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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성지를 찾아서] 7. 영천 충효재
[호국성지를 찾아서] 7. 영천 충효재
  • 한정웅(세명고 WeWe동아리) 시민기자
  • 승인 2020년 09월 28일 22시 59분
  • 지면게재일 2020년 09월 28일 월요일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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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여름이 가고 가을이 다가 왔습니다. 이번시간 찾아가본 호국성지는 가을과 왠지 잘어울릴 것 같은 영천의 재실 인데요. 바로 구한말 의병대장인 정환직과 그의 큰아들이 정용기부자를 모신 영천 충효재입니다.

산남의진 기념사업회 조충래 부회장님과 함께 충효재 안을 살펴 보았습니다.

Q.산남의진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조충래/산남의진 기념사업회 부회장

산남의진은 1905년도에 우리나라가 을사늑약에 의해서 외교권을 일본에 박탈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1905년 이후에 6년 때부터라고 볼 수 있겠죠. 이 을사늑약에 항거해서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는데 그 중 이 영남 지방을 대표하는 다시 말해 산남이란 태백산 이남이라고 볼 수 있겠죠. 이곳에서 전체적으로 영남을 대표해서 의병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 의병진 이름이 산남의진입니다, 산남의진은 고종황제의 가까운 신하였던 정환직 선생이 이곳에 와서 아들 정용기 대장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키게 되고요. 그래서 여기가 산남의진의 본거지가 되는 거죠. 그래서 산남의진 이러면 아 영남을 대표하는 의병진이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어요.

Q.이곳 충효재는 어떤 곳인가요?

조충래/ 산남의진기념사업회 부회장

이 충효재는 산남의진이 1906년에 일어나서 1910년 합방 때까지 줄기차게 활동을 했었는데 그중에 전사하신 분들도 많고 돌아가신 분도, 흩어진 분도 많겠죠. 그런 과정에서 합방이 되고 1923년 그때쯤이라고 보는데 남아있던 의병 선생님들이 돌아가신 정환직 정용기 대장과 의병들을 기리기 위해 뭔가 해야겠다. 생각을 하셨겠죠. 그래서 정환직 선생의 고향이 여기고 이곳은 정환직 선생 할아버지께서 경영하던 서당 터라고 합니다. 여기에다가 충효재를 짓고 그분들을 기리는 건물을 짓게 된 거죠 그래서 충효재라고 합니다.

세명고 WeWe동아리 정다연 학생이 산남의진기념사업회 조충래 부회장으로 부터 충효재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세명고 WeWe동아리 정다연 학생이 산남의진기념사업회 조충래 부회장으로 부터 충효재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부회장님은 무지했던 저를 위해 충효재와 삼남의진과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대장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주셨습니다.

 

조충래/산남의진 기념사업회 부회장

여기는 충효재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선열들을 여기에 모셨는데요. 그분들의 신의를 다 모시지 못하고 큰 신의에다가 산남의진 신의라고 해서 안에 모셔놨어요.

나라를 위해 목숨바쳐 싸웠던 우리지역의 의병대 였던 산남의진과 의병대장이였던 정환직정용기 의병대장에 대해 이제야 알게 되서 죄송스럽고 부끄러웠습니다.

충효재 건물 바로 근처에 큰 비석이 하나 있었는데요. 바로 짐망화천지수 전세비였습니다. 산남의진이 만들어지는데 계기가된 고종의 밀지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비석이었는데요. 이것도 조충래 부회장님이 자세히 설명해주셨습니다.

