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포 어민에 온정어린 시선…고향 애정 화풍에 담아

권영호 인물사진

1960년대 초반, 초기에 활동했던 지역 미술가들이 외지로 모두 떠나버리고 거의 공백기에 가까운 분위기이었다. 이 시기에 서울에서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인 구룡포중학교에 미술교사로 교편을 잡으면서 왕성한 작품 활동으로 화단에 생기를 불어 놓은 화가가 있었다. 바로 권영호 선생(이하 권영호)이다. 그는 구룡포초등학교 시절부터 포항수산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다방면에 예능적 기질이 탁월했고, 성격이 활달하고 긍정적인 사고와 의리로 다져진 인물이었다.

초임지였던 구룡포중학교 미술부, 1961

이러한 태도는 1960년대 침체된 포항화단을 이끌어 가는데 일조했다. 1961년 ‘문동미우회(이후 서라벌동문전으로 변경)’창립, 1962년 ‘권영호·정외자 2인전’. 1963년 포항 인근 미술대학 출신 모임인 ‘향미전’을 창립해 그룹전이라는 전시형태를 열어 활성화를 도모했다. 이후 1960년대 후반부터 대구·경북 중등미술교사 생활과 1976년 경남대학교 사범대학 미술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포항화단과는 40여 년간 교류가 단절되다시피 했지만, 권영호가 남긴 작품들과 관련 자료는 포항미술사에 소중한 자료로 기록되고 있다.
 

포항수산고등학교 3학년 시절

권영호는 타고난 부지런함과 호쾌한 성격으로 많은 사람들과 잘 어울렸고 단체를 리드하는 성격을 지녔다. 아버님이 앞을 못 보시던 어른이셔서 가정의 생계를 위해 고생도 많이 했지만, 효자였고 우수한 학업 성적으로 학창시절을 보냈다. 서라벌예술대학(현 중앙대학교)시절 가난 때문에 연극학과에서 미술학과로 전과를 했지만 여전히 생활이 힘들었는데, 지도교수인 장리석의 배려로 권영호는 미술가의 삶을 이어 갈 수 있었다. 장리석은 서울 용산 삼각지에서 국가에서 인정하는 직업훈련원을 운영했는데, 권영호가 직업훈련원에서 오랫동안 숙식하며 미술 공모전에도 출품하는 등 미술가로서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또한 구룡포중학교 미술 교사에 권영호를 추천하면서 경제적 측면은 물론, 권영호의 미래를 활짝 열어 주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1961년 고향인 구룡포에 미술교사로 부임하면서, 권영호는 예술적 재능이 개화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는 혈기왕성한 젊은 시절이었고 그림에 대한 열정도 남달랐다. 교무실 내 누가 지켜보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넓직한 공간을 확보하며 그림을 그렸으며, 미술반을 결성해 학생들에게 그림을 성심 성의껏 지도했다. 한마디로 경상도 특유의 남성 다운 기질과 처세술에도 강했으며, 예술적 성취감에도 적극적이었다. 그 시절 권영호는 베레모 모자를 쓰고 수염을 기르며, 파이프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독특했다고 지역 출신 화우(김두호·노태룡·이방웅)들은 회상하고 있다.
 

