팔공산 둘레길 지도
은해사 &스님 법문 중
은해사 앞 계곡, 나무의자에 잠시 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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