조충래/산남의진기념사업회 부회장

고종황제가 안타깝게도 1905년 을사늑약에 의해서 빼앗기는데요. 그때 을사오적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이 강압적으로 황제의 옥쇄를 찍게 했다 이렇게 얘기를 하죠. 어쨌든 고종황제는 본의 아니게 나라를 잃게된 상황이니까 억류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누군가에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가까운 신하들에게 밀지를 내리는데요. 그런데 주변에 워낙 바라보는 눈이 많으니 비밀히 조서를 내린다 해서 비밀히 밀서를 내린다 해서 밀조이죠. 그래서 기록에 의하마녀 산남의진 기록에 의하면 황제께서 정환직 선생에게 진망이라 하면서 그대는 화천지수를 아는가 이렇게 물어요. 화천지수는 전국시대 제나라 경공의 이야기인데요. 그때 경공의 가까운 신하가 황제를 구하기 위한 이야기가 있어요. 그때 봉축부라는 신하가 황제의 옷을 갈아입고 황제를 신하인냥 해서 화천의 물을 마시고 싶다 화천의 물을 떠오라 하고 보내요. 그래서 포위를 벗어나고 본인은 적에게 사로잡히게 되겠죠. 황제를 구출한 이야기를 빚대어서 짐망 짐은 바라노라 했으니 나를 구해다오이런 뜻이겠죠. 그래서 정환직 선생은 이 밀조를 받고 나와서 아들과 상의를 해서 나는 서울에서 군사를 모으고 준비를 할 테니 너는 영남에 내려가서 의병을 일으켜라 해서 정용기 대장이 1906년도에 내려와서 의병을 일으키고 산남의진이라는 진호를 붙이게 되고...여기에 3000여 명이 모였다고 하는데요. 그분들의 기록은 거의 없지만... 어쨌든 그렇게 해서 1910년까지 줄기차게 그런 활동을 벌였다. 이 비석이 산남의진을 일으키게 된 동기를 부여하는 그런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여기 가장 가까운 곳에 세워 둔 것이에요.

충효재 밖으로 나와 조충래 부회장님께 현재의 학생들이 이곳 충효재에서 무엇을 배워갔으면 좋겠는지에 대해 물어봤습니다.

조충래 산남의진기념사업회 부회장

사실 산남의진 뿐만 아니라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들이 많죠. 그런데도 그분들을 다 잊어버려요. 역사가 묻혀 버리면 우리가 뭘 보고 배울 수 있겠어요. 그래서 산남의진도 사실은 제가 이 자료를 보니깐 1946년 이후에 오랫동안 교과서에 영남을 대표하는 의병장 이름이 정관여 관여는 정용기 대장의 호입니다. 정관여 또는 정용기로 구명이 되고 있습니다. 교과서에도 이름이 없어져 버리고 사실은 산남의진은 한 사람의 의병대장이 일으켜서 그분이 전사하며 끝난 진이 아니라 영남을 대표하는 굉장히 넓은 지역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이런 정신 그 다음에 거기에 참전했던 분들이 대장 한 사람이 아니라 3~4년을 계산 해보면 3000여명 훨씬 넘겠죠. 이분들 정신을 이분들 넋을 너무 외롭게 하고 있다 첫 번째로는 그분들 넋을 기리는 일을 해야하 고 두 번째로는 그분들의 정신을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지금 점점 개인주의로 향해가고 있고 나라에 대한 생각은 굉장히 희박해져가고 있다고 볼 수 있죠. 그런데 따지고 보면 나라가 없는 국민이 없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들은 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굉장히 애를 쓰죠 우리나라 정부도 그렇겠지만 우리 후손들이 이 선열들의 정신을 잘 다듬고 배우고 익혀서 그 정신을 이어받아 우리도 나를 좀 뛰어넘어 우리 사회 우리나라 또 인류 이런 큰 정신을 배울 수 있는 정신을 배울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충효재가 제대로 교육의 장소로 활용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산남의진기념사업회는 일을 하고 있다 이렇게 이해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충효재 앞에는 산남의진 정대장 양세출신 충효동 사적비가 있는데요. 충효재와 함께 같이 보아야할 현충시설입니다. 88년에 건립된 이 비석은 산남의진의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출생지인 검단리를 충효동이라고 하고 그 사적을 기록한 것으로 이 곳에 사적비를 세워서 나라와 겨레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게하는 겨레의 산 교육장 으로 삼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깊어가는 가을, 혹시 가을여행을 계획하신다면 호국의 고장 영천으로와 이 곳 충효재를 찾아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숭고한 애국 애족 정신을 느껴보시기를 추천합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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