권영호, 정외자 2인전 1962년

1960년대 초, 구룡포는 생선이 많이 잡혀서 구룡포는 번화했으며, 집집마다 생활이 윤택했다. 그래서 사립중학교인 구룡포중학교는 재력있는 부잣집의 후원으로 권영호의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해 나갈 수 있었다. 이후 1960년대 후반 어획량이 점차 옛날 같지 않아서 구룡포중학교는 운영이 어려워지자 공립중학교로 변경돼 권영호는 대구·경북지역 미술교사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서창환, 강정영 등 대구·경북지역 작가들과 교류가 시작되면서 장리석의 화풍에서 벗어나 자기 세계의 예술로 변화를 시도해 나간다. 그리고 대구에서 활동하고 있는 포항 출신 장석수, 노태룡 작가들과 끈끈한 만남이 지속돼 후일 장석수에 대한 대학원 연구논문도 출간했다. 외향적인 성격이어서 기차 안이든, 거리이든 아랑곳하지 않고 스케치와 작품을 연구하며 작품 수준 향상에 노력했다. 또한 포항화단을 염려하고 생각하는 노력도 보였다. 1960년대 포항화단에는 상업성이 미비한 동양화가 무분별하게 많이 전시되고, 판매가 되던 시기였는데, 권영호는 이러한 점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직접 작가에게 건의와 시정을 요구하며 불매 운동도 펼쳐 왔던 사실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하듯 1960년대 초 권영호의 활동은 포항화단 활성화에 많은 역할을 했고 애써 왔다.
 

제2회 개인전포스터 1968.6.17~6.23 청포도다방

권영호는 가끔 물안개 같은 비가 내리는 새벽이면, 소년 시절을 회상하는 버릇이 있다. 구룡포항을 바라보면서 자라난 권영호에게 노년의 화백의 꿈을 이루게 했던 원동력은 푸른빛이 넘실거리는 구룡포가 창작의 원천이었다. 권영호에게 유년의 기억은 각박한 현실에서 이탈해 과거로의 회귀를 통해 현재의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는 ‘치유의 장(場)’이었다. 60여 년간 화폭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물고기의 유동성과 흐름은 어린 시절로 되돌아 가고픈 순수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메타포이었다.
 

권영호 ‘비바리A’
권영호 ‘봉(奉)’.

권영호는 뚜렷한 작품 수준을 보여주고 있는데 대학졸업 이전과 이후에는 작품성이 미비했고, 구룡포 미술교사 시절부터 작품 수준이 많이 향상되었다. 1960년대~70년대의 그림은 구룡포 서민들의 삶의 풍경에서 거친 붓 터치와 어두운 채색가 주를 이룬다. 어려운 환경을 겪었던 권영호의 시선은 항상 구룡포 어민들에게 향해 있었다. 1980년대는 수직 수평선이 교차하는 나무 문살에 관심을 보인 시기다. 이것은 옛 선비들의 강직한 절개와 함께 그 문을 통해 어린 시절 부모님의 따뜻한 온정을 문틈으로 지켜보던 포근한 기억들이 점철된 그림들이 주를 이룬다. 1990년대는, 木魚, 門, 蓮 등을 그리며 餘白의 여유로움으로 한국성을 부각하는 작품들을 남겼다. 2000년대 이후와 말년의 작품은 물고기의 ‘회유(回遊)’를 통해 좀 더 직접적으로 고향에 대한 애정을 화풍으로 완성되었던 작품들을 남겼다.
 

서울에서 귀향한 권영호는 1960년대 침체된 지역 화단에 생기를 불어넣어 자생적인 예술문화의 분위기를 이끌어 가는 데 공이 컸던 사람이다. 그 시기에 누구나 살기 힘든 시대적 환경에도 불구하고 투철한 작가로서의 의지와 열정은 지역 화단의 공백기를 채워 나갔다는 점에서 그의 역할은 크다. 그는 구룡포 중학교에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외향적이고 리더적인 성격으로 개인전과 단체전 결성, 그리고 제자 배출과 무분별한 상업성이 짙은 동양화 불매 운동 등 건강한 화단 형성을 위한 노력들은 1960년대의 포항화단사의 맥을 이어가는 데 중요하게 작용되고 있다. 비록, 권영호가 대구·경북지역 중등교사로 활동, 그리고 경남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지역 화단과는 멀어졌지만, 타지에서 구룡포 바다를 매일 먹고 마시고 음미한 마음들은 우리 지역을 참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컸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의 화풍 속에는 항상 구룡포가 들어 있었고, 그 속에서 유영하며 일생을 보냈다.

박경숙 큐레이터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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